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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측, 임신 폭로 협박에 3억 전달
- 관련게시물 : 손흥민 입장문- 관련게시물 : 손흥민, '임신 협박' 공갈범에게 금품 건넸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7/0001886466?sid=102&from=naver [단독] 손흥민 측, 임신 폭로 협박에 3억 전달…경찰, 자료 조작 여부 수사 국가대표 축구대표팀 주장 손흥민 선수에게 아이를 임신했다며 외부에 알리지 않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 일당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 MBN이 단독으로 전해 드렸죠. 취재결과 손 선수 측은 임신했다고 주장한 20대 n.news.naver.com사실상 저 여자와의 뭔 관계가 있었던건 거의 기정사실인듯 - [단독]손흥민, 초음파 사진 받고 3억 입금했다- 속보) 손흥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https://youtu.be/qJIl6PTL_yQ이새끼 진짜 자기 애일까봐 쫄려서 실제로 3억 보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흥민 이강인 뉴스란에 나란히 ㅋㅋㅋㅋㅋㅋㅋㅈㄴ 웃었네 ㅅㅂ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독] 손흥민 ‘임신 협박’ 여성과 교제 돌연 협박손흥민 부활 다행이네서울 강남경찰서는 20대 여성 A씨를 공갈 혐의로, 40대 남성 B씨를 공갈 미수 혐의로 14일 체포한 뒤 두 사람의 자택을 압수 수색했다.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손흥민은 A씨와 교제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갑자기 A씨가 작년 6월 ‘임신했다’며 태아 초음파 사진을 손흥민 측에 보낸 뒤 수차례에 걸쳐 3억원 이상의 금품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A씨가 주장하는 임신 시점이 손흥민 측 진술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가 제시한 자료의 진위를 검토 중이다. A씨는 당시 3억원가량을 받은 뒤 “외부에 밝히지 않겠다”는 취지의 각서도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그런데 A씨와 연인 관계에 있었던 40대 B씨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지난 3월 손씨 측에 “언론에 ‘임신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또다시 7000만원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흥민의 매니저는 3개월간 B씨 협박에 시달린 끝에 손흥민에게 이 같은 사실을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손흥민은 “더 이상 허위 사실에 고통받지 말고 강력 대응하자”고 했다. 이에 소속사는 고소 절차를 진행했다.손흥민 측은 B씨에게 또다시 돈을 지급하지는 않았다. B씨는 동종 범죄 전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2일 경찰은 이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신청했고 이들을 전날 서울·지방에서 각각 검거했다.
작성자 : 반디공주님사랑해요고정닉
B-747: 펜암, TWA, 하워드 휴즈, 그리고 오웬 브루스터
[시리즈] 민항기 · B-747: 전설의 시작 · Never Forget, Never Forgive: KAL 858 · 해병대원의 비행기 긴빠이 대작전: TWA 85 · LA에서 로마까지: TWA 85편의 기나긴 여행 · 인질은 죽이면 그만: 이집트 대테러부대 잔혹사 · 코멧: 혜성같이 사라진 제트 여객기 · 님로드 AEW: 천하제일 병신대회 팬 아메리칸 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 흔히들 줄여서 '펜암' 이라고 부르는 옛날 항공사다. 1991년에 망해버린 뒤에는 옷가게로 변해버렸지만, 과거의 펜암은 현재의 맥도날드와 애플에 필적하는, 미국의 상징이자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다. 지구 어디에서든 소위 '클리퍼'로 호출되었던 하얗고 푸른 도장의 펜암기들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멋들어진 근무복을 입은 조종사와 스튜어디스들은 50~60년대생 어린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펜암의 시작은 미 공군의 아버지, 헨리 아놀드와 칼 스파츠가 당시 미국~콜롬비아간의 우편물 운송을 담당하던 독일계 기업인 SCADTA(現 아비앙카 항공)를 견제하기 위해 1927년에 에어-펜암이란 이름의 유령회사를 설립한게 그 시초였다. 왜 유령회사였냐고?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그렇듯이 항공사 간판을 내걸고 창업했는데 항공기가 없었다. 