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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발령 히어로!!! 28
[시리즈] 지방발령 히어로!!! · 지방발령 히어로 · 지방발령 히어로2 · 지방발령 히어로3 · 지방발령 히어로4 · 지방발령 히어로!!! 5 · 지방발령 히어로!!! 6 · 지방발령 히어로!!! 7 · 지방발령 히어로!!! 8 · 지방발령 히어로!!! 9 · 지방발령 히어로!!! 10 · 지방발령 히어로!!! 11 · 지방발령 히어로!!! 12 · 지방발령 히어로!!! 13 · 지방발령 히어로!!! 14 · 지방발령 히어로!!! 15 · 지방발령 히어로!!! 16 · 지방발령 히어로!!! 17 · 지방발령 히어로!!! 18 · 지방발령 히어로!!! 19 · 지방발령 히어로!!! 20 · 지방발령 히어로!!! 21 · 지방발령 히어로!!! 22 · 지방발령 히어로!!! 23 · 지방발령 히어로!!! 24 · 지방발령 히어로!!! 25 · 지방발령 히어로!!! 26 · 지방발령 히어로!!! 27 이제 얼마 안남았구먼이 시리즈가 끝나면 단편 많이 그릴거임
작성자 : 준한준환고정닉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시리즈]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2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3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에는 미하일 얀코프스키 (Mikhail Ivanovich Yankovsky)라고 하는 폴란드인이 있었다. 그의 가문은 폴란드 동부의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튜튼 기사단과 싸우다 다리를 잃은 그의 선조에게 폴란드 왕이 직접 하사했다는 가문 문장에는 파란 방패와 단검 한자루가 새겨져있었다. 이 단검은 노비나(Novina)라라고 불렸고 그의 가문의 상징으로 쓰였다.얀코프스키는 젊은 시절 러시아 농업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그러던 중 1863년,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봉기가 일어났다. 젊은 혈기의 얀코프스키는 친구들과 함께 봉기에 참여하여 러시아군의 군자금이 실린 마차를 강탈하려다 포로로 잡혔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분노하여 3만명이 넘는 폴란드인 정치범들을 시베리아의 동토로 유배 보냈다. 얀코프스키는 이들과 함께 걸어서 시베리아까지 가야했다. (당시엔 시베리아 철도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므로 얀코프스키와 폴란드인들은 주변의 풀이나 새, 토끼 같은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버텼으며 이 시기를 통해 시베리아의 동식물과 생존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그는 정치범으로 광산에서 몇 년간 혹독한 중노동을 하며 복역한 끝에 1868년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르는 폴란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얀코프스키는 집에 가지 못할 바에 이 동네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며 바이칼호를 건너 계속 동쪽으로 나아갔다. 아무르강에 도착한 그는 나룻배를 얻어타고 하류로 내려가 러시아 극동영토의 최남단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했다.그는 그 곳에서 금광 관리자로 몇 년을 일했으나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그는 연해주의 자연환경이 목장을 운영하기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군총독을 찾아가서 황무지 개간을 신청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의 작은 반도를 임차했다.이 작은 반도는 야쿠트족의 말을 따서 '시데미'라고 불렸다.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의 땅이 된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은 신세계였다. 땅은 많고 개발은 안되어 있고 사람은 적었다. 이런 곳에서는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높았다. 이 일대는 호랑이와 표범, 불곰과 멧돼지등이 엄청 많이 살았고 도적떼도 출몰했다.얀코프스키는 핀란드, 라트비아 등지에서 온 정치범 출신 친구들과 함께 과 함께 이 작은 섬을 개간하기로 했다. 다만 얀코프스키 본인은 금광 일의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아 조금 늦게 갔고, 친구들이 먼저가서 자리를 잡았다.얀코프스키는 금광일을 하는 틈틈히 목장을 만들어갔다. 그는 이웃나라인 청나라와 조선에서 사슴 뿔(녹용을 의미함.)을 약재로 쓴다는 사실을 알았고 현지 원주민들에게서 사슴들을 구매했다. 그리하여 얀코프스키는 섬에다가 사슴을 방목하여 키웠다. 