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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즉위 ~ 환국정치

ㅇㅇ(211.118) 2024.12.14 21: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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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즉위 이전 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3대째 적장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음


제2차 왕자의난으로 태종이 즉위한 후 많은 것을 했지만 대표적으로 조선의 악법 중 하나인 적서차별, 서얼금고법을 시행함

서자(첩의아들)는 웬만해선 왕이 될 수 없었고 서자와 얼자(천민출신아내)도 차별한다는 법임


사실 세종(충녕대군)은 태종의 둘째아들이여서 장자는 아니였으나 양녕대군을 세자책봉에서 번복해 나가리시킨후 세종을 세자로 책봉함

그리고나서 즉위했으나 여전히 세종은 태종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태종은 외척세력을 숙청해 세종이 정치를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음


이후 세종이 즉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장영실을 등용하고 유학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갖춰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맺음

또, 대마도를 정벌했고 4군6진중 6진을 완성시켜 오늘날의 한반도 영토까지 수복함(4군은 태종때)

그러나 세종은 몸이아파 문종을 세자책봉하고 자신은 뒷방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기록이 있음

당시 문종은 어렸기 때문에 이때 의정부서사제를 통한 정치를 했음. 문종이 즉위한 후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했으나 생각보다 일찍 죽어버리고 이후 자신의 첫째 아들인 단종이 즉위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계유정난이 터짐. 물론 단종은 어리기 때문에 문종이 의정부서사제로 바꿨으나 단종이 한 일은 현대시대로 치면 결재하는 것 밖에 없었음. 이를 황표정사라고 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세종의 둘째아들이였던 수양대군와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좋지 않게 봤음


문종이 왕일 시절 문종도 몸이 아프고 세종도 몸이 아프니 이때 대리로 정치를 한게 바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임. 그래서 이 둘은 정치적 감각을 키웠음

그리고나서 단종이 즉위하니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 슬슬 왕이 되고 싶은 나머지 자신들의 세력을 키움

사료상 계유정난은 단종이 안평대군을 죽였다고 되어있지만 실상은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죽이고 정치력 영향력을 키운 사건임

이후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기록과 함께 세조가 즉위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고 사실 왕위를 찬탈한게 맞음


그 이유가 바로 직후에 일어났던 단종복위운동때문임. 제1차 단종복위운동은 의정부에서 계획되었으나 이 계획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망함. 제2차 단종복위운동은 왕족이 벌였으나 이도 결국 끝나고 이후 단종은 폐위되고 여기에 가담했던 사람은 전부 피의 숙청을 당함.

이 시점에 튀어나온게 사육신과 생육신임. 그러나 훨씬 숙청당한 사람도 많았고 사육신들도 계유정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보아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올곧은 사람이 아님. 실제로 세조가 즉위한 후 육조직계제(세조) vs 의정부서사제(신하)들로 나눠서 싸운 기록이 있는걸 보아 이 이후에 틀어졌음.


세조의 즉위를 당대 유학자들은 당연히 좋지 않게 봤는데 바로 단종이 너무 완벽한 왕이였음. 3대째 적장자는 조선시대 통틀어 단 2명밖에 없는데 첫번째가 바로 단종이고 두 번째가 환국정치로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뽐낸 숙종임. 그러니까 유학자들은 세조의 즉위를 부정적으로 봤으나 입도 뻥끗할 수 없었음. 숙청을 당하기 싫었으니.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후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멀리 떠났는데 그 중에 유명한게 생육신임.


단종이 3대째 적장자라는 소리는? 세조의 즉위는 반유학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임. 그래서 세조는 즉위 후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신하들을 대거 공신책봉했고 이 책봉을 받은 사람 중 유명한 사람이 바로 한명회임. 그리고 한명회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이 우리가 아는 '훈구파'임. 그리고 이 훈구파들은 유학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세조에게 싸바싸바하게 되는데 이 시점부터 조선시대의 유학이 변질되기 시작함. 현실과 유학적 명분 중 현실을 택한 것임. 그리고 세조는 태종처럼 왕권강화를 할 수 없었던게 신하들이 바로 등돌려버리면 명분도 없는 왕위라 바로 폐위되기 십상이여서 태종처럼 공신들을 숙청하질 못함. 이를 훈구파들도 알고있었기에 세조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게 되고 세조시기부터 조선시대의 왕권은 흔들리고 신하들의 힘이 세지게 됨. 물론 세조도 말년에는 이들을 견제하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예종과 성종의 즉위는 한명회집안이 주도하게 됨. 예종과 성종은 형제였기 때문에 적장자계승원칙을 지키질 않았다는 뜻이 됨.


