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택은 기원에서 과일 바구니를 선물 받고 무성은 그것을 집집마다 나눠 주고자 한다.
아빠, 제가 배달 할게요.
그럴래? 내가 선우네 집 갈 테니까 네가 정환이랑 수연이 집만 가면 돼. 아, 그리고 도룡뇽 집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최사범님 힘드실까봐 제가 직접 왔습니다.
너 어떻게 알고 왔냐?
택아, 하느님은 공평하시단다. 너에게는 바둑을 잘 둘 수 있는 재능을 주셨지만 내게는 정환이 아빠 차, 보라누나 차, 기원에서 널 데려다 주는 차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엄청난 청력을 주셨지.
동룡에게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엄청난 청력을 주었다는 설정은 제법 흥미롭게 보인다. 동룡은 쌍문동 5인방의 고민을 들어주는 조언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포함한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작진은 극 안에서 이런 동룡의 설정들을 그동안 꾸준히 보여줌으로써 동룡이 쌍문동 5인방의 일에 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동룡의 쉴새 없이 이어지는 말에 무성은 과일 봉지를 건네 주며 서둘러 돌려보내려 하고, 집을 나서던 동룡은 택에게 얘기한다.
택아, 이번 주말에 정환이 생일 알지?
어, 알아. 가.
동룡이 돌아간 후 택은 정환과 수연의 집에 과일을 전해주기 위해 봉지를 가져 가려다 바나나를 발견한다.
바나나...
이거 진주 줄건데? 진주가 바나나 좋아해.
아... 저 이거 하나만 주시면 안되요?
왜 안되겠냐? 네가 갖고 온건데.
정환의 집으로 먼저 배달온 택. 그런 택에게 성균은 덕선과 자주 나누는 인사법을 택에게도 시도하지만 택은 반듯하게 인사를 한다. 그런 택에게 성균은 인사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미란은 그런 성균을 저지한다.
정환아, 택이 왔다!
택아, 밥 먹고 가.
어, 왔어?
어. 아니에요. 저 덕선이네 집에 가봐야 해서.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생일날 보자.
너 시간 돼?
응. 돼. 간다.
택이 왔다는 소리에 방 안에서 금세 나오던 정환은 덕선의 집으로 가야 한다는 택의 말에 미묘하게 표정이 굳어간다. 그런 정환에게 택은 생일에 보자고 말한 후 정환의 집을 나선다.
친구가 좋긴 좋구나. 잘 시간도 없을텐데 너희들 생일 꼭 챙기는 거 보면.
택이 가는 뒷모습을 보던 미란의 말에 정환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덕선의 집앞에 멈춰선 택은 덕선의 이름을 부른다.
덕선아. 덕선아!
수연이야 이 멍충아!
수연아! 잠깐만.
아, 그냥 들어오면 되지. 추워, 얼른 들어와.
13회에서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택은 덕선을 '수연'이라고 부르지 않고, 본명으로 불렀다. 하지만 덕선은 그에 대해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매번 택이 덕선의 본명을 부를 때마다 수연이라고 정정하던 덕선이지만 대회를 앞둔 택의 심경을 알기에 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회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택에게 덕선은 예전처럼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덕선의 방으로 들어온 택. 덕선은 과일 봉지에서 바나나를 찾고 기뻐한다.
웬열?
웬열?
오, 발음 많이 좋아졌는데?
자신을 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뜨는 덕선을 보며 택 역시 환하게 웃으며 덕선의 행동을 따라한다.
야, 너 맨발? 으이그 인간아.
덕선은 택의 발을 이불로 감싸주고. 택은 다른 가족들의 행방을 묻는다.
야, 성보라 공부 못해서 죽은 귀신 붙었나봐. 웬열 캡 열심이야.
보라누나 전생에 너였나보다.
죽을라고. 좋은 것만 배워, 좋은 것만.
덕선은 자신에게 농담을 건네는 택에게 화를 내면서도 바나나의 반을 택에게 건넨다.
먹을래?
아니야. 너 먹어.
응. 너 어제도 못 잤지?
