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는 사람은 뭔가 해소되지 못한 답답한 걸 안고 있기 마련이다
나만 해도 연예 기획사 프로듀서라는 매력적인 직책에 낚여서 입사했지만
혼자 수십명의 아이돌을 관리하는데다 나 이외의 사무직은 두 명
사장의 부탁을 못 이겨 사실상 매니저 일도 다 내가 떠맡아서
정신없는 10대 어린이들과 철없는 20대 어른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런 성격이다 보니 오지랖도 넓은 터라 내 책상엔 아이돌의 성공을 기원하는 각종 부적들이 가득하다
다들 내 책임하에 있기에 내버려 둘 수 없는 애들이니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게...
"프로듀서님! 메구미씨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지금이라면 레슨실에 있을텐데?"
"아 고맙습니다아~!"
...토코로 메구미다
미라이가 뭔가 들고 달려가는걸 말렸어야 하나? 메구미의 레슨이 방해받는 건 아닐까
메구미만 생각하면 걱정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다
메구미가 모자라거나 이기적이거나 미움받아서 걱정되는 건 아니고
정반대로 다재다능하고 이타적이며 모두에게 사랑받기에 걱정이 됐다
"이걸... 이렇게..."
일을 마치고 레슨실에 왔더니 미라이랑 메구미가 자물쇠를 가지고 뭔가 짤깍거리고 있었다
"오 됐다! 열렸어 미라이쨩!"
"와 메구미씨 대단해요!!"
"냐하핫♪ 전에도 한 번 배워봤으니 요령만 기억하면 더 빨리...
프로듀서? 언제부터 있었어?"
집중하느라 둘 다 이쪽을 눈치채지 못 했나 보다
"방금 왔어, 메구미한테 전해줄 게 있어서
근데 뭐 하고 있던거야?"
"데헤헤~ 제 자물쇠의 열쇠를 잃어버려서 메구미씨가 열어줬어요!
이제 열쇠 안 찾아도 되겠네요!"
"후후후 맡겨달라고~"
메구미가 그런 것도 할 수 있었나... 아니 잠깐
"근데 어자피 열쇠 없는 자물쇠는 쓸 수 없는거 아니야...?"
""아""
시무룩해진 미라이를 돌려보내고 나는 메구미에게 아까부터 걱정하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메구미, 미라이가 온 지 꽤 됐는데 레슨시간 방해받은 건 아니야?"
"괜찮아~ 시간떼우려고 자율레슨 한다고 한 거니까
미라이쨩이 곤란하다는데 내버려 둘 순 없지
그리고 생각보다 금방 해치웠다고?"
"...그래"
메구미는 사무소의 든든한 해결사 역할을 해준다
연상 연하 가릴것 없이 고민도 잘 들어주고, 아까처럼 직접 해결해주기도 하고...
거절 못 하고 상냥한 메구미라서 항상 고맙지만 너무나도 걱정되는 것이 있다
메구미도 나처럼 해소하지 못하는 응어리같은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당당하고 활기찬 그녀의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프로듀서? 그래서 뭐 전하러 온 거야?"
"아 그랬지
잠깐 거기 앉아 있을래?
시간 얼마 안 걸리니까"
"상관은 없는데... 혹시 또 새로운 오컬트 치료법 해보려고?"
"이번엔 금방 끝나는걸로 준비했어"
"그때 그거 때문이면 정말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깐~
난 재밌어서 상관없지만~ 냐하핫♪"
...신경 안 쓸 수가 없잖아
정말로, 내겐 신경 안 쓸 수가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 메구미에 관한 걱정을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거절 못 하고 양보하는게 아쉽고 답답했던 적이 있는지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다들 좋은 사람뿐인... 데...'
'메구미?'
'조금... 아주 조금 답답할 때도 있을지도...'