이들에게 항공기를 내어준 인물은 훗날 펜암의 사장이 되는 후안 트리페라는 인물로써, 당시에는 펜암이 아니라 Aviation Corporation of the Americas (미주항공공사, ACA)라는 항공사의 CEO였다. ACA는 비행기도 없이 쿠바~미국간 우편 수송업체 입찰에 참가한 펜암과 컨소시엄을 체결하여 중형 수상기 1대를 임차해줬고, ACA의 지원 덕분에 사업에서 주계약자로 선정된 펜암은 1927년 10월부터 하바나로 항하는 항공편을 운항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펜암-ACA 컨소시엄에 밀려 사업에서 탈락한 Atlantic, Gulf and Caribbean Airways(AGCA)가 1928년 6월 23일자로 펜암에 합병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사실상 3개 회사의 인수합병으로 탄생한 펜암은 미국의 국영 항공사로써 기능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들은 중남미의 항공사들을 대거 합병(물리)했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독점적인 우편 수송권을 따냈다. 여담으로 펜암이 벌인 혐성짓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중남미에 본사를 두고있는 대형 항공사들은 펜암에 의해 창업된 경우가 많다. 여튼, 펜암은 미국 정부의 지원 하에 중남미 항공산업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고 여기서 나온 돈으로 현대 항공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선을 세계 최초로 개설한데 이어 세계일주 항공편을 승객들에게 제공하는가 하면, 100% 화물 전용으로 운항하는 노선을 신설했고 팬암 아카데미를 통해 파일럿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펜암은 떠오르는 미국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항공사였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되자 이들의 미래는 딱히 밝아보이지 않았다. 1세계 선진국들의 민간 항공수요가 폭증하면서 TWA나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항공같은 신생 항공사들이 펜암이 진출할 수 없었던 미국 국내선 수요를 사이좋게 나눠가졌고, 미국 밖에서는 BOAC와 에어프랑스, KLM이나 루프트한자 등의 쟁쟁한 경쟁사들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이다.설상가상으로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펜암은 4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항공공사(CNAC)와 100여대에 달하는 여객기를 빼앗김과 동시에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서 쫒겨났다. 근데....펜암을 제외한 다른 항공사들을 다 없애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거 아닐까? 말도 안되는 소리같지만, 1950년대 미국에서는 가능했다. 오웬 브루스터(Owen Brewster, 1888~1961) 메인주 하원의원인 윌리엄 브루스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워싱턴과 링컨의 뺨싸다구를 50번씩 후려치고도 남을만큼 엄청난 가문의 적장자였다. 근데 이새끼가 펜암이나 B-747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사실 B-747과 오웬 브루스터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번편 자체가 펜암의 역사를 설명하려다 분량조절 실패로 인해 만들어진 정보글이라 관심없는 군붕이들은 다음편부터 보면 된다. 여튼, 그의 직계 조상은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로 영국이 청교도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자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던 35명의 청교도들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분이 그냥 단순한 청교도 엑스트라 1이 아니라 당시 영국 청교도 신자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으며, 존 스미스(John Smyth)와 함께 세계 최초의 침례교회를 암스테르담에 건립했고, 미국 이주를 처음 주장한 인물이란 것이다. 케임브리지대 신학교에서 학위를 수여받은 이후 네덜란드에서 교회 목사와 학원 선생으로 투잡을 뛰면서 당시 영국 국왕인 제임스 6세에게 패드립을 시전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었던 그는1644년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플리머스 식민지에 상륙한 초기 개척자들의 원로이자 유일한 대졸자로써 식민지의 종교 지도자로 활동했다. 유명한 그의 후손들로는 앞서 설명한 오웬 브루스터 말고도 2차대전기 미 해군제독이었던 윌리엄 F. 홀시 주니어 록펠러 가문의 후손들 2011년 6월 24일자 KBS 아침마당 출연자 리처드 기어 피그스만 침공을 주도했다가 캐네디에게 쳐맞고 쫒겨난 미 중앙정보국 제 5대 국장, 엘런 덜레스 등이 있다.