티 나?
캡 티 나. 수면제 안 먹었어?
네가 먹지 말라고 그래서 안 먹었어.
잘했어. 두통약은?
한 알만.
잘했어. 잘했어, 우리 희동이.
자신을 칭찬하는 덕선을 보며 웃는 택. 그때 노을이 방으로 들어오고 택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노을은 택에게 사인 10장을 부탁하고, 택은 그 요청을 들어준다. 덕선은 노을에게 택이 먹지 않겠다고 한 바나나를 건네며 열심히 바나나를 먹던 노을의 입가를 만져준다. 노을의 입가를 만지는 덕선의 모습은 기원 앞 포장마차에서 정환이 택의 입가를 닦아주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노을의 얼굴을 만지는 덕선의 손길은 당연하게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택의 표정은 미묘해진다.
한편, 선우네 집에 온 무성의 무릎에 앉아 바나나를 열심히 먹는 진주. 그런 진주를 귀여운 듯 보던 선영은 무성에게 곧 목욕탕 일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하며 진주를 부탁하고, 무성은 알겠다고 말하며 선영이 일하는 것을 선우가 알고 있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선우는 점점 자신보다는 무성에게 의지하는 듯한 선영과 무성을 잘 따르는 진주를 보면서 마음 한 켠이 쓸쓸해진다. 그런 선우에게 보라는 무성이 왜 싫은지 생각해보라고 얘기하지만 선우는 단지 기분이 좋지 않을 뿐 무성이 싫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한다. 하지만 선우가 무성과 선영, 그리고 진주를 볼 때마다 선우는 자신의 방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그런 선우의 행동은 아주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그려지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선우는 종종 이렇게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청하는 이들에게도 역시 선우의 아픔이 담담하게, 하지만 깊은 시각으로 다가온다.
*
드디어 찾아온 정환의 생일. 덕선은 설레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자신의 모습을 꾸민다.
누나, 형들이 빨리 오래. 생일파티 시작한다고.
노을아, 누나 어떻게 꾸밀 때가 제일 구려? 솔직하게 얘기해봐. 그럼 그것 빼고 다 할게.
꾸민다고 꾸몄을 때가 제일 구려.
자신의 말을 듣고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덕선을 본 노을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지만 덕선은 노을에게 또 한 번 발길질을 시전하며 말한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ㄷ신이지! 죽을려고. 노을에게 화를 낸 후 택의 방으로 가려던 덕선에게 노을이 묻는다.
정환이 형 선물은! 선물 샀다며!
벌써 줬지, 벌써.
그리고 정환의 방에는 덕선이 선물한 핑크색 셔츠가 포장되어 있다. 정환에게 선물을 주러 온 정봉은 그 셔츠를 발견하고, 정환은 황급히 셔츠를 자신의 서랍 속에 넣는다. 하지만 여전히 반쯤은 열려진 서랍 속 셔츠를 보며 정봉은 눈을 반짝인다.
한편, 택의 방에 모인 쌍문동 5인방. 정환은 친구들이 준비한 선물인 축구공을 만지작 거린다.
야, 그래도 생일선물인데 뭐라도 싸서 주지.
야, 그걸 어떻게 포장하냐? 우리도 그거 산다고 고생했어.
그래, 우리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너 준다고 돈도 없는데 한 푼 한 푼 모아가지고.
일회용 젓가락을 떼지 못하는 택에게서 젓가락을 가져와 떼어주는 덕선.
각자 오뎅 하나씩 사 먹고 택이 돈으로 샀으.
그래, 고맙다.
아니야. 얘들도 보탰어.
자신의 돈으로 정환의 선물을 마련했지만 택은 아이들도 함께 준비했다고 말하며 어른스럽고 세심한 배려를 보인다.
그런 택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 칭찬하던 동룡은 이내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하는 택의 아이 같은 모습에 또 한 번 타박을 하고, 덕선은 그런 택에게 포크를 건넨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정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탑건을 보기로 한 아이들. 하지만 동룡과 정환은 이미 두 번씩 본 영화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정환은 덕선이 요청한 대로 또 한 번 영화를 봐도 된다고 허락한다. 오랜만에 명쾌하게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고, 요청을 들어주는 정환에게 덕선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수연아,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야밤에 이렇게 건전한 거 안 본다.