그리고 녹용만 잘라서 중국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녹용판매가 잘 되서 수입은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그만큼 목장을 운영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인보다 국경을 건너 온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더 많았다. 특히 조선인들은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척박한 연해주로 이주하여 땅을 일구며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도 다른민족은 엄두도 안내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조선인들을 암묵적으로 받아주었다. 얀코프스키의 목장 근처에도 조선인들이 여러 가족 살았다.금광 계약기간이 끝나던 1879년, 얀코프스키는 마침내 인수인계까지 끝내고 러시아군 출신 동료 2명과 함께 작은 돛단배를 타고 목장이 있는 반도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오기 바로 전 날 목장에 중국 마적떼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홍호자(紅鬍賊)라고 불리는 이들로 만주에서 넘어왔다. 1870년대만 하더라도 연해주의 러시아군보다 마적들이 더 많던 시절이라서 마을 하나가 습격당해 통째로 증발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마적들은 모든 곳이 철저하게 약탈 했으며 이웃에 살던 핀란드인은 마누라와 아들을 잃었다. 분노한 얀코프스키는 마적들에게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의 조선인들과 힘을 합쳐 마적들을 쫒아가서 일부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조선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하여 마적단과 주기적으로 교전을 벌이며 농장을 지켜냈다. 그가 상대해야할 적은 마적뿐만이 아니었다. 연해주는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 늑대, 스라소니 같은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첫 해 사슴 4마리를 호랑이에게 잃은 얀코프스키는 사냥을 다니며 직접 해수를 구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이 총을 꽤나 잘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대부분 함경도에서 넘어온 이주민들로 포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라서 맹수들의 습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얀코프스키는 평생 9마리의 호랑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맹수들을 잡았다.나중에는 인근 마을에 호환이 생기면 무조건 얀코프스키를 찾아와 잡아줄 것을 부탁하는 정도였다. 그는 연해주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 만주와 조선까지 드나들며 맹수를 잡았다. 그와 조선인들이 열심히 마적과 맹수를 몰아낸 덕분에 목장은 안정되었고 러시아 국경도 평화로워졌다.얀코프스키는 자신과 일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조선인들만 고용했다. 그 이유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밤에는 마적으로도 활동하는 중국인들에 비해 조선인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남들을 도적질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따라줬기 때문었다. 조선인들 역시 마적에게서 재산을 보호 받을 수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얀코프스키를 좋아했다.한번은 얀코프스키 혼자 호랑이를 추적하던 도중 마적 1명에게 습격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마적은 얀코프스키의 등 뒤에 숨어서 총을 쏘려했는데, 나뭇가지 밟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얀코프스키가 운 좋게 먼저 총을 쏴서 마적을 사살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마적은 꽤 악명 높은 마적단의 두목이었다. 그의 일화는 순식간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퍼졌다. 국경수비대도 하지 못한 걸 일개 개척민이 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인들은 얀코프스키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서 마적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여겼다. 