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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괴 교육청... "유희왕은 도박이다" 선언 ㅅㅂ ㅋㅋㅋ
하루가 멀다하고 경북괴담을 양산 중인 경북괴이번엔 경북괴 교육청에서 괴담을 생성한다는데는 바로 도박 때려잡기대체 이게 왜 경북괴담이 된 걸까?일단 여기까진 정상이다ㅇㅅㅇ...?만화책 속 놀이하는 유희왕이 왜 도박?경북괴가 여기서 멈추면 섭하다슈퍼마리오는 물론 이젠 아무도 안 하는보글보글마저 도박이라 주장하신다경북괴의 시간은 1980년대에서 멈췄나?심지어 포켓몬과 피파 축구 게임도 도박이다경북괴가 괜히 경북괴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역시 대석열의 나라 경북괴는 차원이 다르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시마시마고정닉
위닝 티켓 2주기 추모 여행기(스압)
25년 2월 18일 위닝 티켓의 2주기를 맞아 2월 17일~19일까지 2박 3일 추모 여행을 다녀왔어 여행 목표는 세 가지 1. 위닝 티켓이 생전에 지내던 우라카와유슌빌리지 아에루 방문 2. 기일에 위닝 티켓의 비석이 있는 사쿠라마이마공원(오마이호스파크) 방문 3. 시즈나이에 있는 위닝 티켓 동상 방문 청주공항에서 신치토세공항까지 2시간정도 소요돼서 인천에서 가는 거 보다 약간 빠르더라 공항에서 렌터카 회사 버스타고 자동차 렌트하러 갔어 3일간 신세진 자동차 거리는 140키로정도라서 한시간 반이면 가겠네 싶지만 도로의 대부분이 왕복2차로라서 앞에 화물차나 정속주행하는 자동차가 있으면 추월이 불가능한데다가 시내를 통과하는 길이라서 실제로 2시간 30분정도 소요됐어 그래도 도로는 깨끗해서 운전에 큰 불편은 없었고 우측에는 섬 하나 없이 쭉 펼쳐진 예쁜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여유로운 기분으로 운전할 수 있어 그렇게 도착한 위닝 티켓이 머물던 마방과 방목지 이제 위닝 티켓은 없지만 현재 4마리의 G1마가 공로마로써 지내고 있어 말딸화는 나카야마 페스타만이 되어 있지만 오우켄부르스리가 정글 포켓산구로 말장판에서 포케 따라다니는 세 명 중에 하나로 추정되는 말이야 여행 목표의 첫 번째로 아에루에 방문하기로 한 이유는 2년 전에 티켓을 만나러 갔을 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위닝 티켓 담당 구무원님이 약 12년동안 재직하시다가 3월에 퇴직하셔서 퇴직 전에 꼭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고 첫 날에 휴무일이라 안계셔서 다음 날 오전에 만날 수 있었어 안녕하세요 오오타상이시죠? 했더니 어! 한국에서? 하고 알아봐주시더라 2년 전에 뵌 후 가끔 트위터에서 소통했던걸 기억해주셔서 같이 사진도 찍고 위닝 티켓 사진집에 사인도 받으면서 덕분에 건강했던 티켓을 만날 수 있었다고 감사 인사도 드렸더니 고마워하시면서 위닝 티켓 굿즈도 몇 개 챙겨주셨다 방목지 쪽에 있는 안내소에 팬들이 놓고간 굿즈들이 있는 위닝 티켓 굿즈 존이 있는데 나도 마이크로블럭 하나 놓고 옴 갤에서 통판으로 구입하고 조립한거라 일본에 있는 유일한 잉잉이 블럭이 아닐까 1박에 2.9만엔(석식, 조식 포함)인 위닝 티켓 컨셉 룸 위닝 티켓 텀블러, 수건, 캔 뱃지 등 호텔에서 자체 제작한 굿즈를 받을 수 있어 호텔은 1층 식당 2층 프런트 및 호스갤러리 3층은 대욕장이 있고 갤러리에는 아에루에서 지냈던 역대 공로마들의 사진들이나 관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다른 후기들에서도 사진들 볼 수 있으니 생략할게 대욕장은 한국 대중 목욕탕 느낌인데 그리 규모가 크진 않았고 호텔에 묵지 않아도 현지인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계셨고 호텔에 묵으면 무료라서 방에서 안씻고 저기서 씻으니 좋더라 석식은 코스요리로 나오는데 바닷가에 있는 마을답게 게나 회처럼 해산물이 주로 나오고 하나하나 많지 않아보여도 먹다보니 매우 배부르게 먹었어 조식은 조식다운 구성으로 밥과 국은 먹고 싶은 만큼 가능하고 프런트 옆에 말 관련 상품이나 선물용 과자같은 걸 판매하는데 2년 전에 방문했을 때 이것 저것 많이 사와서 처음 보는 캔 뱃지랑 타올, 그리고 편자만 구매했어 호텔 체크 아웃하고 나와보니 한밤 중에 눈이 내려서 주차장에 차가 이렇게 됐다.. 