왜, 같이 봐! 같이 보면 어때. 난 괜찮아.
우리가 안 괜찮아.
같이 보자는 덕선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택의 얼굴은 해맑았다. 하지만 동룡에 대한 반응과는 달리 무의식 상태에서 발현된 또래 남자로서의 택을 대면한 덕선의 표정은 싸늘하다.
야, 최희동! 너도 이런 거 좋아하는 애였냐?
아니! 안 좋아하는데.
정색하는 덕선의 모습을 본 택은 금세 의식적인 택으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미 덕선은 택의 모습에 조금은 실망한 상태로 애꿎은 동룡을 대신 때린다. 한참을 덕선에게 맞던 동룡은 반격을 시도한다.
네가 택이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니!
뭐가 있긴.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뭐가 있어.
덕선은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던 택에게서 상상하지 못한 이성으로서의 택을 대면하고 당황해하고 있었고, 그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동룡을 때리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대상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낯설음. 그리고 약간의 섭섭함. 택의 아버지인 무성이 택의 방 문을 열고 난 후에야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덕선의 행동은 멈췄다.
택아, 아빠 내일 가는 호텔 이름 좀 적어 놓으려고. 명함 좀.
네.
택은 그동안 언제나 오픈 되어 있던 자신의 방에서 유일하게 잠그던 서랍 속 수첩을 꺼내 무성에게 명함을 건넨다. 그리고 13회에서 잠겨 있던 서랍에는 여전히 자물쇠가 달려 있지만 그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아빠, 여기요. 저 이제 출발해야 되죠?
응. 늦었어.
너 이 시간에 가게?
택이 내일 부산에서 오전 9시 대국.
야, 그럼 아까 낮에 가지.
괜찮아. 가면서 자면 돼. 나 씻는다.
경기가 있기 전에는 덕선 조차도 '건드리면 톡하고 죽어버릴 것만 같다'고 표현할 만큼 예민한 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환의 생일을 함께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렇듯 자신을 생각하는 택의 마음이 전해져 정환의 마음은 조금 더 무거워졌고, 그 때 정환이 우연히 발견한 것은 택이 유일하게 감춰둔 서랍 속 수첩 사이에 있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시간 속 택과 덕선의 모습이었다. 정환은 덕선에 대한 택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조용히 택의 서랍을 닫는다.
그동안 정환이 택으로 인해 덕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뭇대는 모습은 이따금 그려졌다. 하지만 정환이 택에게 가진 마음의 크기만큼 택 역시 정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듯 덕선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정환과 택 역시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이며, 쌍문동 5인방 뿐만 아니라 열여덟과 열아홉, 소년기를 건너고 있는 시기에서 우정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덕선에 대한 택의 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환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금은 답답하고 마음이 아플 지언정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다만, 정환이 지금의 이 상태로는 누구도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세계로부터 나와 덕선에게 마음을 표하는 순간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
하지만 덕선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을 뿐 정환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생일파티를 마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정환이 서랍에서 덕선이 선물한 셔츠를 꺼내어 보다가 그것을 발견한 정봉이 셔츠를 자신에게 줄 수 없는지 묻자 정환은 단호하게 말한다.
안돼. 이 옷은 안돼.
정환이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정봉의 부탁에도 정환은 이 옷은 안된다고 분명하게 거절한다. 그만큼 덕선이 준 선물이, 그리고 덕선이 정환에게는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편 보라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선우는 잠든 진주를 안고 온 무성을 보게 된다. 그동안 무성이 잠든 진주를 데려왔을 때는 언제나 선영에게 진주를 전해줬지만 이제 무성은 잠든 진주, 그리고 선영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만큼 가까워진 이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고 착잡해진 선우는 보라에게 술 한 잔만 달라고 부탁하고, 보라는 선우의 마음을 알아채고 소주를 건넨다.
