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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챔피언 카를 알아보자.
전미 스톡카 경주 협회, NASCAR(통칭 나스카)의 레전드 드라이버인 리처드 페티는 은퇴한 지금은 쌈빡한 카우보이 모자와 깔@롱진 패션으로 유명하지만, 꼬꼬마 시절 디즈니-픽사의 카를 보고 모터스포츠에 입문한 엪붕이들이라면 특유의 유선형 에어로패키징으로 유명한 1970년식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페티의 아이콘 격 차량으로 여겨지는 이 1970년형 플리머스 슈퍼버드는 의외로 리처드 페티의 트로피 진열장에 1970년 나스카 챔피언 트로피를 추가해주지는 못한 차량이다. 그 해 리처드 페티는 40회 출발, 18회 우승, 5위권 27회, 10위권 31회, 폴 포지션 9회로 총 3447 포인트를 따냈지만 출발 횟수와 5, 10위권 진입 횟수에서 밀려 붉은 71번 닷지 차저를 탄 바비 아이작에게 그 해 우승을 넘겨줘야만 했다.그렇다면 페티의 챔피언 카에는 어떤 차량들이 있을까, 알아보기 전에 우선 리처드 페티의 탄생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자.(리처드 페티의 아버지, 리 페티. 그 역시 나스카의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나스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리 페티의 42번 크라이슬러 300)리처드 페티는 1937년 7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 레벨 크로스에서 초창기 나스카 드라이버인 리 페티의 아들로 태어났다.리 페티 역시 나스카에서 알아주던 실력파 드라이버였으며. 흰색으로 도장된 그의 42번 레이스 카는 1954, 1958, 1959년 챔피언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리처드 페티의 첫 나스카 차량, 1957년형 올즈모빌 컨버터블)리처드 페티 역시 아버지인 리 페티의 발자취를 따라 195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짐 미데온 500 레이스에서 나스카에 데뷔했고, 이듬해인 1959년에는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는 슈퍼루키로 자리잡는다.그리고 그의 7챔 전설은 1964년 나스카부터 시작된다.1. 전설의 시작,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4년 챔피언)1964년은 리처드 페티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이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는 데뷔 후 1960년부터 꾸준히 탑 3에 이름을 올리며 챔피언을 노리던 페티에게 날개를 달아줬고, 리처드 페티는 2위인 네드 자렛과 6000포인트에 가까운 큰 격차로 압승하며 1964년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최종 기록: 총 포인트 40252포인트, 9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7회, 10위권 진입 43회2. 2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금 챔피언으로, 1967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7년 챔피언)1964년의 첫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 등극 이후, 리처드 페티는 1965년, 1966년 두 시즌을 각각 38위, 2위라는 아쉬운 결과로 마무리하게 된다.(1965년에는 플리머스 바라쿠다를, 1966년에는 플리머스 GTX를 사용했다.)그리고 페티는 이듬해인 1967년, 자신에게 첫 챔피언을 선사해준 64년형 벨베디어의 후속 모델인 67년형 벨베디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아 2위인 제임스 힐튼과 6000포인트 가까운 격차를 보이며 27회라는 압도적인 우승 수를 기록. 42472포인트를 달성해 1967년 챔피언이 된다.최종 기록: 42472포인트, 27회 우승, 1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0회3. 