거기다 얀코프스키는 당시 극히 희귀했던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는데, 조선인들은 그걸 보고선 '저 양반은 저 시커먼걸 쓰고도 앞이 보이나보다'하며 눈이 네개 달린 인간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에게 '네눈이(말그대로 눈이 네개 라는 뜻. 러시아어로는 НЭНУНИ'라고 부름.)라는 별명을 얻었다조선인들과 친해진 얀코프스키는 그들이 인삼이라고 하는 식물뿌리를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달여먹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시아인들이 인삼을 아주 귀하게 여기며 조선의 국책사업이 인삼농사라는 사실을 들었다.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을 통해 겨우 인삼씨를 구해와 목장 한편에 따로 심어 재배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얀코프스키는 인삼재배에도 성공하여 이를 만주와 조선에 내다팔았다.그래서 극동러시아 역사책에는 얀코프스키를 가리켜 인삼과 녹용을 재배한 최초의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돈을 꽤 많이 모은 얀코프스키는 목장에 말들을 들여와서 번식 시켰다. 그는 본래 종마를 키우는 목장을 운영하고 싶어했다.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서방산 종마들을 구해온 얀코프스키는 말들을 교배시켜 품종을 개량하여 러시아군에게 군마를 공급하는 군납계약까지 맺었다. 얀코프스키는 이런 일련의 사업들이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다. 농장이 제일 번성하기 시작한 1910년대에는 600마리의 말들과 2천마리의 사슴을 보유했다. 거기다 러시아 정부에게 과거 몰수 당했던 귀족작위도 돌려받았다. 멀리 폴란드에서 끌려온 정치범은 30년만에 극동의 농장재벌이 되어 인생역전을 이루어냈다.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얀코프스키는 블라디보스토크 사교계(쥐뿔만함)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싶어했다. 그는 공공사업이나 시설건축등에 큰 돈을 자주 기부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유서깊은 건물들 상당수는 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사업이 안정되자 얀코프스키는 시베리아 부랴트족의 혼혈인 올가 루치니차나(Ольга Лукинична)와 결혼했다. 올가는 고아출신으로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 그 집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얀코프스키와 만났다. 얀코프스키는 귀족의 딸들보다 하녀인 올가에게 더 관심이 있었고 한달 뒤 다시 찾아와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아무래도 부모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조국을 떠나 만리타향에서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겹쳐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올가는 힘든 목장생활에도 내색하지 않고 얀코프스키를 잘 내조했고 그들장남 유리 얀코프스키(Юрий Янковский)를 비롯 2남 4녀를 낳았다. 연해주에서 유명인사가 된 얀코프스키는 이후 차르의 칙명을 받아 극동의 동식물들에 대해서 조사하게 됐다. 그는 1890년대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한반도 북부를 여행하며 농업대학 재학시절 배운 것과 정치범으로 시베리아를 방랑할 때 얻은 지식들을 동원하여 여러가지 동식물들을 발견하였으며, 러시아 자연사학계에도 작은 족적을 남겼다. 덕분에 '얀코프스키'라는 학명이 붙은 동식물은 현재 20여종이나 된다. 얀코프스키는 극동러시아에서 매우 큰 위세를 떨쳤다. 목장이 있는 시데미 반도에는 얀코프스키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저택의 꼭대기에다가 푸른 방패와 단검이 들어간 폴란드 시절 자신의 가문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걸어놓았다.내부에는 거대한 연회장과 수십개의 방,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달려있었고 저택 내 모든 식기는 전부 은으로 된 걸 썼다. 거기다 그 당시 나온지 얼마 안 된 개인 자가용과 전용 전화선도 갖추었다. 조금 떨어진 해안가의 전용부두에는 스쿠너와 바지선이 여러척 정박해 있었다. 얀코프스키는 자신을 따르는 조선인들을 위한 별채도 따로 지어줬다. 그 크기는 저택에 비하면 작았지만 당시 조선의 초가집이나 러시아인들이 살던 작은 주택들에 비하면 훨씬 컸다. 그의 밑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이후 돈을 모아 근처에 농장을 세우고 계속 대를 이어 얀코프스키 가문을 도우며 일하였다.다만 저택의 외관은 망루와 총안구등, 성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문에는 비상시 이중 쇠창살이 위에서 내려오도록 설치되어 있었고 모든 방의 창문은 내부에서 강철로 된 철문으로 덮을 수 있었다. 