하지만 성종이 즉위한 후 힘이 너무 쎈 훈구파들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의 사림파들을 등용하게 되는데 사림파들은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생겨난 씹선비들이라 유학적 명분에 매우 충실한 씹선비들임. 그리고 유학적 명분에 충실하다는 소리는 세조의 즉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사림파들은 성종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고 왕명을 어기는 등의 행위를 일삼지만 사림파들이 훈구파들을 견제하도록 꾹 참았단게 성종임을 알 수 있음. 그러나 사림파들이 대거 등용되게 되고 결국 훈구파와 사림파들이 싸우는 계기가 되는데 이후에 우리가 잘 아는 4대사회가 터지게 됨.


사회:선비들의 화를 입다

일반적으로 사림파들이 당한게 많지만 훈구파들도 당한 사건이 꽤 됨


1. 무오사화

연산군이 즉위한 후 김일손(사림)이라는 사람이 사초(왕의 행위)를 쓰는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게 되고 이는 세조의 즉위를 까는 글임. 연산군 입장에선 자신의 조상을 까는 건데 이에 빡이 안돌수가 없어 주요 사초를 뽑아오라고 시키는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필두로 총 6개의 문제있는 사초가 나오게 되고 연산군은 직접 사초를 전부 보게 됨. 그리고 사림파들의 행동에 분노해서 세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사초를 쓴 사람들 전부 숙청하게 되는데 전부 김종직과 연관된 인물이였음. 그래서 사림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대거 숙청당함.



2. 갑자사화

이는 사람파가 화를 입은게 아닌 주로 훈구파가 화를 입음. 이세좌라는 사람이 왕의 따르는 술을 흘렸는데 연산군이 이를 보고 빡쳐서 처벌하려고 했으나 참았음. 그러나 이계동이 과일 던진 사건을 신하들이 보고할 때, 이세좌가 술을 흘린것은 제대로 보고도 안하면서 왜 이세좌를 보고하냐면서 열받음. 연산군은 신하들이 자신보다 이세좌를 무서워한다는 생각에 빠져 이세좌를 숙청하게 되고 이세좌가 자신의 어머니(폐비윤씨) 죽음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고 사건이 폐비윤씨 사사사건으로 번지게 되어 많은 선비들이 죽게 되는데 여기서 화를 크게 입은 것은 훈구세력들임



연산군이 이러한 사화를 터트린 이유는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해서임. 그러나 무리하게 왕권 강화를 한 후 이러한 왕권을 이상한 데 썼기 때문에 결국 신하들에 의해 폐위당한 사건이 바로 중종반정임. 중종은 즉위하면서 연산군의 사화를 비판했고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신하들에게 공신책봉을 해주니 이게 훈구파의 세대교체임.

원래 사림파였던 신하들이 훈구파가 되었고 또 훈구파와 사림파의 견제가 시작됨


3. 기묘사화

중종은 훈구파가 너무 쎈 나머지 또 사림파들을 등용하게 되는데 가장 유명한게 조광조임.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파들은 왕을 응디뒤에 두고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만약 왕이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면 떄려치운다면서 오히려 역으로 압박을 했고 마지못해 중종은 이를 허락해주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음. 그러나 사림파들이 선을 넘을 사건이 바로 위훈삭제임. 공신책봉을 지운다는 소리와 같아 왕과 훈구파를 광역도발한 사건임. 중종도 반대했으나 결국 찬성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1년뒤에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들을 대거 숙청했다는 기록임. 즉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알 방도가 없음.