3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르다. 1971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1971년 챔피언)지난 해인 1970년도 우승하지 못했던 작년, 재작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닷지 차저 데이토나와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저격하는 규정으로 인해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리처드 페티는 결국 1970년 시즌을 바비 아이작에게 넘겨주고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됨.하지만 이번 차량은 좀 달랐음, 플리머스 슈퍼버드가 기존 로드러너에 전면 카울과 큼지막한 리어 윙을 달아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본 타입이라면 이번의 신형 로드러너는 차체 형상에 곡면을 적용시킨 디자인으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봤고, 향상된 차량의 성능에 힘입어 리처드 페티는 3년 동안의 우승 공백을 깨고 1971년 챔피언이 됨.최종 결과: 4435포인트, 21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1회4. 2연속 우승은 STP, 닷지와 함께, 1972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 & 1972년형 닷지 차저(새 스폰서인 stp의 도색을 적용한 로드러너, stp 도색은 은퇴할 때까지 함께한다.)1971년 우승에 힘입어 새로운 스폰서인 stp가 붙어 빨간 포인트가 적용된 플리머스 로드러너, 이 외에도 페티는 닷지 차저에도 탑승해 2연속 우승을 차지함. 의외인 점이 있다면 그동안의 우승 차량들은 플리머스 뿐이었지만 특이하게도 1972년에는 닷지 차저도 우승 차량 목록에 포함됨.(1972년 우승에 함께한 닷지 차저, 로드러너와 달리 전면이 분할된 디자인이 특징)1972년 시즌에선 페티는 2위인 바비 앨리슨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8701.40포인트로 8573.50포인트인 바비 앨리슨에 비해 130포인트가량 앞서며 챔피언에 등극함. 우승 횟수는 앨리슨 10회, 페티 8회로 앨리슨이 앞서지만 포인트로는 페티가 앞서 결과적으로는 1972년 챔피언도 페티가 차지하며 2연속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누림최종 결과: 8회 우승, 3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25회, 10위권 진입 28회5. 어게인 1972, 치열한 접전 끝에 5번째 트로피를 거머쥐다, 1974년형 닷지 차저(1974년 챔피언)1972년을 기점에서 차량을 플리머스제에서 닷지제로 갈아탄 리처드 페티는 1973년 시즌에서 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21번 드라이버, 데이비드 피어슨과의 경쟁에서 아쉽게 패해 2등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음. (1973년 나스카 챔피언을 차지한 데이비드 피어슨과 그의 21번 머큐리 사이클론)이듬해인 1974년, 페티는 새로운 라이벌인 케일 야보로를 마주해야 했고 역시나 리처드 페티와 케일 야보로의 경쟁은 전년도의 페티 vs 피어슨같이 치열했음, 칼을 갈고 돌아온 리처드 페티와 새로운 라이벌 케일 야보로의 대결은 결국 리처드 페티의 승리로 끝남, 당시 우승 횟수는 동일했지만 폴 포지션(페티 7회, 야보로 3회) 5위권 진입 횟수(페티 22회, 야보로 21회), 10위권 진입 횟수(페티 23회, 야보로 21회)에서 결정적으로 승패가 갈렸고, 결과적으로는 피말리는 접전 끝에 리처드 페티는 자신이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임을 다시금 증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음.최종 결과: 10회 우승, 폴 포지션 7회, 5위권 진입 22회, 10위권 진입 23회6. 다시 한 번 압도적으로 2연속 챔피언이 되다, 1975년형 닷지 차저(1975년 챔피언)1971년~1972년의 2연속 챔피언 달성과 같이, 페티는 1974년의 우승에 가속을 받아서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 그 결과 1975년에도 나스카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음, 당시 기록을 대조해 봐도 리처드 페티 이외에 10회 이상 우승을 달성한 드라이버는 없었고, 페티는 말 그대로 오벌 트랙을 휘젓고 다니며 2위인 데이브 마시스와 70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렸고, 결과적으로는 강력한 닷지 차저와 함께 2회나 2연속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대과업을 이룸.