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 이미옥 지음, 2019. 성안당.
오이 장수가 돌층계에 물건을 나란히 얹어놓고 있었다. 아직 오이 철이 아니었으므로 오이 대신 조그마하고 딱딱한 복숭아를 팔았다.
“자, 햇복숭아요, 햇복숭아! 자, 사세요, 사. 이걸 잡수시고 겨울 독기를 빼세요!”
왕룽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만일 내 아내 될 여자가 복숭아를 좋아한다면 돌아갈 때 사줘야지.”
- 펄 벅 지음. “대지” 중에서
옛날엔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생선이건 농작물이건 제 때를 놓치면 다음 해나 되어서야 다시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환절기에 적응하느라 몸이 지친 사람들은 새로운 계절에 수확하는 산물을 먹으며 기력을 보충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보존 기술이나 재배 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먹고 싶은 것이라면 사시사철 구할 수 있고 영 키우기 힘든 작물은 외국에서 수입하기까지 합니다. 그 탓에 제철 음식이란 값이 헐해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점 외에는 그다지 특별하게 느낄 이유가 없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방에 식물이 푸릇하게 솟아나는 봄이 되면, 아무리 고기 좋아하는 사람도 왠지 모르게 채소를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특히 여기저기서 아스팔트 도로와 콘크리트 담벼락을 가리지 않고 한 줌의 흙만 있으면 비집고 나오는 민들레를 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그 가녀린 잎으로 꿋꿋하게 살아남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정원을 가꾸는 원예가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악몽이 따로 없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들레를 섣불리 잡초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이파리를 먹을 수 있는 식용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의 소설 “식탁에 찾아온 봄”에서 여주인공 새러를 엉엉 울게 만들었던, 달걀을 곁들여 프렌치 소스와 함께 제공되는 민들레 샐러드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에서 “더 이상 굴 요리를 즐길 수 없다는, 다소 천박한 방법으로만 그 무딘 가슴속에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라고 비꼬지만, 먹는 것에 진심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이상 가는 칭찬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 유학생활 내내 봄만 되면 식료품점에 등장하는 민들레 잎을 주구장창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민들레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방에 노란 민들레꽃이 피어있기는 하지만 식용으로 채집한, 꽃이 피기 전의 여린 이파리를 동네 마트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간혹 가게 주인에게 “민들레 잎은 들어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민들레를 먹어?”라는 반응이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를 읽다가 민들레 나물무침과 민들레 겉절이 요리법을 발견했을 때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했네요.
우리는 민들레가 너무 흔해서, 또 너무 없어 보인다고 해서 무시하는 선입견을 가지곤 해요. 하지만 민들레 나물무침은 이런 선입견을 확실하게 깨어줄 거예요.
- 이미옥, 김건우 지음. “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 중에서
먹음직스런 민들레 사진을 보니 그 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봤지만 대부분 민들레 추출물로 만든 건강보조식품이나 말린 민들레 뿐. 프랜차이즈 마트 여러 곳을 찾아봐도 구할 수 없기에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자재 마트에서 봄나물을 대거 진열해놓으며 민들레도 약간 들여온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파랑새를 구하느라 그 고생을 했던 틸틸과 미틸이 자기 집 새장에서 파랑새를 찾아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민들레 한 묶음을 장바구니에 담는데, 그 옆에 파랑새가 한 마리 더 보입니다. 바로 쑥입니다.

쑥은 어찌나 생명력이 강한지 사람 떠난 폐가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것도 쑥이요, 산불이 나서 새까맣게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것도 쑥입니다. 오죽하면 각종 재해로 인해 난장판이 된 곳을 쑥밭, 쑥대밭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날씨만 조금 따뜻해지면 겨우내 피폐해진 산과 들을 가장 먼저 푸른색으로 물들이는 것 역시 쑥이기에 황량함의 대명사인 동시에 봄을 알리는 전령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민들레와 마찬가지로 쑥 역시 봄철에 돋아난 여린 잎만 먹을 수 있다는 점이지요. 가게 주인도 이를 의식했는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지금 이 때를 놓치면 먹을 수 없는 민들레와 쑥을 나란히 놓아두었습니다. 둘 다 한 묶음씩 집어 들었습니다.
쑥은 간의 해독 기능을 도와주고, 빈혈과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어요.
향긋한 쑥과 하얀 쌀가루를 버무려서 쪄주기만 하면 되는 쑥버무리를 만들어서 봄의 향기를 만끽해 보세요.
- 이미옥, 김건우 지음. “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 중에서
초판이 십 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지, 당시의 유행에 맞춰 그 수많은 나물마다 각각의 약효를 자세하게도 써놓았습니다. 연포탕을 하는 식당에서는 낙지의 효능을 벽면 가득 붙여놓고, 오리고기 전문점에서는 오리를 천하제일의 만병통치약으로 광고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완전식품이니 수퍼푸드Super food니 하는 단어를 싫어하는 까닭에 별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풀어놓은 나물 산행 이야기가 더 흥미롭습니다.