후대에 와선 나뭇잎 ㅇㅈㄹ하면서 중종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사실 전부 구라고 공신들과 사림세력 중 공신세력을 선택했다는 것이 결과임



4. 을사사화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 명종이 차례대로 즉위하는데 이 시기가 바로 대윤세력(장경왕후 윤씨) vs 소윤세력(문경왕후 윤씨)가 나눠서 싸운 시기임. 대윤세력은 인종을 추대했고 소윤세력은 명종을 추대했음. 처음에는 대윤세력이 승리해 인종이 즉위했으나 빨리 뒤져서 소윤세력이 추대하는 명종이 즉위함. 이 시기를 세도정치라고 볼 수 있음. 소윤세력이 승리해서 대윤세력을 쫓아냈고 이때 선비들은 각 세력에 붙기만 했지 주도적으로 뭘 한게 없었음. 그러나 각 세력에 붙었다는건 이 싸움에 연루됐다는 소리와 같고 결국 선비들은 이 싸움에서 많이 죽게되니 이게 을사사화임.


이후 문경왕후 윤씨 집안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윤원형일파가 이때 많은 정치권을 휘둘렀다고 전해짐. 그리고 윤원형일파가 죽고 난 후 명종이 드디어 뭘 해보려고 했는데 명종도 빨리 뒤져서 대가 끊어짐. 즉, 명종은 아들이 없었음


이렇게 되면 명종의 아내가 정계를 잡게 되는데 바로 인순왕후 심씨 집안임. 인순왕후 심씨 집안은 다음 왕을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생겼고 찾고 찾아서 자신의 가문에 제일 좋을(쉽게 말해 제일 멍청해보이는) 사람을 선택했는데 바로 선조임. 선조는 적장자가 아니였고 인순왕후 집안이 골랐으니 결국 세도정치 시기라고 하면서 당시 유학자들은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음. 선조가 즉위한 후 인순왕후 집안이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선조가 정치적 역량을 뽐내고 인순왕후 심씨 집안을 견제하게 되면서 수렴청정은 6개월 만에 끝나고 선조가 왕권을 되찾았음.


선조는 본격적으로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게 되는데 이때 정계에 진출한게 이황, 이이 등임. 죽, 유명한 유학자들은 선조가 거의 다 등용시켰다고 보면됨. 세도정치를 주장하는 세력은 이미 을사사화로 인해 다 처단되어서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세력들만 남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정계에 훈구파는 사라지게 됨. 그러나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사람파 집단 내에서도 의견 차이가 생겨나니 이게 조선이 망한 이유로 찝힌 붕당정치임.


첫 번째 붕당이 생겨난 지점이 바로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생긴 대립임. 이조전랑 자리는 그야말로 재야추천권, 세습권, 행정권 등 엄청난 권력이 있는 자리였음. 그러나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게 옳냐로 시작해서 김효원 vs 심의겸으로 놓고 선비들이 대립했음. 심의겸은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이였음.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황을 필두로 한 동인,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이를 필두로 한 서인이였고 선조는 심씨 집안을 매우 싫어했기에 결국 김효원이 차지하게 됨. 그리고 정계의 주도권은 동인이 잡게됨


그러나 서인쪽에서 터트린 정여립 모반 사건이 문제가 됨. 정여립이 원래 이이에 붙은 서인세력이였다가 이이가 죽으니까 동인에 붙었다고 누군가가 실체없는 소문을 퍼트려 서인이 이걸 빌미로 동인들을 공격하고 당시 선조는 군사부일체를 근거로 정여립이 왕인 나까지 비판하는거 아니냐면서 유배를 보내게 됨. 그리고 정여립은 유배지에서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과 함께 칼맞아 죽음.

서인은 이 사건으로 동인들을 숙청하려 했고 여기에 앞장선게 바로 정철임. 정철은 동인세력들을 전부 죽였으니 이 사건을 우리는 기축옥사라고 함.