아무튼, 이렇게 개쩌는 집안에서 태어난 오웬 브루스터는 미국 최고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AC, 학부중심대학)인 보든 칼리지를 1909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1910년까지 1년간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활동했다.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로 진학해 1913년에 졸업, 1916년에 28세의 나이로 메인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메인주 상원의원과 주지사, 전국 주지사협회 의장을 거쳐 1941년에 다시 메인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다. 머리숱 빼고 거의 모든것을 가진 엘리트중 엘리트였던 그는 뼛속까지 공화당원이었고,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1941년, 당시에는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군납비리를 족치려고 만든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통칭 '트루먼 위원회'의 일원으로 합류한 브루스터는1947년부터 트루먼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전후 미군의 군납비리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가장 미국적이었던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되시겠다 1905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하버드 출신 변호사인 하워드 R.휴즈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의 집안도 브루스터 못지않게 탄탄했다.그의 조상은 워싱턴에게 세례를 줬던 목사였으며,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도 그의 친척이었다. 휴즈의 아버지는 2025년 기준 시가총액 400억 달러(56조)의 석유 대기업인 베이커-휴즈의 전신, 휴즈 툴 컴퍼니의 창립자였다. 집안 전체에 공돌이 DNA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즈는 어려서부터 공학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12살에는 자기 스스로 오토바이를 만들었고, 14살이 되자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500년에 한번씩 나오는 천재였던 그의 아들이 하버드나 스탠포드에 수석으로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공부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1921년, 14살의 나이로 고지능자들을 위한 학교인 페센든 기숙학교에 진학한 휴즈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졸업...을 하지는 않았고 거기서 골프를 열심히 쳤다. 단순히 열심히만 쳤던게 아니라 한때 프로골퍼를 생각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는데, 15살짜리 급식이 쳤다하면 핸디캡 2가 나왔다. 참고로 일반인들은 핸디캡 15도 힘들다. 아무튼 열심히 골프를 치다가 기부입학으로 텍사스의 라이스 대학교에 입학한 휴즈는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회사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채로 라이스 대학교 설립자의 딸을 꼬셔서 결혼한 뒤 영화 제작자가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할리우드로 향했지만 처음 시작은 순탄치 못했다.LA에서도 영화는 안만들고 매일같이 골프를 쳤던 휴즈는 골프장 식당에서 영화감독인 랄프 그래이브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계획중인 코미디 영화에 4만 달러, 현재가치로 10억을 투자해달라고 휴즈에게 부탁했는데 영화의 독특한 줄거리에 흥미를 느꼈던 휴즈는 그래이브스와 함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8만달러를 허공에 날렸다. 휴즈의 삼촌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루퍼트 휴즈는 그가 제작한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좆같은 영화야. 줄거리도 없고, 전개도 없고, 캐릭터성도 없어. 연기도 엉망진창이야. 그 영화는 그냥 불태워버려. 영화가 상영된다면, 너랑 그 호모새끼는 할리우드 최고의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래이브스는 동성애자였고, 휴즈랑 야스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그는 8만달러짜리 영화 필름을 통째로 폐기했다. 휴즈의 첫 작품은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실패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 작품을 제작한다. 