지하실에는 수개월을 먹을 수 있는 식량들과 한켠에는 포로를 가둬놓을 수 있는 감옥까지 있었다. 지하실의 숨겨진 문을 열면 반대편 해안까지 10분 안에 나갈 수 있는 작은 동굴도 만들어놨다.이는 얀코프스키가 과거 마적의 습격을 겪은 뒤 이에 대비하여 설계한 것이다. 사실 1890년대쯤 되면 연해주 국경의 치안이 강화되어 마적의 습격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나, 얀코프스키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런 집을 지었다. 얀코프스키의 가족들은 멀리 떨어지지 않고 모두 같이 모여 살았다. 그는 아들 유리를 미국 텍사스의 농장으로 유학보내 전문경영인으로 키웠다. 미국 쪽과 커넥션이 생기자 미국산 종마들을 들여와서 품종개량을 할 수 있었다. 유리는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 받아 더 크게 키웠고 아들 발레리와 아르세니를 낳았다. 이들 모두 할아버지를 닮아 사냥에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이 든 얀코프스키 대신 아들과 손자들이 대를 이어 맹수사냥을 다녔다. 조선인들은 얀코프스키의 별명을 따서 이들을 '아들 네눈이, 손자 네눈이'라고 불렀다.이 집에는 새끼때 잡아와서 기른 애완표범 '삼손'이 항상 문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녀석은 특히 얀코프스키의 부인 올가를 잘 따랐으며 부인은 가끔씩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할 때면 표범을 데리고 시내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얀코프스키는 말년에 극심한 폐렴에 걸렸다. 포시예트 시 병원의 의사는 그에게 따뜻한 곳에서 쉬라는 조언을 했다. 목장경영을 장남 유리에게 맡긴 얀코프스키는 러시아 남부 소치로 요양을 갔고 1912년 그 곳에서 사망했다. 현재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에는 연해주를 개척한 공로로 러시아 정부가 세운 그의 동상이 존재한다.-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2 [시리즈]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2 · 싱글벙글 폴란드 정치범에서 조선 대영주까지 3 폴란드 정치범 출신이었던 미하일 얀코프스키(Mikhail Ivanovich Yankovsky)는 19세기 후반 연해주에서 맹수사냥, 사슴농장과 말 목장, 인삼재배들을 통하여 자수성가하였고 그의 자손들은 귀족 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며 살았다. 장남이었던 유리 얀코프스키(Юрий Янковский)는 1912년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장을 이어갔고 1000마리의 사슴과 600마리의 말들을 기르는 대지주가 되었다. 그 역시 아버지만큼 사냥에 소질이 있어서 한반도와 만주를 돌아다니며 매우 많은 맹수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얀코프스키 가문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터졌다. 근본도 없는 빨갱이 새끼들이 나라를 뒤엎고 차르를 죽여버렸다. 백군과 적군으로 나뉜 러시아인들의 내전은 곧 극동까지 도달했다. 대대로 제정 러시아군에게 군마를 팔아 온 얀코프스키 가문은 당연히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백군을 후원했다. 하지만 1922년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장악하게 되자 얀코프스키 일가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부르주아지'라며 탄압의 대상에 올랐다. 가장이 된 유리 얀코프스키는 또 다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짤은 국외로 망명하는 러시아 백군들과 피난민들)1922년 어느날 새벽,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 동안 일궈온 목장과 농장, 저택등 재산을 모두 버리고 바지선에 말 60마리와 가족들, 그리고 조선인 일꾼들만을 태운 뒤 일본제국령 조선으로 망명했다. 오랜 세월 걸쳐 드나들었고 나름 조선의 문화와 사정에도 밝았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얀코프스키 일가는 함경북도 청진(당시 이름으로 '새신')에 상륙하였다. 뜻밖의 망명이었지만 조선 총독부는 얀코프스키 일가를 받아주었다. 안 그래도 당시 원산에는 3만명이 넘는 러시아 피난민들이 적군을 피해 도망쳐와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상하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살기로 했다. 하지만 당연히 정착은 쉽지 않았다. 이들은 처음 1년동안 거리에서 자신들의 소지품을 팔거나 잡역부로 일하고 경마장에서 기수로 뛰는 등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들의 마지막 재산이나 다름없었던 60마리의 종마들은 한반도의 토질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전부 폐사했다.