눈이 뭐 발목 넘어서까지 쌓일 높이까지 왔더라 그래서 도로 걱정을 했는데 겨울 홋카이도는 제설이 생활인지 도로만큼은 이미 깔끔하게 제설된 상태라서 놀랐어 제설 덕에 두 번째 목적지인 아에루에서 약 60키로정도 서쪽 시즈나이의 사쿠라마이마공원(오마이호스파크)로 출발 아에루에서 구무원님이 시즈나이 쪽은 눈이 안왔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 말대로 시즈나이는 밤 사이에 눈이 오진 않았던 듯 공원에 방문하기 전에 검색을 좀 해봤는데 공원에 추모용 꽃이나 당근같은 걸 놓고 가면 벌레가 꼬이거나 쓰레기가 되니 자제해달라는 글을 봐서 인형만 들고 가서 인사하고 왔어 작년 1주기에 오지 못해서 늘 아쉬웠는데 이번에 방문하니 뭔가 오랜 과제를 마친 느낌이 들더라 눈이 많이 오면 비석에 눈이 쌓여서 누구 비석인지 찾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티켓 비석은 양지에 있어서 괜찮았어 근처에 있던 위닝 티켓 동생의 비석에는 눈이 좀 쌓여서 비석 내용을 가리고 있길래 손으로 슥슥 치워주고 한 시간정도 공원 구경하다가 약 10분 거리의 숙소로 이동했어 이 날의 숙소는 시즈나이 이클립스 호텔 위대한 경주마인 이클립스의 이름을 딴 경마 테마의 호텔이고 1박 7만 6천원에 조식만 포함되어 있었는데 호텔 9층의 식당에서 석식도 해결할 수 있어 호텔 로비에는 항상 경마 경주가 틀어져 있었고 명마들의 사진들을 걸어서 장식해뒀더라 이 호텔에서 머문 이유는 여기서 약 2분 거리에 아주 작은 공원이 있는데 이 곳에 위닝 티켓의 동상이 있어서야 밤에는 설치된 조명에 의해 샤이닝 위닝 티켓이 돼 이 동상을 본 거로 이번 여행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어 낮부터 저녁까지 시즈나이는 조용한 동네였어 간식거리 좀 사볼까 싶어서 들어간 고구마 튀김 가게에서 사장님께 여쭤보니 시즈나이는 인구 2만명의 도시인데 젊은이들은 삿포로로 떠나고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고 하셨고 거리는 항상 한산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내가 이번에 여행한 우라카와도 시즈나이도 관광지가 아니어서 외국인이 이용하기 좋은 교통편이나 관광 인프라도 없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대하고 갈만한 여행지는 아니지만 공로마 목장에 가보거나 말딸 원본마의 자취를 찾는 여행이라면 유명한 관광지에서 남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 여행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여행이 되어서 기쁘고 말딸과 위닝 티켓 덕에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워 후기는 여기까지 할게. 사진도 잘 못찍고 글도 조잡하지만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작성자 : WinningTicket고정닉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2. 정보적 상황(1)
[시리즈] Dark Moon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책 소개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1. 프롤로그 Dark Moon : Eight Army Special Operation in the Korean War다크 문 : 한국전쟁기 미 8군 특수작전Ed Evanhoe 저1. 정보적 상황 - 1945년에서 1951년 초까지2차세계대전 직후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은 전략 사무국(OSS)를 한 번의 펜질로 해체했다. 트루먼이 제시한 이유는, 전쟁 전처럼 FBI와 군, 국무부에서 각자 정보를 수집해 처리할 수 있는데 굳이 비싼 별도의 해외 정보 기구를 유지하는데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OSS 국장 윌리엄 F. 도노반제시되지 않은 이유는 아주 많았지만, 최우선적인 동기는 소속 정당에서 트루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OSS의 수장 윌리엄 F. 도노반 소장은, 워싱턴의 많은 정치인들에게 반감과 불신을 받았다. 그는 민주당 행정부에서의 완고한 공화당 지지자였다. OSS의 권한은 광대하고 불분명했으므로, 정치인들은 도노반이 FBI의 J. 에드가 후버가 그랬던 것처럼, 그 무한한 권한으로 공직자들에게 불리한 정보를 수집해,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사용할 것이라 우려했다.FBI, 국무부, 군으로부터의 압력 또한 있었다. 후버는 OSS를 박살내야 할 건방진 라이벌로 보았다. 국무부는 자신들이 외국에서 직접 운용하는 첩보 요원들 외에 다른 요원들이 존재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 요원들로부터의 보고는 정부에서 통제할 수 없으므로, 국무부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군은 2차세계대전 중 OSS에게 대부분의 정보적 역할을 상실했고, 이젠 돌려받기를 원했다.1947년이 되자, 동유럽과 발칸 국가들은 확고한 소련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철의 장막이 드리우며 서방으로 향하는 국경이 폐쇄되었고, 그렇게 냉전이 시작됐다. 서방의 외교관들은 수도에만 머무를 수 있게 되었고, 서방도 동일한 방법으로 보복했다. 