그러고는 금새 웃으면서 잊어달라고 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며 오그라들듯이 나온 그 말을 잊을수가 없었다
항상 당당하고 활기차던 메구미였기에 더더욱
그 이후로 메구미는 그 일에 관해 말하려고 하면 항상 웃어넘길 뿐이었고
걱정에 뇌가 반쯤 마비된 나는 차선책으로 미신적인 방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점쟁이를 보러가고 부적을 사러가고 힐링 스팟을 찾아가고...
내가 쪼갤 수 있는 시간 대부분을 메구미에게 투자했고
메구미는 속셈을 다 알면서도 즐겁게 어울려 줬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업무도 밀리고 소재도 떨어져 좌절하려던 차에
인터넷에서 '고민거리를 대수롭지 않게 날려버리는 최면'이란 살짝 수상하지만 유혹적인 걸 발견했다
"이건 일종의 최면술이라던데...
기운 차리는데 도움되는 거래, 한번 해보자
퇴근 전엔 끝낼 거니까"
"프로듀서?
방법이 점점 더 수상하고 짧아지는 건 인지하고 있는거지?"
"...윽
어자피 이게 마지막이고
더 이상은 다른 방법도, 시간도 없어
다른 일도 많이 있으니까"
"그렇구나~
헤헷, 조금 아쉬울지도"
아쉽다...라
솔직히, 그런 마음이 안 드는건 아니다
메구미의 고민을 찾아내지 못 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동안 이전만큼 자주 보지 못 할 거라서 아쉬운 그런 느낌
어쩌면 나 스스로 고민을 찾아낸다는 핑계로 메구미와의 데이트를 즐겼던 걸지도...
아니 지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일정에 치여서 솔로로 지내는 세월이 길어지니까 별 이상한 상상을 다 하는 거 같다
아무튼 인터넷에서 본 대로 불을 끄고 핸드폰을 꺼냈다
"자 이 화면을 잘 봐봐..."
불을 끈 채로 메구미한테 이상한 그림이 띄워진 화면을 들이대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보이는 건 화면에 집중한 메구미의 얼굴 뿐
아까 괜히 의식해서 그런지 유독 더 예쁘게 보이는 그 얼굴을 향해서...
번쩍
"엑! 뭐야 내 눈!!"
"헉! 미안 말해주는 걸 잊었네
마지막에 카메라 플레시를 터뜨리는 거라 말해줬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정신이 팔려서..."
"으으... 잠깐 눈을 못 뜨겠어...
뭐에 정신이 팔렸단 건데!?"
"어? 아 음 그게..."
메구미가 너무 예뻐서라고 해봤자 헛소리같겠지...?
"메구미의 고민이 너무 신경쓰여서 정신이 팔렸어
미안해 잊으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메구미의 째려보는 눈과 마주치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구미의 눈에서 눈물이,
단순히 눈이 아파서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 때문에 답답한 건데..."
"응?"
"프로듀서를 좋아해도 솔직하게 말 할 수 없는게 항상 답답한 거라고!!"
"그럼 퇴근하겠습니다"
형광등이 대부분 꺼져서 어둑어둑해진 사무소에서 들려오는 쓸쓸한 재봉틀 소리를 뒤로 한 채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발걸음을 땠다
아직 남아있는 한기가 자켓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내 심장을 꾸짖는 듯 욱신거리게 했다
나랑 같은 응어리가 맺혀있을 거라고?
얼토당토않는 오지랖이었다
내 응어리는 단순히 따지지 못해서 그런 것들 뿐이었는데
메구미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에도 어른스럽게 넘어가려 했을 뿐
한 구석에 쌓아두고 시간에 쓸려가는 것이 최선이었기에 취한 선택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집착했던 걸까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 안 됐기에 조금만 생각하면서 걸어도 금방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져 던져둔 집 열쇠 위에 외투와 넥타이를 던져놓고 계속해서 멍하니 나 자신을 저주했다
내가 담당하는 아이돌이라고 나한테 전부 솔직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왜 하필 메구미한테만 집착했던 거지?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거라 멋대로 착각해서?
항상 도움만 받는거 같으니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냥 누구보다 눈이 가니까?