작성자 : 코드치기귀찮아서만든계정고정닉
불태운 4시간짜리 해외여행 (대마도 [쓰시마])
2024년 09월 연차를 쓰지 않고도 무려 6일을 연속으로 쉴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따로 계획을 잡은 게 없었기에 집 근처에서 노는 것도 질리던 참문득 얼마 전 Fire egg 없는 Fire egg 친구의 소식이 떠올랐습니다.이벤트에 참여해서 대마도 왕복 승선권+술 2병을 싸게 구했는데이벤트 술은 면세 카운트가 안 되는 줄 알고 술을 한 병 더 샀다가 빼앗겼다는 이야기...바로 친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나 "야, 너 뺏긴 술 내가 받아올 수도 있냐?"친 "왜? 니가 가게?"나 "고민 중... 왕복 승선권 싸게 나왔더라고"친 "위임장 쓰면 가능할걸?"나 "그럼 그 술 나 가진다?"친 "그래라 ㅋㅋㅋ 갈 거면 말해"이후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하다가 연휴에 방콕만 할 것 같아 결국 배를 잡고 여행 계획을 급하게 짰습니다.멀리 보이던 저 섬으로 드디어 가보는구나...배는 특가로 왕복 7만 원에 딱 두 자리가 남아있어 서둘러 예약하고친구에게 정보를 받아 세관으로 연락해서 위임 신청도 완료했습니다.출발 당일 새벽 6시.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1시간 반 전에 도착해달라는 안내도 있고혹시나 세관 문제도 있을까 일찍 출발해 봅니다.우효---! 꽁술 겟또다제---!!티켓팅을 완료하고 탑승장으로 들어가 검색대로 향하지 않고 왼쪽으로 갔더니세관직원 세 분이 술을 들고 계셨습니다.어제 연락을 주신 분이냐며 간단한 신분 체크와 사인을 한 다음 물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검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면세점이 있었는데야마자키 12년이 딱 한 병 28만 원에 남아있어 구매할까 하다가'일본 면세점이나 주류 판매점이 더 싸지 않을까?'생각하고 그냥 배에 승선을 했습니다.시간이 되고 배는 출발~싼값의 왕복 티켓인 만큼 선내 카페(+화장실) 앞의 사람이 많이 지나다닐 것으로 예상되는 자리였습니다.그래도 운이 좋은 건지 생각보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편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배 안은 이런 느낌.짧은 거리고 파도도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1~1.5m)출항 30분 만에 4~5명이 화장실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멀미가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신호도 꽤 잘 터졌습니다.쓰시마에 도착하기 10분 전까지도 잘 터졌는데 갑자기 뚝 끊어지더군요.그렇게 금방 도착한 쓰시마 (대마도)정말 쪼끄만 여객터미널입니다. ㅎㅎ확실히 한국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라 그런지터미널 곳곳에도 한글이 적혀있고 종사자분들도 어느 정도 한국어를 사용하셨습니다.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 미리 알아둔 전기자전거 대여소로 이동했습니다.Chinguya (친구야)라는 식당인데 자전거 대여도 겸하고 있습니다.전기자전거는 2시간에 1,000엔, 이후 1시간당 500엔을 추가금을 받는 형식이었습니다.자전거 타는 걸 참 좋아하는데 사는 곳 근처에는 느긋하게 탈 곳이 없어 BMW를 이용 중입니다만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자전거 타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첫 목적지는 우선 식사부터 해결하고자 미리 찾아뒀던 초밥집 すし処 慎一 스시도코로 신이치로 향했습니다.