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조소경, 『빼빼로데이』, 가문비어린이, 2015
"뭘 기념하는 날인지도 모르면서 돈 낭비하기 싫어. 너 365일 중에서 '데이'가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로즈데이, 다이어리데이, 빼빼로데이... 음, 그러니까 한 스무 개?"
"아니, 더 많아."
"몇 개인데?"
"50개."
"헐~."
- "빼빼로데이" p.12
50개가 넘는 어쩌구저쩌구 데이. 그리고 가족들의 생일과 제사에 친척들의 경조사까지.
나이가 들수록 두뇌의 성능은 저하되는데 챙겨야 할 날은 늘어만 가니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념일들은 "이게 다 회사의 상술이다, 상술!"을 외치며 무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블로그에 기록을 남긴 터라 나도 모르게 예전에 만들었던 빼빼로 기록들을 뒤져보며 그 당시의 심정을 떠올리곤 합니다.
말랑말랑한 연애 감정에 부풀어 올라 열심히 빼빼로를 만들었던 추억...은 없습니다, 없어요.
단지 남들 다 먹는 빼빼로, 나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장인 정신과 칙칙한 쏠로의 어두운 기운이 응축된 칙칙한 빼빼로가 가득합니다.
중2병 걸린 대학생 시절을 생각하며 냉장고를 털어보니 얼린 마쉬멜로우와 초콜릿 커버춰 한 봉지가 나옵니다.
이 정도면 갑자기 솟아오르는 '나도 빼빼로 만들고 싶어' 열병을 가라앉힐 수 있을 듯 합니다.
우선 미니 마쉬멜로우를 쇠젓가락에 끼워 하나씩 구멍을 뚫어줍니다.
구멍을 뚫은 미니 마쉬멜로우는 길다란 막대과자에 끼워줍니다. 저는 '구운감자'를 사용했는데 이외에도 참깨스틱이나 사루비아 과자 등 길쭉한 과자 종류라면 다 가능합니다.
보통 크기의 마쉬멜로우를 끼우면 길이에 비해 너무 뚱뚱해져서 빼빼로데이가 아니라 핫도그 데이에 만들법한 물건이 됩니다.
이렇게 끼워놓은 마쉬멜로우 빼빼로들을 철망 위에 얹어 토치로 한 번씩 구워줍니다.
마쉬멜로우는 굽기 전과 구운 후가 완전히 다른 과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식감이 바뀌거든요.
태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굽다보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녹을 듯이 부드러운 마쉬멜로우가 됩니다.
마쉬멜로우가 어느 정도 식으면 중탕으로 녹인 다크 초콜릿을 붓으로 발라줍니다.
빼빼로데이나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약간 PTSD가 오기도 합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엄마! 이거 드세요."
"어머나! 우리 아들이 엄마를 위해 초콜릿도 사오고. 이거 사랑 고백인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화이트데이에 아들한테 선물을 받았으니 기분 최고지! 혹시 이거, 좋아하는 여자 애한테 줬다가 거절당한 건 아니지?"
엄마는 웃으며 초콜릿을 맛있게 먹었다. 지난번에 지영이에게 초콜릿을 주었다가 거절당한 걸 엄마가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빼빼로데이" p.14
이런 걸 보면 참 배려심없는 어른들이 세상에 많다는 걸 실감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중학생 때였나, 제과점에서 파는 예쁜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을 너무나 먹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종업원이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 주는 날인데요"라며 확인을 하더군요.
"손님이 돈 내고 사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화를 낼만한 배짱도 없었고,
지금같았으면 "원래 발렌타인 데이라는게 남녀 구분 없이 서로의 사랑을 전하는 날이거든요? 근데 이게 일본 제과회사들의 상술로 인해 여자가 남자한테 고백하는 날로 바뀐 거거든요?"라고 읊었을텐데 그럴 만한 지식도 없었으니 그냥 어버버하다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또 굳이 "어머니께 드리려구요. 아버지한테 선물하시라고"라며 센스있는 아들내미 흉내를 내는 바람에 지금도 가끔 이불킥을 하는 흑역사를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프러포즈의 날을 빼빼로데이로 정했다. 무슨 데이만 되면 선물을 사는 게 돈 낭비로 여겨졌는데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 이런 날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로 정해진 건 1이라는 숫자가 빼빼로를 닮아서이다. 1과 1이 만나 11이 되듯 이슬이와 나도 마주 서야 한다. 당당하게 일대일로 만나는 거다.
문구사에 가서는 빼빼로 대여섯 통을 골랐다. 편지도 정성껏 써서 넣고 예쁘게 포장도 했다. 장미꽃 한 송이도 준비했다. 잠들기 전에 책상 위에 빼빼로와 꽃을 잘 올려놓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선물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책상 위에 있는 거 못 보셨어요?" (중략)
"포장이 너무 엉성해서 엄마가 다시 했어. 포장이 근사해야 선물이 더 빛나잖아."
- "빼빼로데이" p.28
어쩌구저쩌구 기념일에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은 하나같이 근사한 포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빼빼로가 본체인지 풍선이나 꽃, 인형이 본체인지 모를 정도지요.
삐딱하게 보면 이 역시 하루 날 잡아서 중국제 싸구려 봉제인형에 빼빼로 한 통 묶어서 서너배씩 비싸게 팔아먹는 상인들의 연금술이지만, 또 좀 다르게 보면 이런 날에만 볼 수 있는 핑크빛 감정이 현실로 구현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얇은 빼빼로도 아니고 두툼한 부피의 마쉬멜로우 빼빼로가 검은 색 일색인 건 너무 칙칙해보여서 빼빼로데이 스피릿에 맞게 금박을 한 조각씩 올려봅니다.
그런데 너무 띄엄띄엄 올라간 게 마음에 안들어 몇 조각 더 올리고, 또 올리다보니 거의 만원어치 넘는 금박을 뿌려버렸네요.
아이들은 금가루 뿌리는 걸 보며 "아빠, 이번에도 요리대회 나가요?"라고 자꾸 물어봅니다.
금가루 = 비싼 거 = 고급스러움 = 요리대회용 음식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있나 봅니다.
"화이트데이 때 네가 내 서랍에 초콜릿 넣어 놓았어?"
"넌 정말 눈치 없더라. 내가 여러 번 힌트를 줬잖아. 그 날 쪽지로 초콜릿 받았냐고, 누가 준 건지 아냐고도 물었잖아."
"그래 맞아. 그냥 물어보는 줄 알았어. 난 연애는 소질이 없나 봐."
"연애를 소질로 하니? 마음으로 하는 거야."
- "빼빼로데이" p.27
도서관에서 일하다보니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나 학생을 위한 청소년 동화같은 것도 종종 읽게 됩니다.
내 돈 주고 발렌타인 초콜릿 사먹던 어둠의 솔로 시절이었다면 이런 동화책을 읽으면서 "공부나 해, 이것들아! 연애는 대학 가서 하고!"라고 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점점 크다 보니 이렇게 염장 지르는 장면이 나와도 왠지 아빠 미소를 띄고 읽게 됩니다.
갓 만든 빼빼로를 하나씩 들고 맛있다며 우적우적 먹어대는 아이들을 보다가 초등학교 5학년인 큰딸은 이제 슬슬 남자친구 사귀는 데 관심을 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은근슬쩍 물어봅니다.
"혹시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애는 없니?"
"없어요."
"아, 그래."
"근데 나 좋아한다는 애는 있는데."
"헉, 정말?"
"별로 마음에 안들어서 차버렸어요."
헐...
그래도 자기 돈 내고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사먹는 흑역사는 안 만들 것 같으니 아빠보다는 낫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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