최종 결과: 4783포인트, 13회 우승, 폴 포지션 3회, 5위권 진입 21회, 10위권 진입 24회7. 마지막 챔피언은 올즈모빌과 함께, 1979년형 올즈모빌 442(1979년 챔피언)1975년의 우승 이후, 리처드 페티는 꾸준히 상위권에 들며 챔피언 경쟁을 계속했지만, 아쉽게도 계속 우승에는 실패하며 1978년까지 우승 공백기를 지내야 했음, 특히 1978년에는 쉐보레 몬테카를로로 차량을 교체해서 챔피언쉽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0회 우승에 6위라는 결과를 내며 탑 10 진입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페티는 포기하지 않았음, 새로운 차량인 올즈모빌 442를 탄 페티는 다시금 분골쇄신해 1979년 나스카 챔피언에 도전했고, 2위인 대럴 월트립과 치열하고 열띤 경쟁 끝에 마침내 4830포인트 대 4819포인트로 11포인트 차이로 격전 끝에 생애 마지막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데 성공함, 이 때 페티는 우승 횟수에서 5회로(월트립은 7회), 폴 포지션에서는 1회로(월트립은 5회) 월트립에게 밀렸지만 5위권 진입 23회(월트립은 19회) 10위권 진입 27회(월트립은 22회)로 포인트 벌이에서 앞서는 전략적 승리로 노익장을 과시했음. 참고로 또 다른 나스카 레전드인 데일 언하트는 이 해 7위를 달성하며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함. 또한 아들인 카일 페티가 그 해 탈라데가 500에서 데뷔하며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 리 페티와 함께 달렸듯이, 이번에는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가 되어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나스카에서 달리기 시작함.최종 결과: 4830포인트, 5회 우승, 폴 포지션 1회, 5위권 진입 23회,10위권 진입 27회번외. 길고 긴 커리어를 마치다.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은퇴)(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경기를 함께한 차량,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우승, 1984시즌 파이어크래커 400)1984년 데이토나에서 열린 파이어크래커 400에서의 마지막 우승을 마치고, 그 이후에도 페티는 꾸준히 나스카에 참가하며 비록 순위는 떨어졌을지언정, 꾸준히 중위권을 달성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음,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페티도 피해갈 수 없었고, 페티는 1992시즌 후터스 500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함.(리처드 페티의 은퇴 경기였던 후터스 500의 포스터, 우리가 아는 그 레스토랑 후터스 맞다)당시 페티의 은퇴 경기에는 16만 2천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들이 몰렸고, 페티는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생애 마지막 나스카 레이싱을 시작함.하지만 안타깝게도 95랩에서 45번 차량의 리치 버클이 페티의 43번 폰티악 그랑프리와 충돌했고, 페티는 생애 마지막 나스카 경기를 완주하지 못하고 리타이어하고 말았음. (리타이어한 리처드 페티, 리처드는 얼마나 슬펐을까?)(관중들에게 환호받는 페티)그렇지만 그가 최고의 나스카 레이서라는 건 변하지 않았고, 그날의 후터스 500 경기에서 수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그렇게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커리어는 화려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음.오늘은 나스카의 레전드 리처드 페티가 탄 챔피언 카+번외를 알아보았다.이 정보가 유익했으면 하며, 나스카 팬도 많아지길 바람!틀린 정보 댓글로 달아주면 환영함
작성자 : dcroffj고정닉
현실 중국사와 함께 보는 무협 세계관.jpg