동구와 서구 간 민간 통행은 더뎌졌다가, 공산 국가의 국민들이 서방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택하자, 완전히 중단되었다. 소련의 팽창 경계에 접한 대부분의 비 공산 국가들은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반정부 정서를 부추켰다. 공산주의 정변은 흔한 일이었다. 정변이 실패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산으로 달아나 체제 전복 활동과 게릴라 전술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곧이어 공산당 주도의 내전이 그리스, 중국, 버마,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졌다.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보 부처들은 난맥상에 빠져있었다. OSS가 2차대전 중 구성했던 첩보망은 사라져버렸고, 곧바로 대체될 수 없었다. 미군은 의회에서 급격히 군사 예산을 삭감한 탓에 세계적이고, 전략적인 첩보 부서를 운영할만한 훈련된 인원도 충분한 예산도 없었으며, 굳이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FBI의 자원들은 국내에만 묶여있었다. 국무부의 정보 체계는 국무부 내 다른 부서들처럼, 공산주의 옹호자들이 강하게 침투해 무능했다. 예산과 권한에 대한 부처 간의 경쟁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로, 미국은 다시 한번 공산주의가 새롭게 얻어낸 갑작스러운 성과에 놀라게 되었다.뭔가가 이뤄져야만 했다. 그것도 빠르게.1947년 말, 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의 강력한 촉구(그리고 국무부와 FBI의 반대) 아래, 외국에서의 전략적 첩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를 창설했다. 타협이었다. FBI를 만족시키기 위해, FBI의 해외 사무실은 국제 경찰 조직들과의 연락소로 사용하도록 계속 운영이 허가했다. CIA가 미국 국경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수많은 제약 사항이 법에 포함되었다. 세부적으로, CIA는 미 국경 내에서 첩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으며, 대신 미 본토에 요원 훈련 및 강평 시설을 가질 수는 있었다.당시에는 유럽, 즉 발칸, 터키, 그리스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이 주요 위협으로 여겨졌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먼 후순위였다. CIA의 첫 3년 동안, 부서 내 대부분의 작전 요원들은 유럽의 CIA 지부(Station)로 파견되었고, 비교적 적은 CIA 비밀 작전 예산의 대부분도 같은 지역에 할당되었다.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동남아를 삼키려 할 수도 있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자원, 즉 인력과 자금만이 극동으로 보내졌다.도쿄의 CIA 본부였던 NYK(일본우선) 해운회사 사옥. 더글라스 맥아더 육군원수와 그의 정보장교인 찰스 A. 윌러비 소장은 CIA의 극동 작전의 또 다른 걸림돌로 드러났다. 한국전쟁 개전 시점에서, 일본의 CIA 본부는 도쿄 시내 작은 호텔의 근무자 6명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숙소까지 호텔은 둘이었다. CIA 근무자들은 맥아더의 사령부와 그 휘하의 군사 기지, 즉 일본, 한국,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한 지역에서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었다. 맥아더가 극동 CIA의 주 임무가 워싱턴에 있는 맥아더의 정적들에게 정보를 대는 것이라는 편집증에 가까운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맥아더(좌측 세번째)와 윌러비(좌측 두번째). 50년 6월 29일, 영등포 동양 맥주 공장의 수도사단 지휘소에서2차대전 당시 맥아더는 OSS 부대가 자신의 관할 아래에서 활동하는 걸 차단했었다. CIA가 탄생하자, 맥아더는 똑같이 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CIA가 그의 관할 내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을 지시하는 직접 명령을 내리자, 맥아더는 마지못하며 따랐다. 