이후 선조가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건저의사건이 발생하게 됨. 세조가 신하들에게 세자로는 누굴 하는게 좋냐고 물어봤는데 이때 정철이 광해군을 지목함.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을 싫어했고 정철을 유배보내서 또 서인세력들이 힘이 빠지고 정계를 동인이 잡게 됨. 동인 내에서 서인세력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차이가 존재했으며 서인세력들에게 복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북인 vs 복수를 하면 안된다는 남인으로 쪼개짐. 그러나 1년뒤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이 사이에 임진왜란이 터짐. 조선을 시기로 나눌때의 분기점이 바로 임진왜란이며 임진왜란이후를 우리는 조선후기라고 일컬음


임진왜란은 임진년(1592)에 왜놈들이 난을 일으켰다해서 임진왜란임. 정유재란도 정유(1597)년에 다시 난을 일으켰다해서 정유재란


임진왜란 이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란한 상황이였던 전국시대를 통일했음. 그리고 옆을 둘러보니 조선이 있어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으나 그 사이에 있던 대마도는 조선에게 조공을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아주 큰 의역(?)을 하게 됨. 조공을 바치라는건 속국이 되라는 것이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하는 건 화친관계를 맺자는 의미임. 그러나 이전에 조선이 일본에 파병한 통신사가 자꾸 못돌아오니까 통신사 파견을 아예 끊어버렸던 적이 있음.

조선은 싫어했지만 통신사를 파견했고 황윤길(서인), 김성일(동인)으로 파견했고 일본은 조공을 바치러 온줄 알고 푸대접을 했음. 이후 통신사들은 조선에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낌새가 보인다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당시 붕당정치로 인해 완전 정반대로 말해버렸고 상반된 주장을 펼친것을 본 선조는 판단할 수 없다면서 덮어버림.

1년뒤 일본이 침략해오는데 처음에 선봉부대 3개가 배를 이끌고 부산에 들어왔고 당시에 화친관계를 맺은걸로 착각했던 조선은 이들을 프리패스시켜줌. 이게 처음에 막지 못한 이유였고 이 시기부터 왜놈들을 믿으면 안된다는 속설이 퍼지게 됨.

일본이 요구한건 정명가도임. 명나라를 칠 수 있게 조선은 비켜주라는 것임. 그러나 명나라와 군신관계였던 조선은 이를 허락해줄리가 없었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게됨. 임진왜란때 일본의 목적은 빠르게 전쟁을 끝내기 위해 왕을 생포하는 거였음


일본이 부산에 상륙한 후 부산을 빠르게 함락시켰고 냅다 한양으로 돌격함. 이 사이에 펼쳐진 전투가 상주전투, 충주전투였음. 상주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당시 일본군의 부대를 보고한 사람이 일본군의 숫자를 적게 보고한 것이 원인이였음. 즉, 소수의 군대를 보낸 전투였고 여기서 이일장군은 죽고 상주전투는 패배했고 바로 다음에 신립이 한양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충주전투가 펼쳐졌음.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전황을 파악했고 여기서 정예부대가 괴멸되었고 신립은 운지해서 죽었으니 여기가 바로 탄금대임.


냅다 한양으로 돌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가 바로 피신(몽진)했으며 이게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첫 번째 이유임. 자신들의 목적을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일본군은 함양을 함락시켰음. 그리고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했으며 이를 알고 일본군은 평양으로 냅다 뜀. 그러나 선조는 평양에서 또 의주로 몽진했음. 이 사이에 터진게 바로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임. 한산도대첩의 결과로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섬나라 특성상 일본군은 배를 통해 보급을 해야 했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선봉부대만 한반도에 있었고 본대는 한반도에 전부 상륙하지도 않은 상태였음. 그래서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게 되어 임진왜란이 전황을 바꾼 두 번째 이유가 바로 한산도대첩으로 보급을 끊은 것임


선조는 의주에서 중국으로 넘어갈까말까 고민했는데 이게 선조가 비판을 먹는 이유임. 결국 가진 않고 광해군을 세자책봉했으며 명나라 군대가 이 시기에 참전하게 됨. 당시 명나라 황제는 희대의 암군이였던 만력제였으나 조선에 파병만큼은 승인을 했음. 그리고 터진 전투가 제1차 평양성전투였고 비록 조명연합군은 패배했으나 보급이 끊긴 일본군은 치명적이였고 보급을 충당할 방법으로 약탈을 시작했음. 그래서 이 시기에 대거 의병활동이 일어났으며 결국 자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다는 것