1. 상, 은(상), 주 시대- 중국의 신화 시대(황제, 서왕모, 구천현녀, 적송자, 자부선인, 치우 등 신선, 천신들이 활동한 시대.)- 무공이 아닌 무술/선술의 시대.- 황제는 헌원검이라는 검이 있었지만 창과 방패를 들고 전쟁터에서 싸웠으며, 황제는 치우에게 밀리다가 죽음의 여신 서왕모가 보낸 무의 여신 구천현녀에게 병법과 선술, 무술을 배우고서야 비로소 치우를 이김.- 황제의 이복형 염제 신농이 중의학을 창시함.- 은(상)나라-주나라 교체기에 신(선)들의 전쟁인 봉신연의가 진행됨.- 장르적으로는 무협보다는 선협에 더 많이 등장함.2. 춘추전국시대- 전란의 시대이자 아직 신비가 지상에서 온전히 떠나지 않은 과도기.- 최초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전설이 나타남.- 구천현녀의 화신인 월녀는 원숭이와 어울리며 검법을 즐겼는데, 대나무 가지로 장군을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고 하며, 월왕 구천은 그녀를 초청해 월나라 군대에게 검법을 가르쳤다고 함.- 신선을 찾아다니면서 불사약을 찾는 심선파 도사들이 나타나고, 스스로 수련해서 연단술로 금단을 만들어 신선이 되고자 한 수선파 도사들이 나타나면서 약술과 연단술이 발전함.- 전설의 명의 편작이 의술을 정리함.3. 진한 시대- 최초의 협객들이 나타남. 진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형가 등의 협객들이 목숨을 대의를 위해 버리기 시작함.- 진시황제때 문자가 전서체로 통합되면서 부적이 전서체로 쓰이기 시작함.- 한나라의 체계화된 조직이 도교에 영향을 미침. 도교의 신들이 한나라 조직 체계로 정립이 되고 서열이 나뉨. 도사들은 높은 격의 신들의 이름을 빌린 부적으로 하위 신들에게 명령을 내림.- 도사들이 자주 쓰는 주문인 급급여율령은 한나라때 공문에 쓰이던 말로 '법령이 행해지는 것처럼 빨리 처리하라'고 하위 신들에게 재촉하는 말.- 전한이 무너지고 후한이 세워지기 전의 혼란기에 녹림산에서 일어난 산적들을 녹림이라고 불렀고, 우리가 아는 그 녹림의 기원이 됨. 다른 버전으로 평림도 있었다고 함.- 한나라 말, 사천의 청성산에서 장도릉이 오두미교(=천사도)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도교가 생겨나고 도사들도 체계가 잡힘.- 영향력은 장각이 창건한 태평도와 황건적들이 더 강력했지만 토벌당하고 천사도로 흡수됨.- 화타가 관우 뼈를 긁어서 계집아이 같은 소리가 나게 함. 의술 만렙.4. 5호 16국 - 위진남북조 시대기존 중화의 중심지였던 화북은 5개 오랑캐(흉노족, 갈족, 선비족, 강족, 저족)들에게 유린되어 말그대로 씹창남.이때를 분기로 고대 중국과 중세 중국이 나뉜다고 보기도 함, 이민족과 기존 한족의 혼혈이 크게 진행되어 북중국인의 혈통, 인종 구성까지 바뀜.중국의 흑역사 시대로 보며 보통 이 시대를 무협 장르의 배경으로 삼지 않음.아무튼 화북이 박살나는 동안 장강 이남, 강남 지방의 남조에서는- 내부로는 정치투쟁과 부패가 성행하고, 외부로는 이민족, 북조의 침공이 도사리는 어지러운 정세에 지친 나머지 부자들이 누릴건 다 누리면서 어려운 말로 세상을 정의하고 '난 청정하고 고요한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거야~' 하는 현학이라는 도교적 철학사상이 발달.(현학적인 소리 어쩌고 할때 그 현학 맞음)- 이때 유명한 인물들이 죽림칠현이고 이자들은 오석산이라는 납, 수은, 비소 덩어리인 마약을 먹고 방탕하게 살았음.- 문제는 이렇게 누릴거 다 누리면서 세상에 초탈한 척하는 게 이상적인 도사의 모습이라 여겨저 후대 도사들의 이미지가 이걸로 굳어버림.- 모산파(=상청파)가 개창되고 도교 이론과 연단술이 발전함. 흔히 말하는 영약, 환단은 다 이때 개발됨.- 영약 중에 하급은 병 치료용, 중급은 보약으로 짐승의 장기나 약초로 만들었음. 상급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물질인 수은, 납 등 금속재질로 만들었음.흔히들 구정환단이라고 해서 단사를 9번 정제해서 거의 순수한 수은 덩어리를 만들어서 먹었는데 이걸 먹고 죽는 걸 '아 내가 약을 잘못 만들어서 죽는구나', '아 내가 잘못 먹어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죽어버림.- 이 먹는 방법을 복식/복이라 해서 아예 수련방법 중 하나로 정함.- 때문에 훗날 무협소설에서 영약이나 환단 먹을때 조심해서 먹으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 불교가 중국 대륙에 들어옴.5. 수당시대- 달마가 중국에서 불교 선종을 퍼뜨려 조금씩 정착시킴.- 모산파가 수나라 황실과 접촉해 도교가 국교가 됨.- 소림파 무승 13명이 당태종 이세민을 도와 수나라 멸망에 힘을 보탬.- 숭산과 종남산이 관직에 들어가고자 하는 도사들의 중심지가 됨. 때문에 도관들이 많이 들어섬.- 도사 소현랑이 먹고 죽는 외단이 아닌 몸속에 키우는 내단 수련법을 주장. 이때부터 내단 수련법이 점점 퍼져나가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단전의 기원이 됨.- 그래도 아직 모산파의 외단을 중시하는 단정파가 우세했음.- 당나라 초기에 도교와 불교가 심하게 경쟁했고 당 고종 때 현장법사가 이끄는 불교파가 우세해짐. 측천무후가 불교를 지원함.