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칸코레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칸코레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오늘자 이강인 르아브르전 경기 장면 모음...gif 메호대전종결2
- 스피노 최신근황ㅋㅋ 팔악검이계신장
- 십분지옥 manhwa 김밍자
- 싱글벙글 일본 전 총리의 기행 ㅇㅇ
- 한국여자들을 망쳐놓은것...jpg 관심종자
- 블라) 난임지원금 더 달라는 여자들 관심종자
- 정희원 교수가 저속노화에 발벗고 나선이유 떡훈
- 다구리도 통하지 않는 사람...jpg ㅇㅇ
-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나"…의사·의대생 대규모 집회 ㅇㅇ
- 여황제 만화 24화 Ssuo.
-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다는 제도 ㅇㅇ
- 아이유가 언젠가부터 연기할 때도 이름을 아이유로 통일한 이유 ㅇㅇ
- 싱글벙글 러시아를 떠나는 인재들 ㅇㅇ
- 싱글벙글 꺼라위키 시간도둑 문서들.....jpg printer
- 협상때 일본이 트럼프에게 선물한것 ㅇㅇ
이재명 “장애로 인한 차별 없는 대한민국 만들 것”
https://naver.me/5oEWYwGZ [속보] 이재명 “장애로 인한 차별 없는 대한민국 만들 것”이재명 “장애로 인한 차별 없는 대한민국 만들 것”naver.me ?????? https://youtube.com/shorts/gizOy5euINI?si=XRev8Z5h1JXEaNW- 이재명 장애인 민원인들 무시하고 직원 갈구는 영상인성youtube.com - dc official App- 장애인의날 이재명 페북.facebook- 장애인의날 이재명 페북.facebook
작성자 : RESETKOREA고정닉
스압스압 조선이 해방되자...쫓겨난 일본인들....JPG
https://youtu.be/Cza090_MV_g'히키아게샤'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서 살거나, 아예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을 뜻함 대충 직역하자면 '물에 빠져서 건져낸 사람'이라는 뜻해방되니까 강제로 본국에 돌아가게 됨...1946년 쫓겨나는 모습을 담은 뉴스"코리안 클리어-아웃" ㄷㄷㄷ나가기 전에 소독약 좀 쳐준다 기다리는 애엄마...다들 짐이 별로 없음..보따리 몇개 싸들고 바리바리 튀는중...애기들도 보인다...얘들은 왜 지들이 '고향' 떠나는지도 모름..배타고 튀는 중...이런 일본인들이 한국에만 약 70만명이 있었다고 함...1945년 당시 3%의 인구로 조선 재산의 83%를 먹고 있었다고 ㄷㄷ 물론 좋은 시절 다 끝나니까 조선인한테 린치당하고 재산 다 뺏김....ㅠㅠ특히 일본과 가까웠던 경상도에서 보복이 심했다고 함...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인끼리 도시 중심지에서 번화가를 이루고,조선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변두리로 쫓아내버렸는데 하루아침에 쫓겨나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고 함...하지만 나중에 진실을 알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고...이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살던 '히키아게샤'들은 해방 당시 조선인의 반응에 어마어마한 공포와 당혹감을 느꼈다고 함... 그 이유는..."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즉, .3.1 운동을 겪어보지 않은 1920년대 이후 일본인들, 그리고 아예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조선인들과 부대끼며 살지도 않았고, 정말 한반도를 일본 본토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임..."....여기 일본 아니었습니까?"“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나는 왜 내가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 했다.- 나카무라 기미 (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1945년 8월 16일...독립만세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1945년 9월 5일....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 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미래가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1945년 가을...8월 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 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 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1945년 겨울...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조선을 떠나며> 결국 당시 히키아게샤들은 조선에 조선인이 그렇게 많이 사는줄도 몰랐고조선이 정말 자기 고향이라고 생각했으며왜 독립을 좋아하는지, 왜 린치를 당하는지도 몰랐던 것...