의병으로 보급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일본군은 바빠졌고 눈에 들어온건 바로 평야지역(충청도, 전라도)임. 그러나 평양에서 평야지역으로 가기 위해선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방법과 산맥을 피해 경상도 밑쪽에서 돌아오는 방법이 있음.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방법은 권율의 이치전투로 막혔고, 경상도 밑쪽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제1차 진주성전투(김시민)로 막혀서 보급을 충당할 수 없게 된 일본군은 고립되었음


이후 제2차 평양성전투로 일본군대는 사실상 궤멸되었고 평양에서 한양으로 쫓겨났으며 이후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한양에서조차 쫓겨나며 최초의 지역이였던 부산으로 밀려나가고 이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시작됨. 이 시기부터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상태였지만 조선과 일본은 휴전상태가 아니라 작은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 시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조선이 패배해 결국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 뚫리게 됨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은 일본측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파기되고 다시 전쟁이 터지는데 이 시기를 정유재란이라고 함

그러나 정유재란이 터지던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였고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였음. 이순신은 이때 조정에 끌려가 정신교육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붕당정치로 인해 모함을 받았으며, 이몽학(의병이였는데 임진왜란이후 도성증축으로 인한 피로감때문에 난을 일으킴)의 난 때문에 선조는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이순신이 자신이 부하가 일으킨 부산왜영방화사건을 조정에 보고했으나 이를 조사해보니 허위라는게 밝혀져 허위보고를 한 형식이 됐으며 조정은 이순신을 믿지않게 됐으며, 선조가 이순신보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 전쟁하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신중하게 병력만 쌓아 선조가 결국 야마돌아 이순신보고 조정에서 정신교육 받으라고 하게 됨. 정신교육이 끝난 후 이순신이 다시 전라도에 내려가는 길에 터진게 바로 정유재란임


정유재란은 칠천량해전으로 시작하는데 이순신이 쌓은 병력을 원균이 지휘하다가 다 궤멸당하고 원균은 죽은 후에 12척밖에 남지 않게 됨. 이미 평야지역에 도달한 일본군은 냅다 한양으로 뛰는데 이 길목을 막은 전투가 바로 직산전투임. 일본군은 직산전투에서 패하고 주춤해 있을때쯤 명량대첩이 터지고 또 일본군은 이순신에 의해 수군이 궤멸당하고 보급이 끊기게 됨. 전황이 엄청 불리해진 일본군은 역돌격을 지시했고 전부 부산으로 모여서 런하자는 계획을 세움. 그러나 이를 눈치챈 조명연합군은 일본왜성(순천, 사천, 울산)이 있는 지역을 공격하게 되고 순천에서는 이겼으나 사천, 울산에서 패배해 정상적으로 배를 타고 도망가기 직전이였음. 이 역돌격하는 일본군을 쫓아간 전투가 바로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임. 결국 일본군의 30%만 탈출에 성공했고 나머지는 싹다 궤멸당하고 정유재란까지 끝났음



정유재란이 끝나고 이후 광해군을 필두로 한 북인세력들이 정권을 잡게 됨. 사실 선조는 광해군을 그렇게 좋게 보질 않았으나 전시상황임을 고려해 가장 똑똑해보였던 광해군이 지목된 것이였음. 그러나 광해군은 형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선조는 전쟁이 끝난 직후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 부인이 인목대비임. 인목대비와 선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영창대군이고 선조는 인목대비를 왕후책봉해서 광해군은 적장자 계승원칙을 완벽히 벗어난 세자가 되었음. 설상가상으로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명나라는 광해군을 인정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광해군이 왕이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세운 공 하나였음. 그래서 광해군은 불안감에 휩싸였던 상태였음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제일 먼저 했던건 바로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임. 그래서 자신의 형을 죽여 자신이 장자가 되었고, 계축옥사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세력들을 전부 죽여서 불안감을 해소시켰으나 이후 이 사건을 폐모살제라고 하여 자신이 폐위될 때 표면적인 명분이 됨


