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너를 만든 이유는
단도 정령을 파기하고 나서 가지고 다닐 랜턴이 필요해서였어.
겸사겸사 버리기 아까운 잡다한 아이템들을 먹이기에도 유용하리라 생각했지.
타르라크에게 너를 건네받고 내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환하게 웃었던 게 기억나.
어두운 던전에서 가만히 길을 밝히던 네가 갑자기 내게 배고프다고 말했을 때는 귀찮다고 생각했어.
네가 내 곁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넌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지.
내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점점 하얀색으로 빛을 잃어갔던 것도
그 때문에 아끼던 원격 상점 이용권으로 산 아이템으로 적당히 먹이를 먹였던 것도
그제야 환하게 웃었던 것도 기억이 나.
던전을 나와 여신상에 기대고 앉아있던 내게 넌 너와 오래도록 있어주실 것인지 물었고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넌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었었지.
그때가 아마 너와 다니며 처음으로 설렜던 때가 아닌가 싶어.
그리고 내가 계속 무심한 표정으로 있자 슬프게 웃으며 무기 속으로 들어갔던 게 기억나.
그 이후로 내가 미안해하며 보석을 몇 번 줬던 걸 넌 아마 잊었겠지만..
내 딴에는 꽤 큰 지출이었어.
네가 보다 샛노랗게 빛나기 시작하자 조금 사무적인 말투로 내게 말했지.
'이제 정령 실체화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네요.'
그 딱딱한 말투, 사실 난 별로였어.
하지만 그 이후에 네가 수줍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했던 말은...
'실체화 스킬을 사용하시는 동안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가 아마 네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지 않고 말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어.
그리고 그때 대답하지 못했던 게 아직도 미안해. 수줍게 웃던 네 모습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변명을 받아들여 줬으면 해.
넌 내게 다른 많은 밀레시안과 다르게 나처럼 귀가 긴 밀레시안은 뭐가 다르냐고 물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지.
네가 내게 레인지 컴뱃 마스터리에 대해 말했던 게 기억나서였어.
사람들이 멀리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에 끌리는 것 같다고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 받을지언정 너 대신 활을 사용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서 그랬어.
내가 활을 주로 사용하는 엘프라고 했다면 네가 뭐라고 할지 무서웠어.
네가 내게 실망할 것 같았어.
대답하지 않는 내게 무안하다는 듯 웃으며 들어가서 쉬겠다고 말했던 네가 기억나.
네가 샛노랗던 시절을 벗어나 연둣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자 날 포근히 감싸주곤 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특이하게 생긴 병에 담긴 리큐르를 가져왔을 때 너의 표정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웃던 너의 모습을...
하지만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심지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큐르를 바를 때도
나와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기색 하나 없이 날 바라보고는 네가 내 귀를 만지려 했던 게 기억나.
언제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물어볼 수 없었어.
네게 그 대답을 강요할 자신이 없었어..
지금에 와서 내가 갖게 된 생각이 있어.
너를 파기할 것인지를 물어봐줬으면 해.
너 대신 내 손에 활 정령을 쥘 것인지를 물어봐줬으면 해.
내가 당당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게.
넌 아마 내게 묻지 않을 거고
그렇다 해도 난 널 파기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나는 네가 처음으로 물어봤던 질문에 대답해주고 싶어.
"그래. 나는 오래도록 너와 함께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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