그나마 남쪽에 살던 히키아게샤들은 빨리 도망이라도 쳤지북한 신의주에 살던 사람들은 소련군이 앞마당에 몰려올때까지도 몰랐음...고위관료, 군인들만 미리 튀어서 조선인인척 하고 살았다고 함...이는 お星さまのレール(1993)라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짐..남한과 다르게 소련군 + 현지주민들의 린치로 수천명이 뒤졌다고 함..어쨌든 대부분의 히키아게샤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재산을 전부 놔두고 왔기 때문에 본토에서 밥버러지 취급 받음... 식민지에서 개꿀빨다가 거지꼴 됐다 + 조센 출신이라며 비웃음 받음... 본토도 전쟁으로 씹창난 마당에이 새끼들까지 먹여 살려줄 판이 되니 당연히 눈총을 받았고조선에서 살다보니 일본어, 일본문화에 서투른 면도 있어서 상당수가 하층민이 됨..그래서 임시수용소를 건설해서 모조리 처박아놨더니 다들 흑화해서 절도, 강도, 강간등등 각종 범죄와 위생문제로 인해 '히키아게샤'는 일본사회의 골칫덩이가 됨...ㅠㅠ 특히 모리사키 가즈에라는 일본 할머니는17살까지 경주와 대구를 오가며 살았으나해방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자신을 키워준 조선인 유모와 경주의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실향민'이라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함...고향인데도 역사적 문제로 감히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고... 게다가 남동생은 일본에 적응 못 해서 결국 극단적 선택...ㅠㅠ반면 조선어에 능통하거나, 일본에 연고나 가족이 없던 사람들은그냥 조선에 눌러붙기도 했다고 함...제일 유명한 예시는 '부용회'...조선남자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여성들의 모임이다 과부의 몸으로 일본에 귀국했으나, 도저히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수는 4000~5000명이였다고 함 지금은 대부분 90대라 경주시에서 돌보고 있다고 함... '마산 고등학교'의 일화도 있다...동창회를 열었는데 히키아게샤 일본인 할배들이 돌아와서한국 할배들과 서로 알아보고 눈물 흘렸다고 함..이 사람들은 조선인끼리도 친했나봄..특히 '후지이'라는 사람은 1950년도까지 춘천에 살다가6,.25때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참전하다 거제포로수용소에 감금...일본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어를 한국인보다도 못해서 안 믿어줌... 어찌저찌 풀려나서 부산역으로 갔으나, 이번엔 국군에 끌려가서 1년간 참전함...결국 개고생만 하다 56년도에 일본인임을 인증하고 가족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감...ㅠㅠ "일본 열도에 인양되어 온 나는 거기에서 이방인이었다.방언을 모르고, 살아야 할 집도 경작해야 할 땅도 없는 우리들은 일본에 고립되어 있었다."히키아게샤의 자식"이라 불리며 조소의 대상이 될 때마다 나는 한반도를 생각했다.그러나 거기는 거부당한 땅이었다." - 이츠키 히로유키, 서울/평양 출신 "내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그러나 나는 15년 동안 조선에 일본인으로서 있었다. 식민자로서 거기에 있었다.나는 아이였다고 해보아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아마 나는 조선인들에게 무해하였을 것이다, 라는 주장 역시 아무런 변명이 되지 않는다.역사란 이를테면 이와 같은 것으로, 내가 아이였으며 무해했을지언정,나 한 사람만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역사란 이렇게 냉혹한 것이요, 그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일본인은 이 역사를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짊어나가야만 한다."- 고바야시 마사루, 대구/안동 출신 내선일체고 뭐고 결국 다 지랄이였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창씨개명 당시.....개드립 모음.....JPG
다들 알다시피 창씨개명은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갈아치우는 정책이였다 이때 인생걸고 개드립을 친 조선인들을 알아보자'이누쿠소 쿠라에' (犬糞食衛, 견분식위)문인 김문집이 바꾼 이름"개똥이나 처먹어라"라는 의미이며 퇴짜맞고 옥살이를 했다 '이누코 쿠마소' (犬子熊孫, 견자웅손)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다는 의미다 역시 퇴짜를 맞았다.'전농병하' (田農炳夏)'전병하(田炳夏)'라는 이름을 가진 한 농부는자신의 이름에 농(農)을 붙여서 신고하였다.이를 일본어로 읽으면 덴노헤이카(天皇陛下)....덕분에 경찰서로 끌려갔다.'미치노미야 히로히토' (迪宮裕仁, 미친놈이야 히로히토)한 고등학생이 이걸로 개명하겠다고 우기다가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 (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천황 왕족을 모조리 몰살하자는 단어에, 일본 이름에 자주 붙는 郞(로)를 붙인 것이다즉, 일본 왕족을 다 죽이는 남자라는 뜻...