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는 걸 꺼린다. 임신과 출산을 위해서만 산부인과에 간다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다”
뚝섬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펨테크 헬스케어 기업 모션랩스의 이우진 CEO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Femal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펨테크’의 필요성을 묻자 나온 답이다. ‘여성들이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됐던 문제다. 가령, 여성질환인 유방암의 경우엔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을 꺼리는 여성들이 있다. 유방을 꽉 눌러서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통증이 심해서 그렇다.
산부인과 이용에 대한 인식, 출처=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우진 CEO가 지적한 문제는 이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산부인과에 가는 것 자체에 우리 사회에 ‘터부(taboo, 특정집단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금하거나 꺼리는 것)'가 있다는 뜻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4년 미혼여성(성인+청소년) 2022명에게 산부인과에 대한 인식을 물은 조사에서, 성인 여성 82.5%가 ‘산부인과는 일반병원에 비해 방문하기가 꺼려진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9년 전 자료지만 이우진 CEO 설명에 따르면 이후로도 산부인과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조사 대상자들은 ‘산부인과는 비용이 많이 든다’, ‘산부인과를 이용하면 사생활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받게 된다’ 등을 산부인과를 꺼리는 이유로 꼽았다. 보고서는 “자신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보여줘야 하는 진료 과정의 거부감도 부정적 의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자궁경부암검사 등의 기본적인 여성 건강검진은 산부인과에서 가능하다. 병의 조기진단이 치료 예후에 결정적인 걸 고려하면 우리 사회의 ‘터부’가 여성을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여성의 질병은 발견되지 않는다
의료계에 따르면,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는 단순한 ‘심리적 거부감’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대표적인 문제는 의료시스템에서 ‘여성’이 과소대표된다는 것이다. 의학 전문가들은 약물 임상시험에서 여성 참여가 적어, 여성의 복용 용량과 이들이 복용 후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특정 항암제가 여성에게 더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처럼 치료 결과가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여성을 연구하지 않는 의료계 문화로 인해 의사가 여성 환자의 질병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의 저자 마야 뒤센베리는 “심장마비가 온 젊은 여성은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남성에 비해 7배나 더 높다. 여성은 여성에게 흔한 질병이더라도 병을 진단받기까지 더 오래 기다린다. 때로는 이 기간이 수년을 넘어가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기자가 되기 전 미국 국립재생산건강연구소에서 일을 했던 마야 뒤센비리는 의료계의 성 편견이 질병을 어떻게 왜곡하며 환자의 치료를 방해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의사와 연구자, 미국 여성을 인터뷰한 뒤 이 책을 집필했다.
시민건강연구소의 김새롬 연구원은 “같은 의사여도 의사의 젠더(성별)에 따라 여성의 치료 결과가 다르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로라 우앙 교수 연구팀은 1991년부터 2010년 플로리다 58만여 명의 급성심근경색 응급실 환자를 분석했다.
파란선은 여성 의사, 빨간선은 남성을 의미한다. 가로축 0은 남자환자, 1은 여성환자를 뜻함. 남성의사의 경우 여성환자의 추정 생존 확률이 낮아지는 걸 알 수 있다, 출처=논문
분석 결과, 의사와 환자의 성별이 일치할 때 급성 심근경색 환자의 사망률도 유의미하게 낮았다. 여성 의사에게 치료받은 환자는 남성 의사에게 치료받은 이들보다 사망률이 낮았고(이는 환자 성별과 무관한 결과다), 가장 사망률이 높았던 케이스는 남성 의사에게 치료받은 여성 환자였다. 이는 여성 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남성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때보다 사망 및 30일 이내에 재입원 확률이 낮다는 기존의 연구결과들과도 일치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이에 대해 "여성 의사는 더욱더 예방적인 관리를 하고, 환자와 효율적으로 소통하며, 다른 팀원들과 더욱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 의사 중 여성 비율은 25.5%다. 남성 의사가 여성 환자와 치료과정에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의료계의 성비 불균형 문제가 여성의 치료에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펨테크, 여성이라는 공백을 메운다
펨테크의 핵심은 여성을 위한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의료시스템이 있는 여성이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등의 IT기술을 활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산업이지만, 미국과 유럽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에선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생리 주기 관리 앱 클루, 출처=클루홈페이지
대표적으로 생리 주기를 관리하는 ‘클루’ 앱이 있다. 사용자가 과거 월경 정보를 입력하면 향후 월경 주기나 배란일을 제시한다. 생리 중에 겪을 수 있는 몸 상태 변화나 스트레스 및 컨디션 변화에 따른 조언도 들을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190개국에서 1100만 명 정도가 이 앱을 사용한다. 국내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앱이다.