그러나 공식 창구 이외에 “워싱턴 염탐꾼들”과 무언가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대빵”이 매우 언짢아 할 것 이라는 말이 돌았다. “공식 창구”라 함은, 극동사령부(FECOM)에 소속된 모두의 정확한 해석에 의하면, 맥아더의 정보참모부장인 찰스 윌러비 소장과, 윌러비 장군이 지명한 누군가를 의미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CIA에 대한 맥아더의 시선을 바꾸지는 않았으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필요성이 극동 내 CIA 작전에 반발하는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렸다.CIA 조직도(1949년 1월 시점)1950년 7월, OSS 출신의 2차대전 베테랑이자 CIA 출범 당시 처음으로 채용됐던 인물 중 하나인 프랭크 위스너가 극동 CIA 작전의 책임자로 일본에 도착했다. 위스너는 자신의 경험과,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능력과, 거의 무제한의 예산을 함께 가지고 왔다. 위스너가 제일 처음 착수한 일 중 하나는 새 부서인 특수작전실(Office of Special Operations, OSO)을 감독하기 위한 부관으로 한스 토프트의 배속을 요청한 것이었다.(*)* 위스너는 48년 9월~51년 8월까지 CIA의 정책조정실(Office of Policy Coordination, OPC)의 수장인, 정책조정보조국장(Assistant Director for Policy Coordination) 이었음. 토프트도 OSO가 아니라 일본지부 OPC 실장으로, 저자가 인용된 원서에도 OPC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오류가 생긴건지는 모르겠음...토프트는 덴마크 선장의 아들로, 흥미로운 배경을 가졌다. 그는 중국어를 포함해 6개의 언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무제한 선장 면허와 더불어, 개인 비행 면허에 계기 비행 및 쌍발기 자격을 갖췄다. 토프트는 2차대전 중 OSS에 모집되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적진 후방에 강하했었다. 마지막 후방 침투 임무를 마치고 퇴출한 후에, 그는 아드리아 해에서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 화기와 물자를 나르는 소형 보트 선단을 이끌었다. 토프트는 전쟁 중 소령 계급까지 올라갔으며, 1946년 초 현역에서 예편하기 직전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이후, 토프트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팬암 항공사의 현지 관리자가 되었다. 1948년 미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와 결혼한 그는 미국으로 이사했다. 오하이오에 정착한 후, 토프트는 다시 비상근 예비역에서 상근 예비역으로 전환되었다.워싱턴 D.C. E Street에 위치한 최초의 CIA 본부이자 구 OSS 본부.1949년 12월, CIA의 극동부서 책임자인 리차드 G. 스틸웰과 그의 부책임자, 데스몬드 피츠제럴드가 토프트를 영입하려 시도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며 가족을 꾸리던 토프트는 거절했다.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바뀌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토프트는 2주 간의 하계 예비역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틀 뒤, 토프트는 E가의 CIA 본부에 나타나 CIA에 자원했다. 토프트는 채용되었고, 위스너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배정되었다.좌측부터 한스 토프트, 알프레드 콕스(홍콩지부 OPC 실장), 리차드 스틸웰(CIA 극동지역 OPC 실장)토프트는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버마의 OSS 101 분견대 지휘관이었던 콜웰 비어스를 부관으로 영입했다. 둘은 아츠기 공군 기지 한 쪽 구석에 외떨어진 15 에이커의 공터를 찾아 건축물의 자리를 쟀고, 일주일 만에 엔지니어를 데려와 곧 천여명이 넘어갈 CIA 인원을 위한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좌측부터 토프트, Y부대장(영도유격대) 한철민 대위, 크레이머공사가 시작되자 토프트는 한국에서의 작전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한국 내 CIA 작전을 위해 해병대 중령인 ‘더치’ 크레이머를 영입했다. 1950년 7월 말이었다. UN군은 묵사발이 나 부산 방어선으로 후퇴 중이었고, 크레이머는 CIA의 한국 기지를 한국의 서남 해안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있는 거대한 섬 제주에 설립했다.