산행을 시작할 때는 해가 막 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워낙 높은 산이라 새벽에 출발하지 않으면 나물을 뜯을 수가 없다고 한다. 해발 900m가 되자 정말 다양한 나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비군락을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이번에는 비비추, 풀솜대 등이 보였다. (중략) 나물은 크게 야산나물과 큰산나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큰산나물은 워낙 나물이 연하고 부드러운데다가 삶았을 때 유난히 푸르고 향기가 좋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채취하기 어렵고 귀하기 때문에 잘 팔지 않고, 가족들끼리만 먹는다고.
- 이미옥, 김건우 지음. “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 중에서

커다란 책의 한 면을 가득 채운 나물 사진, 숲 사진과 함께 글을 읽다보면 나도 산 속에 들어가 흙냄새 맡으며 나물 캐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십여 년 전, 어머니께서 자생식물 연구회 모임을 다니며 산행 나가실 때 “도시락 따로 준비할 것 없이 밥하고 된장만 약간 가져가면 끼니가 해결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떠오릅니다. 산을 슬슬 오르며 산나물을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따다가 산 정상에서 밥에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는 거지요.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절로 고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공해가 심해 길 가의 나물을 뜯어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산행을 갈만한 시간 내기도 어렵고, 혹 시간을 낸다고 해도 이제는 나물 채취 허가까지 받아야 하니 나물 한 봉지 캐려면 여러 가지 의미로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아쉬운 대로 마트에서 구입한 나물로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요.
봄나물은 계절을 먹는 것이기에 복잡한 양념도, 화려한 기교도 필요 없습니다. 잘 씻은 쑥은 물기를 살짝 털어 쌀가루와 소금, 설탕을 섞은 가루에 버무려 줍니다. 찜기 위에 하얗게 버무린 쑥을 깔고, 쌀가루를 솔솔 뿌려주고, 다시 쑥을 깔고 쌀가루 뿌려주기를 반복하면 준비 완료. 가운데에 공간을 남겨두고 쑥을 까는 것이 골고루 익히는 비결입니다. 찜기에 넣고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 쪄주면 완성입니다.
쑥버무리가 익는 동안 민들레 나물을 무치면 시간이 딱 맞습니다. 물에 소금을 넣고 끓여서 민들레를 살짝 데친 후 고추장, 국간장, 설탕, 다진마늘, 통깨,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리면 완성. 여러가지 요리법이 있지만 민들레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는 간단하게 나물로 무쳐먹는 것이 제격입니다. 민들레 나물이 완성될 즈음엔 쑥버무리 냄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갓 자란 풀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완성된 음식들을 접시에 옮겨 담으니 – 진부한 표현이지만 - 밥상 위에 봄이 온 느낌입니다. 비록 산에서 직접 캐낸 자연산 나물은 아닐지언정 그 분위기만으로도 봄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나물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며 “그거 죄다 참기름에 고추장 맛으로 먹는 거 아니냐?”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쌉싸름한 기운이 맴도는 민들레는 참기름으로 가려지지 않는 특유의 향미가 있습니다. 달고 기름진 것만 즐겨 찾던 입이 쓴 맛에 놀라면서도 잠시 후면 식욕이 돌아 다른 밥과 반찬을 연거푸 먹게 만드는 밥도둑입니다. 쑥버무리 역시 풋풋한 쑥 냄새가 밥도 아니고 떡도 아닌 묘한 질감의 쌀가루 반죽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냅니다. 나중에 두었다 간식으로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어느 새 밥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반찬 역할을 하더니 금방 바닥을 보입니다.
지금은 채식주의 열풍에 밀려 조금 뜸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이나 TV에서 “식탁에 풀떼기밖에 없네. 내가 토끼인가?”라며 반찬 투정하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고기반찬은커녕 달걀 한 개 올리기도 쉽지 않아 두부로 단백질 섭취하던 시절의 흔적입니다. 저 역시 교실에서 도시락을 열면 햄이나 소시지에 주변 친구들의 젓가락이 우우 몰리는 것을 경험하며 자란 세대이기도 합니다. 반면 나물 반찬은 마지막까지 미뤄두다가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충 씹어 알약 삼키듯 물과 함께 넘겨버리곤 했지요. 그러던 것을 지금은 깨끗이 먹어치웁니다. 제철을 맞아 봄에만 잠깐 맛볼 수 있는 희소성 때문인지, 주변에 차고 넘치는 즉석식품에 지친 몸이 원하는 음식이라서인지, 그도 아니면 급식 세대와는 공유할 수 없는 도시락 세대만의 추억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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