찾았어? 아저씨 싫은 이유 찾았냐고.
아저씨 안 싫다니까.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진짜에요. 아저씨 안 싫어요.
선우는 다시 한 번 무성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한 채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보라에게 말한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라고. 어느날 갑자기 자신과 가족의 곁을 떠난 아버지처럼 보라 역시 그렇지는 않을까 알 수 없는 불안이 번져오는 선우.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 갖는 불안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마음 아프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택이 나타난다.
누가 또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택의 등장으로 또 다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세 사람. 예전처럼 선우에게 택을 처리하라고 말하며 집에 들어가려던 보라는 이내 택을 불러 세운다.
야, 최희동!
네.
믿는다.
그리고 보라가 들어간 후 서로를 향해 웃으며 무언의 눈빛으로 대화하는 선우와 택.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에게는 서로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유기성이 존재한다. 전화로 택의 방에서 잔다고 말하는 선우에게 선영은 택이 두통약을 몇 개 먹었는지 묻는다. 선영도 그렇지만 덕선을 제외한 다른 남자 아이들도 택이 평소에 두통약과 함께 수면제를 먹는 것은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친구들이 택의 방에서 잘 때마다 택은 곤히 잠든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므로 택이 바둑을 두며 밤새는 일이 잦은 것은 알고 있지만 잠들 수가 없어서 약에 의존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덕선은 택에게 두통약보다 수면제 얘기를 먼저 꺼냈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이처럼 그 파장이 다르게 닿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의미로 3년 전 아버지를 잃은 선우와 그보다 오래 전 어머니를 잃은 택은 서로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이고, 따뜻하다. 이 새끼 몸에 난로를 넣어 놓았나 왜 이렇게 따뜻하냐.
하지 마. 진짜 왜 이래. 선우야, 하지마.
따뜻해.
몸에 열이 많아서 추위를 잘 느끼지 못하는 택. 선우는 택의 온기에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간 녹인다. 하지만 이런 선우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택의 아버지인 무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선우는 조금씩 무성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함을 인식하고 있지만 택은 지금까지 보여진 바로는 무성과 선영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정말 서로의 아픔을 가장 잘 아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렇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택과 선우가 겪을 상처가 두려워진다. 만약 선영과 무성의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가족이 된다면 이 작품 속 모토인 '끝사랑은 가족입니다.'라는 말에는 부합하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주겠지만 채워지지 않는 아픔을 설득력 있게 그려주기를 바란다.
선우야, 보라 누나랑은 잘 돼가?
응. 좋아. 근데 택아.
응?
넌 왜 덕선이야? 너 좋다는 사람들 많은데 왜 덕선이냐? 이유가 뭔데? 왜 좋은데?
그냥 좋아. 같이 있으면 그냥 좋아.
없으면...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야, 이 새끼 완전 미쳤구만. 정신 차려, 최택! 너, 약 먹어야겠다. 너 요즘 약 조금 먹더라. 약 먹어, 약.
같이 먹자.
택은 선우에게 덕선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연못처럼 고요하게 흐르던 택의 삶은 바둑과 덕선, 두개의 세계로 나뉘게 된다. 바둑을 둘 때 택은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진중하다.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피로감과 압박에 짓눌린다. 그런 택을 위로하는 것은 햇살처럼 밝은 덕선이다. 덕선이 있어서 택은 웃게 되었고, 표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로부터 조금씩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렇듯 택에게 덕선은 하나의 세계를 의미하며, 그 세계를 잃는다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택이 가진 마음은 절실하다.
한편 선영이 잠시 빨래를 널고 있는 사이 계단에 앉아있던 진주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그로 인해 선우의 가족들과 무성은 병원으로 향하게 되고, 자신이 걱정되어 병원 앞으로 찾아온 보라에게 선우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언젠가 보라가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인해 이별을 겪게 되었을 때 울던 계단에서.
무슨 일 있니?
누나. 이제 알 것 같아요.
뭘?