계축옥사의 시작은 강변칠우(왕이 되지 못하는 왕족)의 도적질이였음. 그러나 이 사람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반란을 꾀했다는 증언을 듣고 그 실체를 인목왕후의 아버지였던 김제남으로 지목함. 이 사건을 강제로 크게 만들었고 김제남은 처형하고 인목왕후를 내쫓았으며 영창대군을 유배보냈음. 영창대군은 결국 죽고 내부의 불안감을 해소했으나 이때 당시 윗지방은 명청교체기였음. 이게 광해군의 발목을 잡아버려 결국 폐위되는 비운의 왕으로 남게 됨.



광해군은 집권한 후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당대 유학자들은 이런 것에 좆도 관심없었음. 명나라는 후금과 싸우다가 부족해진 나머지 조선에 제 1차 파병요청을 했고 광해군은 이때 조선의 상황을 고려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유학자들은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무조건 파병해야한다고 주장했음. 결국 있는군대 다 끌어모아 1만 3천명 파병을 했으나 대장으로 나선 강홍립에게 피해 안보게 하라면서 말을 했음. 그래서 후금에게 항복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꼴통유학자들은 강홍립을 처벌해야한다고 말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거절함. 이 소식이 명나라에도 퍼졌고 명나라는 후금에 항복을 했다는 조선의 소식에 조선을 약간 불신하게 되었고, 후금은 명과 조선의 관계를 알아채는 결과가 나옴. 결국 파병이 조선을 악몽으로 몰아넣은 선택이였음


이후 명나라는 또 다시 파병요청을 하였고 이때도 광해군은 파병을 반대했고 대부분의 신하들은 파병을 찬성했음. 결국에는 파병이 안되긴 했지만 이를 신하들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명분으로, 위의 폐모살제와 같이 엮어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즉위시켰으니 이게 바로 인조반정임.


즉위한 인조는 신하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으나 당시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중이였음. 이때 후금은 인조에게 후금을 선택할 것인지 명을 선택할 것인지 한 통의 편지를 보냄. 그러나 현실은 후금이지만 결국 명나라를 선택하게 되고 이게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는 첫 번째 원인이 됨.

둘 째로 모문룡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몰래 숨어들어와서 후금을 뒤에서 습격하는 전략을 펼쳤음.

셋 째로 후금의 첫 번째 왕이였던 누르하치가 16만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 전투를 펼쳤으나 7천명밖에 안되는 명나라 군대에게 대패했고 누르하치는 죽어버림. 그리고 홍타이지가 두번째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미 민심과 더불어 식량난이 생겼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옆에 있던 조선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음

넷 째로 이괄의 난이 있었는데 이괄은 인조반정에 도움을 준 무신이였음. 그러나 이괄에게 무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신책봉을 짜게 줬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이괄은 평안도지역 군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쳐들어가게 되는데 자기 부하에게 칼맞고 죽어버리면서 제압은 되었음. 그러나 여기에 가담했던 홍윤이라는 사람이 도망쳐서 이를 후금에게 일러바치게 됨. 이러한 원인들이 겹쳐서 정묘호란이 터지게 됨.


정묘호란은 사실 조선에게 식량뜯어내고 위협목적으로 하는 거라 3만대군에 홍윤과 강홍립을 길잡이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후금과 조선의 길목에 있는 지역이 바로 평안도지역임.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지역의 군대는 없었고 결국 프리패스가 되버어림. 그 후 후금은 협상을 시도하게 되고 조선은 여전히 수구꼴통들이 많은 나머지 현실파악을 못한 채 유학적 가치관만을 쫓고 있었음. 그래서 자꾸 협상을 거부했고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점점 후금의 군대는 내려오게 됨. 결국 보다못한 나머지 강홍립이 협상해야한다고 조선에 말하자 그제서야 협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맺은 협약이 바로 정묘약조임. 후금의 요구사항은 간단하게 <식량주고 우리와 관계 맺고, 모문룡 내보내고, 명과의 관계 끊을 것>임. 그러나 조선은 요구사항이 많았고 가장 문제가 되는게 바로 <후금과 관계를 맺어도 명과 조선의 관계는 지속할 것>임. 이게 훗날 병자호란의 원인이 됨



식량난을 해결한 후 후금은 명과 전쟁하며 명을 벼랑끝까지 몰게 되는데 벼랑끝이 바로 만리장성 산해관이였음. 그러나 산해관은 아주 튼튼했고 후금도 이를 알기에 무리하게 쳐들어가지 않고 다시 목적지를 조선으로 바꿈. 후금은 이때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신들을 황제국이라 칭했음. 조선 입장에선 황제국이 두개나 되는 것임.


