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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에 도쿄 죠죠지에서 사람 압박파티한 이야기
이날은 여행 첫날인 12월 31일.첫 개인여행이자 첫 일본여행이라 기대와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이때 나는 새해를 의미있게 맞이하기 위해 무조건 제야의 종을 보겠다고 마음먹고약 2주간 여행 중 단 첫 날만 묵을 숙소를 도쿄 유명 절(이라고 들은) '조조지' 가 있는 '하마마쓰초'에 잡았다.체크인하고 짐을 풀고 나니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긴장이 싹 풀려,근처 이자카야에서 인생 첫 오토시도 내 보고여유롭게 조조지로 향했는데...다른 절인 센소지가 그렇듯이,여기도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부터 대문을 세워 놓고거기부터 북적이는 분위기가 흥을 돋구는 게 좋았다.엄청난 인파를 보기 전까진..횡단보도에서 5분간, 사람 사이에서 신음하며 걸으니 어느새 윗 사진의 위치까지 도달했다.저기가 배전이면 가서 참배하고 동전 던지면 되나..? 라고 생각이 드는 위치지만(한 시간 전에 한 번 미리 와 봤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아 실제로 해 볼 수 있었다)지금은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느낌상 종을 치는 곳은 여기.앞의 아마사케 홍보 깃발이 뷰를 다 이지러뜨리긴 하지만내 앞의 사람들도 다 제야의 종을 보러 나보다 일찍 온 사람들이라비집고 들어갈 상황은 아니고..그냥 기다리기로 했다.이때 핸드폰 배터리는 15퍼시각은 11시 35분약 25분간 .. 일본인이 된 기분을 느껴보기로 했다(이 날의 충격은 이후 1월 1일 아키하바라에 갔을 때 다시 느끼게 된다)박스에 올라선 테레비 카메라맨이 이쪽을 보면 환호하고..저기 뒤에 보라색 천으로 둘러싸인 곳에 종이 있는데 거기에 주자가 등판할 때까지는이런 식으로 하염없이 기다렸다.다음 날 아침 찾은 사람 줄어든 깔끔한 조조지는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었으나, 사람 사이에 낑긴 이 때 당시에는상황이 즐겁다기보다 약간 우스웠다.구글 리뷰로는 진행자가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퀴즈쇼도 한댔는대?그게 재밌댔는데?하지만 진행자는 없고, 대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오신 경찰이 무척 많았다.오후 11시 44분. 스님이 등장하신다.일본의 제야의 종(원조)은 108번뇌를 씻기 위해 스님이 종을 108번 친다고 한다.지금부터 치는 거는 아니고, 약 11시 59분 30초부터 치기 시작하셨다.아나운서의 퀴즈쇼는 커녕, 공포 분위기 브금 삘 나는 삑사리 리코더 소리였지만..그래도 새해를 곧 여기서,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맞는다는 생각에 분명 들떴던 것 같다.스님끼리 법전인지 대본인지를 주고받고, 더 읽고, 또 인사하고, 들어갔다 나오다가종을 치고, 옆의 공원에서 벌룬을 확 풀어 버렸는데종을 보려고 모였을 사람들의 이목이 다 하늘의 풍선으로 쏠렸다.이때가 108번 중 5번째 타종이었을 즈음인데, 딱 새해 정각에 맞춰 풍선이 하늘로 쏟아지는 게 상징성이 대단해서 나도 좀 기뻤다.스님이 9번째 종을 칠 때쯤 인파가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나가야겠지?이 때 잠시, 타종이라는 메인 퍼포먼스를 맡은 스님이, 벌룬에 이목도 빼앗기고 이윽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갈 때 어떤 기분을 느낄지를 잠깐 생각해 보게 됐다.