- 당 현종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다시 도교를 크게 지원해 도교가 번성함.(현종의 두 딸이 아예 출가해서 여자 도사인 여관이 되었을 정도.)- 도사+검법의 원조인 검선 여동빈의 전설이 이때. 여동빈을 포함해서 8명의 유명한 신선을 8선이라고 부름.6. 송~원 시대- 드디어 무협 장르의 주배경시대가 도래함.- 송나라 때 유교와 성리학이 슬슬 올라오면서 도교가 쇠퇴함. 그 전에 5대10국 시대에 이미 많이 무너졌었음.- 이제 국교로서 통치이념으로서의 도교가 아니라 친민중적인 도교가 성행함.- 성리학의 발전이 도교에 영향을 미쳐서 차분하게 명상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도교 계파, 전진파가 탄생함.(무협지에서 전진교는 잊혀진 은자들의 문파 정도로 묘사되지만 이때는 그냥 이때는 일반적인 도사들의 문파였음.)- 당나라때는 군벌들의 반란이 문제가 컸고 송나라 자체도 군벌쿠데타로 일어난 나라라서 군사력을 억제하게 됨. 그 때문에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큰 발전이 있었지만 군사력은 자연스레 약해짐.- 금나라의 침공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짐.- 또 팍팍해진 생활에 산적들이 들끓어 양산박 같은 산적 단체들이 생겨남. 여기서 무협소설의 조상인 수호지가 등장함.- 결국 금나라 송나라 다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섬, 몽골인들은 한족을 많이 핍박했고 한족 민중은 구심점이 필요했음.- 대부분 사찰 아니면 도관이었고 관은 이를 탄압했고 민중은 더 이를 악물고 일어남.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무협소설의 배경이 되는 문파들이 많이 창작됨.(일부 무림 비슷한 세력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음.)- 불교의 미륵신앙과 마니교(대충 조로 아스터교의 분파)의 영지주의가 합쳐져 백련교라는 종교가 송나라때 처음 생김.- 주원장은 백련교에 가입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홍건적을 자기 편으로 삼아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움. 그후에 백련교와 홍건적을 토사구팽함.- 백련교와 마니교를 모델로 김용이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명교를 창작함. 부조리한 관부에 대항하고 민중을 위해 칼을 들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사공을 써서 마교라고 오해받는 종교의 클리셰가 여기서 나옴.- 즉 우리가 천마, 마교라고 부르는 모든게 백련교-마니교-명교-마교에서 파생됨.- 그리고 이 명교가 나중에 동방불패나 규화보전으로 유명한 일월신교가 됨.7. 명청시대- 원나라때 탄압받고 결정적으로 주원장의 토사구팽으로 제거 당하면서 무림은 완전히 황폐해짐. 대표적인 구파일방 중 하나인 소림사는 잿더미가 되었다가 명나라 군대의 무술을 이식해서야 겨우 다시 무승들을 길러낼 수 있었음.- 본격적으로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떠오른데다가 교육수준이 높아져서 도교나 불교에 대한 대중적 신앙과 경외가 많이 옅어지면서 관련 세력들이 극도로 약화됨.- 명나라 초기에는 화포가 등장하고 중반부터는 화승총이 전래됨. 현실엔 호신강기 같은게 없으므로 날고 기어봤자 다 총맞아 죽음.- 무협지에선 명나라 배경이 많이 나오지만 실질적으로 현실 역사에선 무림은 거의 소멸했다고 추측됨.- 이후로 무협은 그냥 애들 동화로 전락함.- 청나라 말기에 의화단 운동 당시 무공을 연마하면 서양인들의 총알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잠깐 다시 역사에 등장했지만, 그런건 없었고 다 총맞아 죽어버림.서양인들은 의화단원들이 무공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의화단 운동을 "Boxer Rebellion", 권투 선수들의 반란이라고 조롱했을 정도.이후로는 청나라 말기에 개발된 홍가권, 태극권, 영춘권 등이 지금까지 심신단련과 호신술 정도로 명맥을 잇고 있으며(ex: 중국군 입대 가산점을 받기 위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는게 유행한적도 있다고 함.)대중문화 창작물의 장르로서 부흥해 우리가 이 글을 보는 이유가 됨.
작성자 : 카프카스-튀르키예-여행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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