청은 조선에게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우리와 군신관계를 맺으라고 서신을 보냈고 조선 조정은 이를 두고 주화파(청나라를 인정하자) vs 척화파(무조건 명나라)로 나뉘게 됨. 인조는 어디를 선택할지 우왕좌왕했고 결국 끝에선 주화파를 선택했으나 편지가 청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청나라 13만 군대에 황제 홍타이지까지 밀고 들어오게 되니 이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임.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뚫렸고 인조 등의 신하들은 남한산성, 종묘사직 등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음. 인조는 정묘호란때를 생각하며 남한산성까지만 피신했는데 이게 잘못된 선택이였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눈보라가 몰아쳐 피신을 못했고 결국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의 WWE를 끝으로 항복하게 됨. 이때 남한산성에서 버티고 버텨서 지방의 군대가 자신을 도와줄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싹다 각개격파당했고 강화도까지 함락됐다는 소식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선언을 하게 됨. 하지만 남한산성 내부에서 여전히 주화 vs 척화를 놓고 싸우니 얼마나 유학자들이 현실감각이 없는지를 잘 알수 있게됨

청나라는 삼전도비를 세우고 명나라에게 하던 삼궤구고두례를 청나라에게 하라고 지시했으며 조청화약을 맺어 완전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됨. 이후 소현세자 등 왕족들은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고 병자호란이 끝나게 됨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고 중원세력은 청나라밖에 남지 않게됨. 그래서 조선의 유학에서는 기존의 유학적 관점이라면 청나라를 사대해야하는게 맞지만 차마 오랑캐에겐 사대를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이때부터 유학은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졌고 쓸데없는걸로 싸우게 되는 상황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예송논쟁임.

이때 조선의 유학은 근거를 남송때의 주자에게서 영감을 얻어 소중화사상(명나라가 멸망했으나 사대관계였던 우리가 중원세력을 잇자)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됨


또 전쟁의 여파로 인해 나왔던게 바로 환향녀 문제임. 전쟁포로는 여자가 대부분이였는데 이들은 포로로 끌려가 험한 짓을 당했고 돌아왔을때 순결을 잃었다면서 남자들에게 이혼소송을 받게 됨. 그러나 선조와 인조는 이를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바로 자신들의 전쟁을 일어나게 한 장본인이였기때문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승인을 안해준 것. 하지만 이혼소송이 안먹혀도 남자들은 첩을 두어 원래 아내는 고립되었으며 이 수가 너무 많아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임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왕이 될 운명이였지만 소현세자가 돌아와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게 화근이 되었음. 청나라에게 영혼까지 털린 인조와 신하들앞에서 이런 말을 했으니 심기가 불편했으며 결국 2개월뒤에 죽게 되고 소현세자의 동생이 왕이 되니 그게 효종임. 효종은 북벌론을 주장했으나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조청화약때 성 증축하지말고 병력 쌓지말라고 청나라에게 요구당했기 떄문에 할 수 있는게 없었음


그리고 효종 사후 현종때 나왔던 문제가 바로 예송논쟁임.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를 놓고 남인과 서인세력이 싸웠는데 이게 예송논쟁의 시발점임. 서인은 효종을 차자로 봤기 때문에 1년상을,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봤기 때문에 3년상을 주장하지만 이때 현종이 즉위한 시점이라 서인이 힘이 강력했으며 결국 서인의 주장인 1년상을 채택함. 이게 갑인예송


두 번째 예송은 현종 말기에 나왔던 기해예송이며 이도 저 문제의 연장선상이였던 효종의 아내 인선왕후의 상을 9개월(서인)이냐 1년(남인)이냐를 놓고 싸운 것임. 그러나 현종 말기는 왕권이 있었기 때문에 남인의 주장을 택해 1년상을 택했음


이후 즉위한 왕이 유학의 정통성면에서 아주 완벽한 숙종임. 숙종은 외척세력이 없어 위협될 만한 사람이 없었음. 게다가 유학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으니 왕의 말이 곧 유학이 되었고 이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음.