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어도 피곤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푹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본 조조지는 이 때의 모습보다 몇 배는 아름다웠으니 잘 된 선택이었다)이때가 한국에서 이태원 사건이 터진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이라 진짜 여기서 죽을순 없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에 심혈을 기울이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사람이 너무 몰려 오히려 사먹으러 줄을 설 수가 없는 가게들이 여럿 보였다.제야의 종을 치기 전까지는 많이 들떴지만'종을 쳤으니 뭐 어쩔건데? 나가자!'의 흐름이 되어 금세 흥이 식어 버리니약간 체념감이 올라왔다.다음 날 아침 긴자의 백화점이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과 달리 거의 하나도 열지 않은 것과 더불어, 첫 일본여행에서 느꼈던'도쿄는 속 빈 강정인가' 하는 체념감은1월 2일 센소지에서 느꼈던 활기참과 그날 밤 아키하바라 돈키호테의 쾌적함 (사람 때문에 길을 돌아가야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을 맛보기 전까지는꽤 깊게 마음을 우울하게 했기에웬만해선 제야의 종은 다른 검증된 데서 보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돌아온 호텔 방은 70년대풍의 캡슐 호텔이었다.내부 시설은 미약하게 소리가 나오는 테레비와, 잘 작동 안하는 붙박이 라디오.https://livejapan.com/ko/in-tokyo/in-pref-tokyo/in-akihabara/article-a0000181/ 이 링크에 있는 시설과 똑같았다.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마마쓰초를 걷다가..방문한 조조지는 훨씬 쾌적했다.참배하고, 오미쿠지도 사고, 이후 도쿄 여행에서 한 두번 더 마주치게 되는 원숭이 쇼 아저씨도 봤다.아저씨가 블럭을 쌓으면, 원숭이가 뛰어넘고지금 아저씨가 들고 있는 폴로 스틱같은 걸로 원숭이가 걷는다.쇼를 재미있게 보고 나면, 아저씨가 수금 타임을 가진 뒤, 조금 쉬었다가 다시 공연을 반복한다.은은한 분위기에 이끌려, 어젯밤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도쿄 타워를 방문한다.전날밤 9시 반경 조조지에서 볼 수 있었던 그 강렬한 야경은참 아름다웠다.방문한 4개의 전망대 - 도쿄타워, 도쿄도청, 스카이트리, 시부야 스카이 - 중 전체적인 경험에서 가장 만족했던 전망대였다.(나열한 순서대로 좋았다)전망대에서 유럽인 아재한테, 혹시 후지산이 보이도록 가능한지 물으며 사진을 부탁하니카메라를 내 몸 바로 옆에 밀착시키고 기적의 각도로 후지산을 나와 같은 샷에 넣어주셨던 친절함이 기억에 남는다.1월 1일은 아키바만 붐비고, 긴자는 하염없이 한산한 그런 날이었다.마지막으로, 12월 31일의 추억..홍백에 홍팀 최다 출연횟수 아깝게 못채우셨다던 와다 아키코 여사 (나무위키에서 읽었던 거라 잘 모름)근데 최다 출연횟수를 정말 아깝게 못채웠다! 라고 읽은 게 최소 작년이었는데2023 홍백에 나왔으면 갱신한거 아닌가? 잘 모르겠다사이버펑크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온 일본이 정말 푸르래서 놀랐던 기억을 실은 사진다녀보니 하마마쓰초만 유독 아침이나 밤이나, 창을 통해 보든 직접 밖에서 보든 파란 색깔이 있었다.이 푸르스름한 빛... 청량감까지 주던 이 푸른빛이 도시에 띄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그 때 먹었던 거. 지지난주에 토리키조쿠 갔다오니까 이게 약간 창렬처럼 느껴지긴 하는데 (꼬치만 990엔)그래도 이땐 한국가격이랑 비교했었으니까 괜찮았다.오토시는 조금 쓰렸지만..이외 이야기- 1월 1일 아키바 멜론북스 들어갈려고 일본오타쿠들이랑 2열종대로 줄서서 그룹별로 손들고 입장한 이야기- 1월 2일 천황이랑 안면틀려고 갔다가 못 본 이야기- 1월 2일 고쿄, 마루노우치, 쓰키지시장 다 허탕치고 센소지에서 마리오카트 아재한테 땡큐받은 이야기- 긴자 일루미 아래에서 자전거 뒤 졸졸따라다니며 킥보드탄 이야기- 스톱! 히바리군 전시 방문
작성자 : 뉴비의몸짓발짓고정닉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챔피언 카를 알아보자.