리뷰에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없어 큰 걱정을 안 했는데 이미 가게 안은 만석이고10명 정도의 손님이 줄을 서있어 지금 기다렸다간 일정 소화를 못하겠다 생각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전기자전거를 처음 타 봤는데오토바이처럼 타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제가 쓰는 힘을 1/5수준으로 줄여주는 버프 머신이었습니다.이런 경사길에서도 전혀 힘을 주지 않고도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그렇게 도착한 西泊海水浴場 (なや浜海岸) 니시도마리 해수욕장 (나야 해변 해안)캬~ 멋집니다.이 멋진 해수욕장을 혼자 독차지 중이라니!하늘과 바다의 푸른색을 만끽하고 다시 이동합니다.차도 없고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던 그런 여름의 공간에 들어간듯합니다.조금 더 들어가니 더욱 에메랄드빛이 된 바다.즐거운 자전거 타기를 중간중간 멈출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습니다.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 중 한 곳이라는 三宇田浜海水浴場 미우다 해변 해수욕장괌이나 태국에서 느꼈던 이국의 바다를 이렇게 가까운 섬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게 놀랍습니다.上対馬温泉 渚の湯 카미쓰시마 온천 나기사노유사실 식사 후에 가려고 했던 곳인데 예정을 바꿔 온천을 먼저 즐기기로 합니다.다 같은 가격인데 무슨 이유인지섬사람과 외지 사람(일본인), 외국인을 나눠놓은 티켓.외국인 성인 입장권과 바스 타월을 구매 후 입장했습니다.내부는 촬영할 수 없으니 대충 작은 탕이 몇 개 있고 샤워기가 5개 정도그리고 사우나가 있었습니다.약간 아쉽긴 하지만 탕 안에서 바다를 구경하며 바닷바람을 느끼며 온천을 즐기는 건또 즐거운 추억이 됐습니다.목욕탕에는 정말 티슈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구비되어 있지 않으니온천을 즐기실 분들은 꼭 풀세트를 준비해 갈 것을 추천합니다.(면봉, 드라이어, 스킨, 로션, 기타 등등 아무것도 없이 딱 티슈만 있습니다.)시간이 없기 때문에 5분 정도의 짧은 온천을 즐기고일본 목욕의 묘미인 병 우유를 마시러 갔는데 엥?... 사용 금지?...먼저 오신 일본인 할머니 두 분이 주인장에게 물어보니며칠 전 낙뢰를 맞아 고장 났는데 목욕탕 관할이 아니라자판기 회사 제품이라 수리를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아... 내 병 우유...는 온천에 들어가기 전 미우다 해변에서 팔던걸 기억하고 다시 달려갔습니다.이동식 차량 카페에서 판매하는 거라 조금 아쉬운 시원함이지만병 우유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족합니다.2개를 더 사서 방금 할머니들께 가져다드릴까 생각은 했지만다시 가도 계실까 하는 생각과 일정의 촉박함에 그만뒀는데되든 안 되든 사서 드릴 걸이라는 후회가 남았습니다.;ㅅ;다시 자전거를 타고 이동!날씨는 정말 좋은데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은 바람에온천에 선크림이 씻겨나간 피부 위로 뜨거운 태양빛이 스며듭니다.불과 몇 분 차이인데 아까와 또 다른 빛의 바다.신나게 달리다가도 계속 옆을 돌아보고 가던 길을 멈추게 됩니다.구름도 이쁘구나~지브리의 포뇨가 떠올랐던 항구.곳곳의 개울에는 물고기떼도 보입니다.바다와 이어진 개울.다시 신이치를 찾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이 줄 서있어 계획을 변경해 다른 초밥집을 급하게 찾았습니다.다행히 자리가 있었던 みなと寿し 미나토스시.카운터 자리를 안내받고 주문을 합니다.주문한 にぎり寿しセット 니기리스시 세트.우선 소바와 챠완무시.저 오른쪽 위의 반찬이 정말 맛있었습니다.시라아에 같은데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군요.그리고 초밥.이건 추가로 주문한 自家製明太子 미나토스시에서 만든 자가제 명란젓.굉장히 짰습니다.다 나왔으니 영상으로 한번 찍어주고サントリー ザ・プレミアム・モルツ 香るエール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 향이 나는 에일 맥주부터 벌컥.