클루앱의 제작사 바이오윙크에 따르면, 클루앱 이용자 중엔 앱을 통해 자궁외임신부터 초기 난소암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캐나다에 사는 50대 여성 수잔은 클루앱을 통해서 난소에 생긴 악성 혼합 뮬러리안 종양을 발견했다고 바이오윙크에 전했다. 생리 추적 기능으로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수잔은 초음파 검사와 MRI검사를 진행해 종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잔은 “클루 데이터를 보고 문제를 느껴 의사를 만났지만 처음엔 ‘별것 아니고 운동해서 살을 빼면 나아질 거다. 폐경은 모든 여성에게 일어나는 증상이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3달이 지난 후 클루 앱이 경고 알람을 보냈다. 수잔의 생리주기가 그 나이대 여성의 일반적인 패턴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이를 본 수잔은 다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뉴욕 비대면 진료 플랫폼 메이븐 클리닉, 출처=메이븐 클리닉 홈페이지
펨테크 최초로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스타트업)이 된 뉴욕의 메이븐 클리닉은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출산, 임신, 육아, 소아청소년과 관련된 의료 서비스 및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메이븐 클리닉의 성장은 미국의 의료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미국의 주 절반 정도가 산부인과가 하나도 없다. 여성, 유색인종, 이민자, LGBT는 기존 의료시스템에서 치료를 받기 어려웠지만, 메이븐 클리닉을 통해서 의료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에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지방 의료 인프라 부족 등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도 유사한 서비스의 효용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산부인과 비대면 진료 플랫폼 닥터벨라, 출처=닥터벨라 홈페이지
국내에선 닥터벨라가 메이븐 클리닉과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닥터벨라가 제공하는 것은 산부인과 비대면 전화 진료. 산부인과 의사는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자신의 신체 정보를 말하기 꺼린다. 닥터벨라는 이를 막기 위해 의사가 월경 주기 등의 데이터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여성들이 산부인과 진료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굴욕 의자’로 불리는 진료대이다. 다리를 벌리고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 굴욕감과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지 않은 여성이 많아 초기 진단이 어렵다는 게 의료계의 고민거리다.
닥터벨라를 운영하는 모션랩스 이우진 CEO는 “이용자 98%가 만족도를 보인다. 산부인과에 가서 굴욕의자를 쓰지 않고, 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이용자들이 편안함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엔 여성 건강 연구가 정말로 적다”면서 건강 데이터를 모아 여성건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물론, 비대면 서비스는 대면 진료처럼 정밀한 진단이 어렵다. 치료를 위해서 대면 진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다만, 생리주기를 추적하고 비대면 진료를 받으면서 이상 증상을 발견하면 여성들이 병원에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전망이 나온다.
닥터벨라는 최근 여성을 위한 심리상담 서비스도 시작했다.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우울, 긴장, 불안, 난임과 임신출산에 대한 고민, 생리전증후군(PMS) 등의 문제도 상담받을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여성의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남성보다 각각 2.1배, 1.6배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21년 상반기 우울증 분석 자료를 보면, 모든 연령대 중 25~29세 여성환자가 가장 많았다. 해당 조사에선 매번 60대 전후의 중년 및 노령 여성환자가 가장 많았는데 처음으로 젊은 여성이 최다 환자 수를 기록한 것. 의료 전문가들은 20대 여성들의 우울증 증가세가 가파르다고 말한다.
이들은 어떠한 이유로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낄까? 생리로 인한 고통, 여성을 향한 사회적 통념과 차별, 남성과의 임금격차, 여성 범죄 등 다양한 원인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코로나19 이후 20대 여성 4명 중 1명이 퇴직을 경험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여성들의 불안과 우울을 다루려면 전문적인 상담기법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성 전문 상담소가 적어 관련 상담을 받기가 어렵다. 닥터벨라는 전화로 가족상담, 부부상담, 성폭력상담 등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전문가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신상을 드러내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익명으로 진행된다.
여성 성 지식 플랫폼 자기만의 방, 출처=아루
펨테크 기업 ‘아루’는 음지화된 성 관련 사실을 공유할 수 있는 여성 성 지식 플랫폼 ‘자기만의 방’을 개발했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만 가입할 수 있도록 제한이 걸려 있어 부담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이외에도 아루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전문적인 콘텐츠를 유료 구독으로 제공하고 있다. 성과 관련된 지식을 잘 모르는 여성이 많기 때문에 시작한 서비스라고 한다. 여성의 성과 관련된 사실은 터부시됐고, 여성들은 이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펨테크 업계 관계자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전한다.
정보를 찾으려고 포털에 검색해도 음란물이나 성인용품 광고만 떠서 정확한 정보를 찾기도 어렵다. 콘돔 같은 경우엔 포털 사이트에서 미성년자는 검색도 제한된다. 청소년의 성관계 연령을 낮아지는데 미성년자가 콘돔을 접하지 못하고, 피임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루는 성과 관련된 전문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한 것.
모션랩스 이우진 CEO는 “‘여성을 위한 서비스’인 척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다. 진정한 펨테크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심층적인 사용자 인터뷰를 꾸준히 진행해 여성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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