...젠장 아까부터 왜 자꾸 짤깍거리는 소리가...
잠깐 이 소리 어쩐지 익숙한데
철컥
끼이이이...
"...미안 프로듀서"
문이 열리고 메구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갑자기 나온 말이라...
당황해서 도망쳐 버렸어"
나의 뇌는 상황을 따라오지 못 하고 있었다
지금 뭐지? 꿈인가?
레슨실에서 뛰쳐나갔던 메구미가 왜 여기 있지?
지금 당장 차라도 내 와야 하나??
"카메라 플레시 때문에 놀랐는데...
겨우 눈을 뜨고 프로듀서 얼굴을 보니까...
어쩐지 막... 북받쳐 올라와서..."
카메라 플레시? 그거 분명 최면술 때문에...
설마??
"이제 더이상... 참고 숨기고 양보하는 건 싫어"
"잠깐 메구미 너 지금...
워워워 뭐 하고 있어!?"
겨우 나오기 시작한 내 말을 덮어버리듯
메구미가 풀어헤친 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프로듀서... 이런 걸 좋아했었지?"
수줍은 티가 남아있지만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메구미
시야를 올리니 셔츠를 풀어헤쳐서 브레지어가 보이는 가슴 앞엔 벗다 만 넥타이가 흔들거리고 있었고
시야를 내리니 양말위로 치마는 사라져있고 팬티는 왼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손의 이끌림에 따라 살짝씩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향긋한 살내음과 함께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과거에 마음속으로 했던 변명을 저주했다
바빠서 연애를 못 한다고? 이런 여자 옆에서 일하는데 그 어떤 여자가 눈에 차겠냐??
아니아니아니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일단 저걸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전등 불부터 껐다
칠흑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덮자 간신히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을 여유가 생겼다
"프로듀서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아 이런, 메구미의 목소리가 젖어들어간다
다시 울리면 안 되는데
"미안해 메구미,
전부 내 잘못이야!
지금 그러는 건 내가 건 최면술 때문에..."
"최면..?"
"메구미가 고민하는 게 마음아파서
고민을 떨치고 지금 가진 소망을 바로 행동에 옮기도록 해주는 최면을 걸었던 거였어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주변을 배려하느라 참는 소망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런 식으로 될줄은 상상도 못했어 정말이야..."
"그... 그럼... 지금 프로듀서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단 거야...?"
아 지금 하고있는게 소망의 이행이라면 그렇게 되는건가?
이런 과격한 노출로 남자를 유혹하는 건 누가 가르친 거... 난가
"나도 메구미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메구미도 참아왔던 거니까 상황이 어떤 진 알잖아?
진정하고 일단 최면부터 푼 뒤에 천천히 생각하자"
"지금 프로듀서는, 최면 떄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거야...?"
"그래, 메구미랑 나의 마음은 아마도 같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줘"
"..."
서서히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눈앞의 실루엣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메구미가 던져놓은 옷들이 보이고 그 옆에 두 팔로 몸을 가리고 있는 메구미가...
아 눈 마주쳤다
"알았어, 옷 입을테니 눈 감고 있어줘"
눈을 감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각 외의 오감이 예민해져서 메구미의 옷 입는 소리만 들어도 정식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어야 했지만
당장은 그냥 눈을 뜨고 앞에 있는 사냥감에 달려들려는 야수를 온몸으로 뜯어말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프로듀서, 이제 눈 떠"
눈을 뜨자 눈에 들어온 건 핸드폰을 들고 있는 메구미의 모습이었다
어둠 속에 작은 빛만 비춰지고 있었지만 메구미의 몸엔 실오라기 하나 없었다
옷을 입는 소리가 아니라 벗는 소리였나?
그 모든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가면서 눈은 유일한 광원인 핸드폰을 향했고
그 핸드폰엔 언젠가 봤던 익숙하면서 이상한 그림이 있었다
"내가 좀 빨리 배우는 편이라고 냐하핫♪"
번쩍
카메라 플레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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