아저씨가 싫은 이유요. 아저씨가 왜 싫은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아빠한테 미안해...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
이미 선우는 아버지의 유물인 목걸이를 보라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선우가 보라를 마음에 담기 시작한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날처럼, 보라는 아무 말 없이 선우를 끌어안아 주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우의 눈물로 자신의 옷이 적셔지는 것과 상관없이 보라는 자신의 온기를 선우에게 나눠 주었다.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선우는 다시 한 번 아버지와 대화한다.
아빠, 오늘 진주 다쳤어요.
응.
엄마 많이 놀랐는데 저한테는 괜찮다고 그러셨거든요? 그런데 택이 아빠한테는 무서웠다고 우셨어요. 엄마는 저보다
아저씨가 더 편한 가봐요.
너 걱정할까봐 그런거지. 아빠는 다 이해 되는데.
아빠... 안 서운해?
아빠는 하나도 안 서운해 선우야.
선우야, 아빠는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엄마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아빠는 이제 그것도 해줄 수가 없어.
선우야, 아빠는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거면 돼.
아빠...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진 속 아버지를 보며 말하는 선우. 이제는 무성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함을,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함을 받아들이는 듯한 선우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한편, 선우와 보라가 있었던 계단에 홀로 앉아있던 덕선은 동룡과 만나게 된다.
도사님,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보거라.
왜 아무도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겁니까?
어, 택이다!
왜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지 묻는 덕선에게 동룡은 농담처럼 택의 이름을 말한다. 이미 택의 마음을 알고 있는 동룡이 덕선에게 넌지시 힌트를 준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택은 없었다. 동룡이 자신에게 농담을 건넨 것으로 생각한 덕선은 동룡에게 자신은 진지하다고 말하자 동룡 역시 '알아, 나도 진지해.'라고 대답한다.
14회에서 덕선은 새학기를 맞아 짝이 된 전교회장이 간질을 앓고 있는 것을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듣고, 그녀가 아플 때 성심성의껏 돕는다. 그리고 전교회장의 어머니가 말한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정말 그렇다. 덕선은 누가 봐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런 덕선은 정작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덕선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3회에서 정환과 함께 이문세 콘서트를 보고 온 덕선은 중학교 때 자신을 좋아했던 남학생을 만난다. 중학교 때 유명했을만큼 자신을 좋아하며 편지도, 연락도 자주 했던 아이였지만 정작 덕선은 그때를 가볍게 웃으며 얘기한다. 덕선의 마음에는 그 아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덕선은 자신의 부모님으로부터 세 남매 중 가장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둘째였고 선우, 그리고 정환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덕선이 말하는 '아무도' 앞에는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여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덕선이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인가봐.
너 물고구마가 좋아, 밤고구마가 좋아?
물고구마.
이문세가 좋아, 박남정이 좋아?
이문세.
내가 좋아, 택이가 좋아?
택이.
아씨, 짜증나. 난 싫어?
음...그래도 택이가 더 좋아.
그렇다면 정팔이가 좋아, 선우가 좋아?
그런 걸 왜 물어보고 그래.
그런 덕선에게 동룡은 몇 가지 질문을 건넨다. 동룡의 질문에 매번 명쾌하게 대답하던 덕선은 정환과 선우 중 누가 좋냐는 동룡의 질문에 머뭇대며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동룡에게 괜히 투덜댄다. 그런 덕선을 보는 동룡의 얼굴에는 미묘한 웃음이 번진다.
덕선아. 넌 어떠냐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거 말고 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아니, 고구마 취향은 그렇게 분명한 애가 좋아하는 사람 취향 같은 건 없냐?
덕선아, 아니 수연아. 남이 널 좋아하는 거 말고 네가 누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야. 그렇지?
요즘 애들은 근의 공식만 알지 인생을 몰라요. 그런데 너는 근의 공식도 모르고, 인생도 모르고. 아는 게 뭐야?