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반격작전 이후, 크레이머는 본부를 부산에서 남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섬 영도로 옮겼다. 1950년 11월 초, 영도 조직에게는 “주한합동고문단 Joint Advisory Commision, Korea”(*), 혹은 JACK으로 잘 알려진 위장 명칭이 부여되었다. * 명칭 자체를 직역하면 주한합동고문단이지만, 대원 제대증에는 주한연합고문단사령부로 기재되었으며 공식적인 한글 명칭은 주한연합고문단사령부인 것으로 보임한편, 토프트의 일본 OPC는 극동공군기술분석단(FEAF/TAG)이라는 위장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음.영도에서 BAR 분해 결합법을 배우는 유격대원이 시점에서 영도에는 한국 정부가 사용중인 일제 시대 건물 몇 채와, 몇몇 근사한 일본 양식의 빌라, 그리고 두 세개의 작은 마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크레이머는 남한 정부로부터 섬의 주민들을 육지나 다른 섬으로 이주시켜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영도와 주변의 수역은 섬에 사는 사람이나 업무상의 허가를 받은 이들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과 UN 인원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통제 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여러 달을 거쳐 영도는 무장한, 기밀 기지로 바뀌었으며, 전쟁 내내 그대로를 유지하게 되었다.Horace A. Bass. 러더로우 급 호위 구축함으로 건함되다가, 러더로우 급을 고속 수송함으로 개조한 크로즐리 급으로 변경되어 1944년 취역함. 오키나와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상륙 1파로 참전함미국을 떠나기 전, 토프트는 CIA 지휘 계통을 통해 고속 수송선과 수중폭파대(UDT) 인원을 한국 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해군은 CIA 극동 작전에 협력하기 위한 주한미해군특수작전단(USNSOG,K)을 결성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1950년 8월 6일, 개수된 구축함 호레이스 A. 베스(APD-124) 함이 JACK의 특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다. 베스 함은 4척의 상륙정, 특수 훈련을 받은 승조원, 20명의 UDT 인원, 해병대 수색소대를 데리고 왔다. 베스는 승조원과 UDT, 해병대에 더하여 162명의 유격대원, 혹은 특공대원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틀 뒤, 잠수 수송함 퍼치(SS-176 *)가 도착해 베스 함과 함류했다. 퍼치 함은 개수로 승조원에 더해 최대 110명을 수송할 수 있었다.* 책의 오기, SS-176 Perch는 포퍼스 급 잠수함으로 1942년 격침, 한국전에 참전한 Perch는 발라오 급 잠수함으로 함번은 SS-313임.1950년 일본 맥길 기지 인근의 나가 해변에서 훈련하는 UDT-1 팀과 UDT-3팀드디어 JACK은 특수 작전 업무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해안의 황해는 수심이 얕았으므로, 크레이머는 퍼치 함을 동해안의 깊은 해역에서 통상적으로 운용하기로 했다. 베스 함은 주로 서해안에서 운용될 것이었다.------------------------------------------------------------------------------------------------------------여담으로 토프트에 대해서는 골때리는 뒷이야기가 있음. 하나는 성공담을 과장해서 예산 타먹다가, 토프트가 보고한 ‘실제’ 유격대 작전 영상을 교본으로 본 훈련생이 어떻게 모든 영상이 대낮에 촬영된건지 의문을 품으면서 거짓인게 들통나 해임됐다는, 검증할 수 없는 ‘썰‘이고,(토프트는 이후 콜롬비아 내전에 관여했음)다른 하나는... 소련 프라우다에도 보도된 골때리는 기밀 유출 사건임.간략하게 소개하자면,토프트가 반지하 집을 월세로 내놨는데, 신입 CIA 직원이 광고를 보고 토프트의 집으로 방문함.토프트와 아내는 이사 갈 집을 정리하느라 집에는 토프트의 장모 밖에 없었음.그런데, 신입이 어쩌다가 3층에 있던 장롱을 연 순간, 거기서 CIA 기밀 문서가 우수수 쏟아져 나온것 (!)이 사건으로 토프트는 하루아침에 CIA에서 해고되고 말았고...토프트는 CIA를 고소했다분량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잡히네..번역에 이상한 부분이 있거나 글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면 마음껏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음.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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