휴즈의 다음 작품은 1926~1927년에 공개된 Everybody's Acting과 Two Arabian Knights로, 둘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특히 1927년작 Two Arabian Knights는 영화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코미디 영화중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이후에도 휴즈가 제작한 영화들은 예술적/상업적 가치를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아 아카데미 시상식에 3번이나 노미네이트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그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아보라면 1머전 당시 영국 왕립비행단 소속 조종사들에 관한 영화인 1930년작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로써, 촬영에만 3년이 걸렸고 제작비로 280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현재 280만 달러는 40억원 정도의 금액으로 영화 한편을 제작하기엔 약간 빠듯한 액수지만 1930년의 280만 달러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당시 포드의 최신 고급차였던 모델 A 풀옵션이 1,200달러, 금 시세가 28.3g(1온스)당 20달러 수준이었으니 280만 달러로는 고급차 2,333대나 약 14만 온스, 4톤에 달하는 24K짜리 금괴를 구매할 수 있었다.영화의 클라이막스인 공중전 장면을 촬영하는데 복엽기 140대와 조종사 200명이 동원되었으며, 이중 3명의 조종사가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사망했다. 휴즈 자신도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다 크게 다친건 덤.. 영화 자체는 25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여 당대 제작된 영화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제작비가 워낙 막대했던 탓에 이걸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카데미 최우수 촬영상에 노미네이트되긴 했다고 이후에도 휴즈는 '스카페이스'같은 히트작들을 줄줄이 뽑아내며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야스파티를 즐기다 극대노한 그의 부인에게 이혼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영화 제작자 하워드 휴즈의 인생은 1948년에 할리우드 5대 영화 배급사중 하나였던 RKO 그룹을 880만 달러에 인수하며 절정에 달한다. 월트 디즈니 그룹이 제작하는 영화를 독점적으로 배급할 권리를 가졌던 RKO는 절대 망할수가 없는 회사로 유명했는데, 휴즈는 이 알짜배기 회사를 10년동안 운영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사로 만들지..는 않았고 회사 자체를 공중분해시켜버렸다. 일단 그룹의 고위 임원진들과 스태프들이 휴즈의 깐깐한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고, 회사의 중간관리자들은 휴즈에 의해 무더기로 해고되었다. 인수한지 1달이 안되서 직원의 75%가 사라졌을 정도니 뭐... 휴즈가 자기 입맛에 안맞는 영화들을 모조리 취소시킨 덕분에 회사는 반년간 개점휴업 상태로 운영되었으며, 1년에 500만 달러가 넘는 순수익을 기록하던 회사는 수입의 90%가 삭제되며 파산 위기에 놓였다. 이후 RKO는 휴즈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모든 자회사가 제너럴 타이어(現 Continental AG)에 합병, 단 11년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후 그는 죽을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수많은 장난감들 중 하나였을 뿐, 그가 진심으로 애정했던 물건은 따로 있었으니... 분량조절 실패로 다음편에 계속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라오스 워티 뉴트와 함께한 4년 후기(장문 / 데이터 주의)
'19~'23 - '2019년도 개인 입양을 시작으로 2023년까지 사육했던 라오스 뉴트 (laotriton laoensis) 4마리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기록이다.라오스 워티뉴트는 중대형종의 뉴트로 그 사이즈는 완성체의 펫테일 게코와 맞먹는 사이즈이다. 장수 도롱뇽, 와와어 같은 초대형 유미류를 제외하면 개인 사육이 가능한 뉴트들 중 가장 대형의 뉴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색감 또한 검은색 바탕에 등면에는 노란색 배면에는 붉은색 포인트 컬러가 있고 수컷 기준으로 꼬리에는 청백색의 혼인색이 있는, 무려 4가지 색감을 가진 무척 화려한 뉴트이다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뉴트로서 탈도 많았던... 그런 종이었다.한마디로 키우기 어려웠단 이야기.... 정확하게는 어렵게 키웠다는 게 맞겠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해보도록 하겠다.