그렇다. 덕선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꼈던 정환의 마음은 어느새 덕선이 느끼기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유보되었고(사실 정환의 마음은 여전히, 점점 더 깊이 덕선을 향하고 있지만), 가끔씩 느껴지는 택의 낯선 모습에도 불구하고 덕선은 자신을 향한 택의 마음 역시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자각까지도 필요한 상태다. 하지만 이제 동룡의 질문으로 인해 덕선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게 되었다. 동룡의 말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아픈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덕선은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일어나, 얼른.
어디 가게?
피자 왔어.
동룡의 손가락을 따라 덕선의 시선이 옮겨간 곳에 택이 있었다. 대회가 늦게 끝나서 같이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각자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피자를 5판이나 사 온 택. 그런 택의 배려에 동룡은 택에게 농담을 건넨다.
택아, 우리 결혼하자.
됐어.
너 얼른 들어가, 얘 자야 돼.
동룡이 집으로 들아간 후 돌아서는 덕선을 붙잡는 택.
잠깐 있다 가.
택의 책상 위에는 여러 통의 팬레터가 있었고, 덕선은 그 편지들을 보며 택에게 묻는다. 답장은 하는지. 그리고 고개를 젓는 택에게 말한다.
넌 좋겠다. 바둑 말고 딴 데는 아무 관심 없어서.
덕선의 말에 점점 묘하게 굳어가는 택의 얼굴.
넌 누구 좋아해본 적도 없지? 바둑 말고는 다 관심 없잖아.
아닌데.
아니긴. 거짓말 하지 마. 이게 누구 앞에서 뻥이야.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어.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뭐 있냐?
그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절실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보여왔다고 믿었던 상대가 정작 자신의 마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서운함, 그리고 허탈함. 택은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말하는 덕선의 오만 앞에서 오히려 냉정해진다.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고백할 건데, 곧.
택의 얘기에 의아한 듯 미묘해지는 덕선의 얼굴. 이 장면에서의 연출은 정말 좋았다. 자신의 앞에 덕선이 앉은 후부터 덕선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카메라는 조금씩 일렁인다. 마치 택의 시선으로 덕선을 보는 것처럼. 그 잔잔한 일렁임은 택의 시선 뿐만 아니라 택의 마음까지 담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다는, 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택의 마음을. 그리고 택은 덕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어느새 덕선의 시각에서 택을 바라보던 시청자에게 전하는 택의 말은 허를 찌른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이 사실은 그 사람이 가진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최택이란 인물이 지닌 연못의 깊이는 훨씬 깊을 것 같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보여지는 정환의 방. 잠시 옷걸이 쪽에 눈길을 주던 정환은 택이 가져다 준 피자를 보며 한숨 짓다가 결국 침대 위에 눕는다. 그런 정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옷걸이에 걸린 셔츠였다.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덕선이 선물한 셔츠는 어느새 정환의 방 옷걸이에 걸려져 있다. 이 방에 들어오는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이미 말한 것처럼 13회와 14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반전'이다. 그리고 그 반전을 이루는 장소는 '방'으로 그려진다.
선우는 어머니와 보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우의 아픔은 선우의 방에서 아버지와 만나는 선우의 모습을 통해 그려졌다. 또한 덕선과 동룡은 쌍문동 동네 속 '방'으로 여겨지는 계단에서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 진행될 그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질문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정환과 택은 모두 자신의 방 안에서도 은밀한 공간인 서랍 속에 덕선에 대한 마음을 넣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환은 자신의 서랍을 열고, 덕선이 선물한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택은 자신의 방에서 앉아있는 덕선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곧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누군가 14회를 보며 데미안을 떠올렸다는 글을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데미안 속 구절을 떠올렸었다. 반전을 이루는 요소가 '방'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 역시 동일한 의미에서였다. 14회에서 방은 곧 이들의 알, 곧 자신의 세계를 말한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거대한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은 세계이고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
데미안 속 구절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점차 소년과 소녀가 되고, 소년과 소녀는 곧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평온하던 자신의 세계가 부서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 평온한 일상과 그에 얽힌 관계의 균열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매일 조금씩 자란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져서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표현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평온하고 견고한 세계를 부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지켜보며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그 아름답고 절실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그 과정 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 역시 그들과 함께 치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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