전미 스톡카 경주 협회, NASCAR(통칭 나스카)의 레전드 드라이버인 리처드 페티는 은퇴한 지금은 쌈빡한 카우보이 모자와 깔@롱진 패션으로 유명하지만, 꼬꼬마 시절 디즈니-픽사의 카를 보고 모터스포츠에 입문한 엪붕이들이라면 특유의 유선형 에어로패키징으로 유명한 1970년식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페티의 아이콘 격 차량으로 여겨지는 이 1970년형 플리머스 슈퍼버드는 의외로 리처드 페티의 트로피 진열장에 1970년 나스카 챔피언 트로피를 추가해주지는 못한 차량이다. 그 해 리처드 페티는 40회 출발, 18회 우승, 5위권 27회, 10위권 31회, 폴 포지션 9회로 총 3447 포인트를 따냈지만 출발 횟수와 5, 10위권 진입 횟수에서 밀려 붉은 71번 닷지 차저를 탄 바비 아이작에게 그 해 우승을 넘겨줘야만 했다.그렇다면 페티의 챔피언 카에는 어떤 차량들이 있을까, 알아보기 전에 우선 리처드 페티의 탄생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자.(리처드 페티의 아버지, 리 페티. 그 역시 나스카의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나스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리 페티의 42번 크라이슬러 300)리처드 페티는 1937년 7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 레벨 크로스에서 초창기 나스카 드라이버인 리 페티의 아들로 태어났다.리 페티 역시 나스카에서 알아주던 실력파 드라이버였으며. 흰색으로 도장된 그의 42번 레이스 카는 1954, 1958, 1959년 챔피언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리처드 페티의 첫 나스카 차량, 1957년형 올즈모빌 컨버터블)리처드 페티 역시 아버지인 리 페티의 발자취를 따라 195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짐 미데온 500 레이스에서 나스카에 데뷔했고, 이듬해인 1959년에는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는 슈퍼루키로 자리잡는다.그리고 그의 7챔 전설은 1964년 나스카부터 시작된다.1. 전설의 시작,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4년 챔피언)1964년은 리처드 페티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이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는 데뷔 후 1960년부터 꾸준히 탑 3에 이름을 올리며 챔피언을 노리던 페티에게 날개를 달아줬고, 리처드 페티는 2위인 네드 자렛과 6000포인트에 가까운 큰 격차로 압승하며 1964년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최종 기록: 총 포인트 40252포인트, 9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7회, 10위권 진입 43회2. 2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금 챔피언으로, 1967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7년 챔피언)1964년의 첫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 등극 이후, 리처드 페티는 1965년, 1966년 두 시즌을 각각 38위, 2위라는 아쉬운 결과로 마무리하게 된다.(1965년에는 플리머스 바라쿠다를, 1966년에는 플리머스 GTX를 사용했다.)그리고 페티는 이듬해인 1967년, 자신에게 첫 챔피언을 선사해준 64년형 벨베디어의 후속 모델인 67년형 벨베디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아 2위인 제임스 힐튼과 6000포인트 가까운 격차를 보이며 27회라는 압도적인 우승 수를 기록. 42472포인트를 달성해 1967년 챔피언이 된다.최종 기록: 42472포인트, 27회 우승, 1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0회3. 3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르다. 1971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1971년 챔피언)지난 해인 1970년도 우승하지 못했던 작년, 재작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닷지 차저 데이토나와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저격하는 규정으로 인해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리처드 페티는 결국 1970년 시즌을 바비 아이작에게 넘겨주고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됨.하지만 이번 차량은 좀 달랐음, 플리머스 슈퍼버드가 기존 로드러너에 전면 카울과 큼지막한 리어 윙을 달아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본 타입이라면 이번의 신형 로드러너는 차체 형상에 곡면을 적용시킨 디자인으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봤고, 향상된 차량의 성능에 힘입어 리처드 페티는 3년 동안의 우승 공백을 깨고 1971년 챔피언이 됨.최종 결과: 4435포인트, 21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1회4. 2연속 우승은 STP, 닷지와 함께, 1972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 & 1972년형 닷지 차저(새 스폰서인 stp의 도색을 적용한 로드러너, stp 도색은 은퇴할 때까지 함께한다.)1971년 우승에 힘입어 새로운 스폰서인 stp가 붙어 빨간 포인트가 적용된 플리머스 로드러너, 이 외에도 페티는 닷지 차저에도 탑승해 2연속 우승을 차지함. 의외인 점이 있다면 그동안의 우승 차량들은 플리머스 뿐이었지만 특이하게도 1972년에는 닷지 차저도 우승 차량 목록에 포함됨.(1972년 우승에 함께한 닷지 차저, 로드러너와 달리 전면이 분할된 디자인이 특징)1972년 시즌에선 페티는 2위인 바비 앨리슨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8701.40포인트로 8573.50포인트인 바비 앨리슨에 비해 130포인트가량 앞서며 챔피언에 등극함. 우승 횟수는 앨리슨 10회, 페티 8회로 앨리슨이 앞서지만 포인트로는 페티가 앞서 결과적으로는 1972년 챔피언도 페티가 차지하며 2연속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누림최종 결과: 8회 우승, 3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25회, 10위권 진입 28회5. 