[파이낸셜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농단 의혹' 사건을 담당한 1심 재판부가 일부 재판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의도가 없다", "직무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파견 법관을 통한 헌법재판소 보고서, '물의야기' 보고서 등에 대해선 직접 지시한 사실이 없거나, 검찰의 공소사실과 다른 목적으로 작성됐다고 판단했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지난 26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기소된 지 약 4년 11개월 만에 나온 결론으로, 그간 290여차례 공판이 진행됐다. 사안이 방대하고 복잡한 만큼 판결문은 A4용지 기준 3160쪽 달하며, 선고공판은 이례적으로 휴정을 갖는 등 장장 4시간 27분 동안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여부로, 재판부 역시 이 부분을 가장 까다롭게 따졌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재판에 개입할 직무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권 남용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했다.
강제징용 사건에 외교부 등과 협의…실질적인 개입은 인정 안돼
재판부는 '재판 거래' 의혹의 핵심 중 하나였던 2014~2016년 강제동원 재상고 사건에서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협의한 사실은 인정했다. 김앤장은 당시 피고인인 일본 전범기업 측 소송 대리를 맡고 있었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외교부로부터 불만·요청 사항을 전달받았고, 양 전 대법원장도 이같은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이 공모해 강제징용 재상고심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외교부가 대법원에 일본 기업에 유리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전략이 추진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외교부 의견서 제출 문제와 관련해 한상호 김앤장 변호사에게 접촉해 '외교부 의견서 제출 촉구 서면'을 김앤장 명의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에 대해 협의하고 그 진행상황을 알려준 사실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하는 문제와 관련해 임 전 차장과 사건을 담당했던 주심 김용덕 대법관 사이에 협의가 이뤄졌거나, 김 대법관이 재판 절차 진행을 고의로 지연시켰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임 전 차장과 한 변호사의 접촉 및 협의가 양 전 대법원장의 방침에 따라, 구체적인 지시 내지 승인하에 이뤄졌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과 관련해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과 여러 차례 만나거나 통화하며 의견을 교류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 변호사가 양 전 대법원장을 만나 전략을 재확인하면서 서면을 제출하겠다고 얘기하자 양 전 대법원장은 "그러냐, 잘 알겠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검찰은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는 것이 양 전 대법원장의 방침 내지 결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러한 내용을 이미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한 변호사가 먼저 말한 것에 대해 소극적인 공감 내지 수긍의 표시에서 나온 대답"이라며 "대법원과 외교부 간의 의견서 제출에 관한 진행 상황을 한 변호사에게 적극 전달하는 취지의 언급이라고는 보기 어렵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과 한 변호사가 평소 '친분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들어 "사석에서 대화 소재로 오른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과 관련해 단지 사적인 친분관계에서 의례적으로 나온 공감 표시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 관련 보고서·'물의야기'도 무죄
법원행정처가 이른바 '물의야기 법관 보고서'를 작성해 특정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양 전 대법원장 취임 전부터 보고서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물의야기 보고서에 기재된 내용은 부적절한 재판 진행, 범죄 혐의 등으로, 사법행정에 비판적이거나 대법원의 입장과 배치되는 '튀는 판결'을 했다거나 사법행정에 부담을 줬다는 이유로 특정 법관을 선별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보고서는 인사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전보인사에 관해 정책 결정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며 "변칙적인 징계 수단 및 문책 수단으로 불이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파견법관을 이용한 헌법재판소의 내부 사건 정보 및 동향 수집 혐의에 대해서도 "양 전 대법원장이 작성을 지시했다거나 이 보고서가 양 전 대법원장이나 박 대법관에게 보고됐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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