숙종 때 강력한 왕권을 보여줬던 게 정종과 단종에게 묘호를 붙여준 것임. 그리고 환국정치가 강력한 왕권의 정점이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환국정치때문에 조선의 혼란은 가속화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임.


환국은 왕이 붕당을 입맛대로 바꾸는 것이며 총 3번의 환국이 일어남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1. 경신환국

숙종 즉위 직전 현종과 숙종의 공백기를 메꾼 세력은 바로 남인이였음. 보통 수렴청정을 하지만 숙종은 워낙 강력한 왕권이여서 이런 방식을 채택했으며 숙종 초기 주도권은 남인이 쥐고 있었음.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는 서인세력이였고 그 자는 명성왕후였음. 이 서인세력이 남인들보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면서 헛소문을 퍼트리게 되고 숙종이 이를 조사하라고 지시했지만 무고임이 밝혀짐. 여기에 가만한 자가 명성왕후의 아버지였던 김우명이였어서 명성왕후는 제발 처형하지 말아달라면서 숙종에게 빌었고 이를 남인들이 듣고 어머니 간수좀 하라며 숙종의 심기를 건드리게 됨

그리고 남인이 군사권, 행정권 등 갖가지 권한을 다 가지게 되는 상황이 생기며 서인이 이를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결국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을 숙청하여 그 자리를 서인으로 맞춰버림


2. 기사환국

이후 숙종은 자신의 아내가 죽어버렸는데 문제가 딸만 둘이고 아들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서인세력들은 인현왕후를 왕후로 내세우게 되어 알박기를 시도했지만 숙종과 인현왕후와의 관계를 좋지 않았고 오히려 궁녀였던 장희빈과 사이가 좋았음. 서인들은 불안해하며 지내고 있을 무렵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서인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왕 앞에서 드러내게 되고 이게 두 번째 기사환국의 원인이였음. 첫 번째는 예송논쟁때 자신의 조상이였던 효종을 차자라고 주장했다는 점

세 번째로는 장희빈이 아들을 낳고 장희빈의 엄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한다며 8인 옥교를 타고 건너오라고 했는데 이때 서인세력들이 이를 알고 막아섰다는 것임. 이게 바로 옥교사건. 숙종은 이를 알고 화를 냈고 서인들은 뻔뻔하게 가마법을 근거로 들어 정당하게 막았다고 주장함. 하지만 당시 가마법은 있으나마나한 법이여서 제데로 지켜지지 않았기에 왕권에 도전한다는 소리와 같았음


결국 갖가지 원인들로 인해 서인세력들은 숙청당하고 장희빈은 왕후로 승격됨. 그리고 남인들이 또 다시 정계에 진출함



3. 갑술환국

남인들이 정계에 들어왔음. 그러나 남인세력들이 공작을 위해서 장희빈의 모친 무덤을 훼손하고 이를 서인세력에게 덮어씌우려고 한 것 때문에 첫 번째의 불신이 생겼고, 이후 인현왕후가 첫 째 부인이 죽은 이유를 장희빈이 저주해서 그런거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또 남인들은 대거 밀려나게됨.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장희빈을 왕후에서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후책봉되었으며 서인세력들이 또 집권하게 됨. 그리고 궁녀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법을 시행해서 다시는 첩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림.

갑술환국은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데 아마 장희빈과 숙종의 사이가 안좋았던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평가중임


숙종 다음 즉위한 것은 장희빈이 낳은 남자아이로서 바로 경종임. 재위기간은 4년밖에 안되지만 영조에게 성공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게 되고 영조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게 되니 이게 탕평책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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