어게인 1972, 치열한 접전 끝에 5번째 트로피를 거머쥐다, 1974년형 닷지 차저(1974년 챔피언)1972년을 기점에서 차량을 플리머스제에서 닷지제로 갈아탄 리처드 페티는 1973년 시즌에서 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21번 드라이버, 데이비드 피어슨과의 경쟁에서 아쉽게 패해 2등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음. (1973년 나스카 챔피언을 차지한 데이비드 피어슨과 그의 21번 머큐리 사이클론)이듬해인 1974년, 페티는 새로운 라이벌인 케일 야보로를 마주해야 했고 역시나 리처드 페티와 케일 야보로의 경쟁은 전년도의 페티 vs 피어슨같이 치열했음, 칼을 갈고 돌아온 리처드 페티와 새로운 라이벌 케일 야보로의 대결은 결국 리처드 페티의 승리로 끝남, 당시 우승 횟수는 동일했지만 폴 포지션(페티 7회, 야보로 3회) 5위권 진입 횟수(페티 22회, 야보로 21회), 10위권 진입 횟수(페티 23회, 야보로 21회)에서 결정적으로 승패가 갈렸고, 결과적으로는 피말리는 접전 끝에 리처드 페티는 자신이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임을 다시금 증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음.최종 결과: 10회 우승, 폴 포지션 7회, 5위권 진입 22회, 10위권 진입 23회6. 다시 한 번 압도적으로 2연속 챔피언이 되다, 1975년형 닷지 차저(1975년 챔피언)1971년~1972년의 2연속 챔피언 달성과 같이, 페티는 1974년의 우승에 가속을 받아서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 그 결과 1975년에도 나스카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음, 당시 기록을 대조해 봐도 리처드 페티 이외에 10회 이상 우승을 달성한 드라이버는 없었고, 페티는 말 그대로 오벌 트랙을 휘젓고 다니며 2위인 데이브 마시스와 70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렸고, 결과적으로는 강력한 닷지 차저와 함께 2회나 2연속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대과업을 이룸.최종 결과: 4783포인트, 13회 우승, 폴 포지션 3회, 5위권 진입 21회, 10위권 진입 24회7. 마지막 챔피언은 올즈모빌과 함께, 1979년형 올즈모빌 442(1979년 챔피언)1975년의 우승 이후, 리처드 페티는 꾸준히 상위권에 들며 챔피언 경쟁을 계속했지만, 아쉽게도 계속 우승에는 실패하며 1978년까지 우승 공백기를 지내야 했음, 특히 1978년에는 쉐보레 몬테카를로로 차량을 교체해서 챔피언쉽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0회 우승에 6위라는 결과를 내며 탑 10 진입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페티는 포기하지 않았음, 새로운 차량인 올즈모빌 442를 탄 페티는 다시금 분골쇄신해 1979년 나스카 챔피언에 도전했고, 2위인 대럴 월트립과 치열하고 열띤 경쟁 끝에 마침내 4830포인트 대 4819포인트로 11포인트 차이로 격전 끝에 생애 마지막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데 성공함, 이 때 페티는 우승 횟수에서 5회로(월트립은 7회), 폴 포지션에서는 1회로(월트립은 5회) 월트립에게 밀렸지만 5위권 진입 23회(월트립은 19회) 10위권 진입 27회(월트립은 22회)로 포인트 벌이에서 앞서는 전략적 승리로 노익장을 과시했음. 참고로 또 다른 나스카 레전드인 데일 언하트는 이 해 7위를 달성하며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함. 또한 아들인 카일 페티가 그 해 탈라데가 500에서 데뷔하며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 리 페티와 함께 달렸듯이, 이번에는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가 되어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나스카에서 달리기 시작함.최종 결과: 4830포인트, 5회 우승, 폴 포지션 1회, 5위권 진입 23회,10위권 진입 27회번외. 길고 긴 커리어를 마치다.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은퇴)(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경기를 함께한 차량,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우승, 1984시즌 파이어크래커 400)1984년 데이토나에서 열린 파이어크래커 400에서의 마지막 우승을 마치고, 그 이후에도 페티는 꾸준히 나스카에 참가하며 비록 순위는 떨어졌을지언정, 꾸준히 중위권을 달성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음,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페티도 피해갈 수 없었고, 페티는 1992시즌 후터스 500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함.(리처드 페티의 은퇴 경기였던 후터스 500의 포스터, 우리가 아는 그 레스토랑 후터스 맞다)당시 페티의 은퇴 경기에는 16만 2천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들이 몰렸고, 페티는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생애 마지막 나스카 레이싱을 시작함.하지만 안타깝게도 95랩에서 45번 차량의 리치 버클이 페티의 43번 폰티악 그랑프리와 충돌했고, 페티는 생애 마지막 나스카 경기를 완주하지 못하고 리타이어하고 말았음. (리타이어한 리처드 페티, 리처드는 얼마나 슬펐을까?)(관중들에게 환호받는 페티)그렇지만 그가 최고의 나스카 레이서라는 건 변하지 않았고, 그날의 후터스 500 경기에서 수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그렇게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커리어는 화려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음.오늘은 나스카의 레전드 리처드 페티가 탄 챔피언 카+번외를 알아보았다.이 정보가 유익했으면 하며, 나스카 팬도 많아지길 바람!틀린 정보 댓글로 달아주면 환영함
작성자 : dcroffj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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