ㄷㄷ조선총독부로 이걸로 개명해도 괜찮냐는 편지를 보내 어그로를 끌었다고 한다 '쇼와 보타로' (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쇼와 천황 망해라"라는 단어에, 장남에게 붙이는 太郞(타로)를 붙였다. 또 조선총독부에 괜찮냐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미나미 타로' (南太郞)조선총독부 제 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에게서 본딴 이름이다 次郞(지로)는 둘째에게 붙이는 이름인데, '내가 양반보다 형이다'라는 의미로 太郎(타로)를 붙였다고 한다 물론 퇴짜 맞았다'구로다 규이치' (玄田牛一)일제시대 유명한 조선인 만담가 '신불출'이 지은 이름이다畜生을 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 畜生(칙쇼)가 된다 역시 퇴짜 맞았다.이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개그소재로 언급된다 '강원야원' (江原野原)'구로다 규이치'가 퇴짜 맞은 후에 신불출이 지은 2번째 이름이다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고 한국 추임새인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든 것이며이는 "에이 될대로 돼라"는 자포자기의 뜻이였다참고로 조선이름인 불출(不出)자체도 "일본세상이였으면 태어나지 말걸 그랬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가나다' (加那多)시인 이영철이 지은 이름이며일부러 한국어의 '가나다' 어순을 내포하여 지었다고 한다'도요토미' (豊臣)'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정황상 가문의 조상이 임진왜란 시절 왜군에게 맞서 싸운 장수였던 것으로 보인다.일본은 이를 금지하진 않았으나, '도쿠가와' 만큼은 못 쓰게 했다 '마을 이름 통일'한 마을 전체가 짜고 주민 전원이 같은 성 + 이름으로 통일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이러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세금 징수나 행정 절차상 귀찮은 일이 많아지므로 일부러 의도한 것이다.하지만 일본 현지에서도 현재까지 시골 집성촌들이 수두룩한지라총독부가 딱히 뭐라 하지는 못했다 '이누노코 스즈토' (犬之子錫斗, 개자식석두)부산 동래부에 거주하던 50대 남성의 이름이며"조선에서는 성을 팔아먹으면 개새끼다"라는 말을 적어 신고서를 냈다경찰은 '히야마'(檜山)로 바꾸라고 했으나 계속 개기다가 조선총독부 모욕혐의로 징역 6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고고고고' (高高高高)'4번이나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며,창씨개명 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낸 이름이였다 '엄이섭야' (嚴珥燮也)경상남도 양산군의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은자신의 엄이섭이란 이름 끝에 야(也)자만 붙여서 '엄이섭야'로 개명했는데이는 일본어로 "엄이섭이다"라는 뜻이였고, 모든 가족의 성이 '엄이'로 변하게 되었다 '청산백수' (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짓기 귀찮아서 대충 지은 이름이다 '산천초목' (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마찬가지로 대충 지은 이름이다.'잇쇼겐메이 하야시겐메이' (一生懸命 林憲命)'림헌명'(林憲命)이라는 조선인이 지은 이름이다림헌명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하야시 겐메이'가 되는데,여기에 "열심히 일한다"는 일본어인 '잇쇼겐메이'가 발음이 비슷해 성으로 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동창에 의하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카나우미 친포'김진표(金鎭杓)라는 조선학생이 지은 이름이다'친포'는 일본어로 꼬추를 뜻하는 속어였다... 당시 담임이였던 요코다니 선생은 "센징 이름은 왜 이렇냐"며 한탄했다고 한다 '텐노 헤이카' (田農丙下)한자만 보면 평범한데발음이 '천황 폐하'랑 똑같았다....당연히 퇴짜 맞았다'와카마츠 히토' (若松仁)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이름이지만일본 황가인 와카마츠노미야(若松宮)와천황 이름에 흔히 붙는 글자인 히토(仁)를 합쳤다교묘하게 왕족의 이름을 쓴 것...창씨개명 한정으로 히로히토가 동네북이 됐다...당시 조선인들은 성씨, 가문, 족보를 굉장히 귀중히 여겼으나어쩔수 없이 80%는 창씨개명을 했으며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어를 쓰면서 살았다고 한다... 짤은 1983년 이산가족 상봉 방송....출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 ㅇㅇ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