병맥주로 할까 하다가 기분으로 생맥주를 주문해 봅니다.냠냠냠맥주를 끝내고 쓰시마의 일본주 白嶽 生酒 시라타케 나마자케 생주도 주문.부드러운 일본주긴 했습니다만 좀 싱거운 느낌의 아쉬움...조금 더 마시고 싶었지만 아직 일정이 남았기에 후반은 초밥만으로 즐겼습니다.히타카츠 유일의 대형마트 スーパーバリュータケスエ 슈퍼 밸류 타케스에 (밸류 마트)이즈하라에는 대형마트가 꽤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만히타카츠에는 아직 이곳이 유일한듯합니다.크다고 해도 슈퍼라 물건이 많지는 않습니다.얼마 전 이미지 걸이 됐다는 최애의 아이 카나의 제품도 발견.물건의 다양함은 부산의 국제시장과 비슷합니다만국제시장이 한국인에게 먹히는 유명한 일본 제품이 가득하다면여긴 그냥 평범한 일본 제품이 많아 한국에서 잘 팔지 않는 물건을 위주로 사면 좋을듯합니다.이후 종업원에게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지 물어봤으나여긴 그런 거 없다는 슬픈 목소리의 대답을 듣고 죄송해졌습니다.마트 쇼핑을 끝내고 바로 근처에 대마도 명물을 구매하러 갔습니다.쓰시마 명물 카스마키.많이 있을 줄 알고 늦게 찾아갔는데 이미 다 팔리고 미니 사이즈만 3개 2개 남아있다고 하여2개 2개 해서 4개 세트를 만들어 포장을 부탁했습니다.흰 앙금과 검은 앙금 (당일 먹은 건 아니고 다음날 아침 대용으로 먹었습니다.)냠.카스마키라는 이름 때문에 카스테라와 비슷하려나 생각했지만그냥 모양만 다른 도라야키였습니다.이건 추가 주문했던 黒ゴマ もなか 검은깨 모나카.딥 다크한 블랙입니다.깨를 곱게 잘 갈았는지 퍼석임 없이 부드러운 모나카였습니다.돌아다니면서특이하고 재미난자판기를 많이 봤습니다.정말 투명한 개울.자전거를 반납하고 골목으로 걸어 다니다 발견한 고양이.여행 도중 한 마리라도 발견할까 대마도 삵 (쓰시마 야마네코)을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끝까지 찾지 못했습니다.미안... 줄 게 없어...또 주변 구경을 하다 발견한 약국.다른게 아니라...약사의 혼잣말 "이거, 독입니다." 포스터가 약국에 붙어있는 게 웃겨서 찍어봤습니다.이후 터미널 근처의 면세점 두 곳을 가봤으나야마자키 12는 3.5만 엔이라 한국 면세점보다 비쌌고다른 일본 위스키들도 가격대가 비싸게 형성되어 있어 포기하고아버지께 드릴 위스키를 하나 산 후 터미널로 향했습니다.Cafe AMASE 카페 아마세출발까지 어중간하게 시간이 남아 디저트나 먹을까 하고 들어갔던 카페.생각지도 못했던 과일 우유를 이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ㅎㅎ잽싸게 구매했습니다.무진장 달았지만 땡볕에서 땀을 빼서인가 쭉쭉 잘 들어갔던 말차 라테.그렇게 짧은 휴식 후 시간이 되어 터미널로 들어갔습니다.출발 전 마지막으로 구매한 자판기의 이로하스.소금과 레몬인데 짠맛은 전혀 없었습니다.이게 타고 오고 타고 갈 니나호.조금 더 아래쪽에서 보면 배가 붕 떠있는 모습입니다.돌아갈 때는 바다가 보고 싶어 창가로 잡았지만 도착할 때까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ㅠㅠ대마도 여행의 전리품.품목만 봐도 히타카츠에는 얼마나 살게 없는지 알 수 있을 듯...그렇게 4시간이라는 짧은 당일치기 해외여행이 끝났습니다. ㅎㅎ혼자 여행도 잘 다니지 않고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결정도 잘 못하는데긴 연휴와 친구의 술, 특가로 나온 왕복 배편 등여러 가지 우연히 겹쳐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대마도 여행을 이렇게 갈 수 있었습니다.생각보다 더 할 게 없었던 섬이었지만생각보다 더 멋진 풍경으로 절 놀라게 한 섬.다음에는 제대로 된 자전거 여행이나 이즈하라 쪽을 가보고 싶습니다.연휴의 마지막을 제대로 불태운듯하여 만족스럽습니다.친구야 위스키 잘 마실게 ㅋㅋㅋ
작성자 : 더러운캔디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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