먼저 이야기 나눌만한 큰 이슈만 나열해 보자면0. 난해한 일관성(내 잘못)1. 성격과 환경2. 온도3. 먹이4. 결말정도가 되겠다.0. 난해한 일관성(내 잘못)보통 어떤 동물들을 키우다 보면 같은 종을 키우는 다른 사육자들과 의견이 일치하는, 검증되고 일관된 정보를 얻기 마련이다.그러나 라오스 뉴트만큼은 개체의 성격차가 큰 탓인지, 혹은 사육환경에 따른 변화가 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일관성 있고 유의미한 의견을 남기기가 참 어려운 종이었다.차이니즈 워티 뉴트, 금박이, 히말라야 뉴트, 우파루파, 스페니쉬 등등 함께 키우고 있는 뉴트들은 WC로 들여왔더라도 장기 사육을 통해 일관된 행동 패턴을 관찰하고 대처하기 쉬웠다. 반면 라오스는 계절에 따른 행동 변화가 유난히 심했고 끝까지 고생을시켰다.가장 큰 이유는 WC개체, 사육 경험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WC 개체더라도 장기 사육을 통해 야생성이 깨지는 순간 사육이 상당히 안정되며 단조로워지기 마련이지만... 나는 이 야생성을 깨뜨리는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후술할 내용들을 보면 쉽게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1. 성격과 환경보통 뉴트들은 물잡이가 되지 않은 환경에서 수생 사육할 경우 무한 탈피, 피부 녹음, 거식, 육생 시도 등 트러블이 발생한다. 라오스는 완수생하는 종류로 수질 이슈에 타격이 크기 때문에 물잡이가 필수였다. 처음 사육을 시작했을 때는 이와 같은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집안이 과거 수족관을 운영했음에도 열대어 사육보다는 거북이와 같은 수질 영향이 적은 일반 파충류 사육 정도로 접근했던 것이다.2주 물잡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항에서 라오스는 당연하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초조한 마음에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구조물들을 투입하고 관찰하는 2주 동안 물이 잡혔고 라오스는 입을 열고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육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의 눈에는 물이 잡혀서 먹이를 먹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은신처 등 복잡한 구조물을 많이 넣어주었기 때문에 먹이를 먹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그렇게 완성된 사육 환경은 이와 같다.그렇다. 야생성을 깨뜨리고 핀셋 피딩을 비롯한 이것저것 적극적인 시도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이다.당시 내게 있어 '라오스의 먹성 = 야생 환경과의 유사성' 이었다.그 야생성의 정도를 묘사해 보자면...사람이 없을 때만 나와 돌아다녔고 1미터 이내로 사람 그림자라도 보이면 온 바닥재를 뒤집으며 파다닥 숨어 들어갈 정도였다.사람 얼굴만 보이면 밥 달라고 수면으로 올라오는 다른 집 라오스 뉴트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특성이었다.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3년이나 사육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당시 국내 개체 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기존 사육 방식에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에는 상당히 위축된 상황이었다.사이테스 서류의 영향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고한강유역 환경청이 라오스를 paramesotriton으로 다루느냐 laotriton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추가 수입이 아주 어려워질 수도 있던 아주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서류를 제출하여 laotriton으로 증명서를 교부 받았지만이 녀석들이 만약 잘못되면, 두 번째 기회는 영영 없겠구나 싶었던 것이다.위와 같은 환경에서 동족 간 성격은 상당히 온화했다. 먹이를 먹다 실수로 동족의 발까지 깨무는 금박이나, 실수인 척 일부러 물어 뜯는 차워티랑은 달리 4년간 실수로라도 깨무는 걸 본 적이 없다.단독 행동보다는 무리 행동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특이점으로 등의 노란 발색은 환경이나 컨디션, 기분에 따라 그 색이 무척 밝아지기도 탁해지기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뉴트들에게서는 관찰하기 어려운 발색의 변화가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2. 온도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22~23도에서 먹이 반응은 가장 좋았고 등의 노란 발색 또한 레몬옐로우에 가까울 정도로 밝아졌다.23도 보다 낮거나 높을경우 즉시 반응하지 않고 몇 주간 천천히 먹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높은 수온을 23도로 맞췄을 경우에도 먹성이 즉시 돌아오는 모습보다 천천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다.이 때문에 한국 기온 3월~6월까지, 10월부터 12월 까지는 먹성이 대단했고 한여름과 겨울은 버티기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해당 기간 동안 불었던 살은 한여름과 겨울에 많이 빠졌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한여름의 수온은 냉각 장치를 통해 28도 이하로 유지한 온도이며 겨울의 수온은 10도 이상이다. 3. 먹이중대형 뉴트인 만큼 냉짱만으로는 그 체중을 유지하기 어려웠다.가장 좋은 선택은 '사료' 였을 것이다. 그러나 야생성을 깨뜨리지 못한 아주 소극적인 사육환경에서 사료 적응, 핀셋 피딩 모두 실패했다.먹이는 귀뚜라미, 냉짱을 기본으로 생이 새우와 네온테트라 등 생먹이를 급여하였고 어쩐 일인지 토막 미꾸라지와 말지렁이는 먹지 않았다. 이건 아직도 왜 그랬지는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먹이였던 걸까?분명한 사실을 중대형 뉴트인 만큼 영양소 불균형에 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라오스 사육이 끝마쳐진 원인도 영양소 불균형으로 보고 있다.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최근 보이는 안정적인 cb 개체들과 사료 적응에 성공한 사육자 분들의 이야기 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 또 라오스 사육을 시도하게 된다면 꼭 사료 적응이 된 CB개체를 데려오리라.4. 결말웹툰 일이 시작되며 동물에 대한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정작 나 본인은 작업 일정에 치여 많은 부분에서 개체들에게 소홀했다.그 시기에 얻은 것도 많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았는데 그중 가장 큰 게 바로 라오스 이지 싶다.지금 되돌아보면 영양소 불균형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4년간 쌓여온 무엇인가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불치의 병, 아주 치명적인 기생충. 그런 게 원인 이어야만 했다.그런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동물 병원도 가보고 기생충 약도 먹여보고,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동원해도 도저히 막을 수 가 없었다.죽음은 2년간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증상은 다음과 같다.안구 백탁과잉행동먹성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서서히 마름(4개월 정도)입과 코에 흘러내리는 점액경련적으로 몸을 떨거나 긁음등의 발색이 얼룩덜룩 일부분만 밝아지거나 어두워짐그때의 무력감은 잊을 수가 없다.그렇다면 이쯤에서누군가 내게 라오스 사육을 남에게 추천하겠는냐 묻는다면...과거의 나는 절대 만류하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추천해볼것 같다.그이유는먼저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고인물 분들의 장기 사육 데이터가 충분히 있고 다수의 인공증식 개체들, 즉 CB가 존재하는 상황이다.이들은 사료도 잘 먹고 아무것도 없는 탱크항에서도 잘 지내며 금박이 들처럼 25 ~ 28도 이하에서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다고 한다.애초에 나부터도 충분히 준비가 되면 다시 한번 도전해 볼 것이다.수생 뉴트의 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라오스 사육의 결말을 이런 식으로 매듭지을 수는 없다. 그 친구들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며 배우고 얻은 경험으로 결국에는 2세대, 3세대를 만들어가고 싶다.마치며두 시간 반을 달려경상북도 의성군의 작은 시골마을 양지바른 곳,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 귀농하신 부모님의 가지 밭 한쪽 구석에 다다르면나의 소중한 친구들, 라오스 워티에게 인사를 건네보곤 한다.다른 뉴트들보다도 라오스를 사육하며 얻은 지식이 압도적으로 많다.누구보다 어려운 사육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뉴트 사육의 선생님이 되어준 친구들인 것이다.블로글 글 복붙이라 유미갤 감성이 아닐 수 도 있으나 일단 들고 와봄. 음슴체로 다시 적기엔 너무 장문이었다...애증의 라오스 워티 뉴트지만 워티가 워티인 이유는 거즌 얘네들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키워본 뉴트 중 가장 매력적인 친구들이었음.라오스 할거면 요즘이 최적이 아닐까 싶다.
작성자 : 워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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