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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죽 단편 소설] 무제

쩨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4.20 11:20:08
조회 1350 추천 11 댓글 13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VcMd8






'루이즈'.


그녀의 이름을 뇌리에 되새겼다.


-


"나, 한동안 멀리 떠날 것 같아."


"어디로?"


"던전으로."


"어디에 있는?"


"...조트의 왕국이 있다고 하는 그 던전."


그녀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꼭 가야 하는거야?"


"이게 마지막 일거리가 될 거야. 그리고 나선 우리 둘 다, 바닷가든, 대도시든, 하다못해 산에서라도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야. 의뢰인이 돈을 잔뜩 준댔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확답은... 못 주겠어. 미안해. 브리코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볼에 입을 맞췄다.


"안 가면 안될까?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아."


그녀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하릴없이 물어보았다.


"...미안해. 정말."


"꼭... 돌아와야해. 알았지? 꼭. 약속이야, 루이즈."


그녀와의 마지막 밤.


나는 그저 잠든척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긴 싫었다.


밤중에 일어나 나가려던 그녀는 조용히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브리코브"


그녀는 대문을 조용히 열고 나섰다.


나는 침대에서 숨을 죽여 울었다. 그녀 또한 대문 밖에서 울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 아픈 마음을 쥐어 짜고 있었다.


-


던전에 발을 처음으로 디뎠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녀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혹시나 죽은 건 아닌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밝은 하늘 아래서 기다릴 수 없었다.

집안의 가보였던 장검을 무작정 챙겨들고 그녀가 떠난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한 공기, 퀴퀴한 냄새, 종종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들, 검푸른 이끼 자국, 거대해지는 작은 소음, 그런 환경 속의 나.

그녀는 홀로 이런 곳으로 왔구나.

나를 위해, 이런 일말의 자비도 없는 황폐한 곳에 왔구나.

먹먹한 마음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느낌이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약해져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고 깊은 동굴의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처음으로 살생을 한 그 순간을 기억한다.

거대한 바퀴벌레 두 마리와 못생긴 홉고블린 한 마리에게 쫓기다가 구석에 몰렸을 때였다.

홉고블린 녀석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를 위협했다.

가능하면 뭐든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며 팔을 빠르게 휘둘렀다.

곧이어 손에 묵직한 충격이 오며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뼈에 칼이 정통으로 맞았는지, 손에 고통이 느껴졌다. 손톱이 들렸나?

물론 홉고블린도 고통에 겨워 소리지르며 날뛰었다.


팔이 가는대로 곤봉을 휘두르는 녀석의 빈틈을 노려 가슴팍을 향해 칼을 뻗었다.


꼬치에 고기를 꿰는듯 한 느낌과 함께, 던전을 시끄럽게 하던 비명소리가 멎었다.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홉고블린의 입가에서는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한 손을 내게 뻗으며 드러내는 적의는 정말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힘주어 검을 바투 잡고, 반 바퀴쯤 돌리자, 녀석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발에 힘을 주어 칼에 박힌 홉고블린을 밀쳐내자 뒤에 있던 커다란 바퀴벌레들은 그 홉고블린을 바로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역겨운 광경에 뱃속 깊은곳에서 뭔가 올라오려 했다.


빠르게 바퀴벌레들을 뒤로 한 채 도망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멀어졌다 싶을때 즈음 벽을 짚고 그대로 속에 든 것들을 게워내었다.


손은 저릿저릿하고 다리는 터질 것 같았다. 근육에는 아직도 홉고블린의 몸을 관통하던 그 느낌이 새겨져 있었다.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였다.


-


처음으로 식인을 했던 그 때를 기억한다.


놀 네 마리가 무시무시하게 추격해 올 때, 나는 계단으로 도망쳤다.


그들 중 한 마리가 나를 쫓아왔었고, 나는 더이상 도망갈 기운이 없었기에 그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창 끝에 허리가 스쳤을 때, 타는듯한 고통에 잠시 몸을 휘청였다.


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게 창을 뻗었지만, 나는 앞으로 굴러 오히려 그 심장을 관통했다.


놀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내 위로 쓰러졌다.


무거운 그 몸뚱이를 옆으로 치우고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한순간 배가 고파 졌다.


식량은... 없었다. 싸왔던 빵과 치즈, 고기 한 조각은 전부 먹어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다 방금 치운 놀의 시체에 눈길이 갔다.


...안돼. 저런 건 먹을 수 없어.


하지만 이미 배고픈 몸은 무엇이든 먹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


어차피 영영 싸온것만 먹고 지낼 순 없었어.


천천히,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과연 이 녀석을 먹어도 되는걸까? 꼭 먹어야만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높이 들었던 손이 땅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무거운 머리가 돌 바닥에 부딛혔다.


배를 갈라 장기를 먼저 꺼내고, 갈비뼈를 발골하고, 그 외 신경같은 부분을 잘라내어 손질했다.


한입 먹어보자, 썩 나쁜 맛은 아니였다. 오히려 맛있었다고 해야 할 만 했다.


그래도 이런걸 먹게 되다니, 하며 또다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도 이런 것들을 먹었겠지.


-


던전에 들어온지 109일이 지났다. 양손에는 각각 다른 팔찌를 하나씩, 몸에는 던전에서 주운 고리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못 씻은지 오래 되어서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깎지 못한 손톱은 길어졌다.


괴물들의 고기를 먹는데는 익숙해졌다.


뱀에게 물렸는데 다행히도 괜찮았다. 팔찌 덕분일까.


-


던전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짐승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검을 들고 괴물들과 싸우는데 익숙해졌다.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


무거운 중갑옷을 입은 그녀가 보였다.


머리는 감지 못해 헝클어진데다 떡져있고, 얼굴은 피곤해 보이며 팔다리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지만, 루이즈가 확실했다..


루이즈! 당신을 찾으러 왔어!


목이 쉬었는지, 아니면 몸 상태가 별로여서 그런건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뛰어서 그녀의 앞에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그녀의 입에 미소가 담겼다.


"...돌아왔구나."


아냐, 돌아온게 아냐. 너를 찾으러 내려 온 거야.


"그 지옥같았던 어비스에서."


루이즈...?


"나약해 빠진 구울 정도라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미친듯 웃으며 내게 무기를 겨누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브리코브! 금방 지상으로 널 만나러 갈게!"


잠깐, 루이....


그녀의 칼은, 망설임 없이 나의 머리를 베었다.


-


던전의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생각했다.


내 손톱은 언제부터 이렇게 길었던 걸까?


나는 언제부터 괴물들의 고기를 맛나게 먹기 시작한 걸까?


나는 어떻게 검에 목이 잘려 나가고도 살아있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죽어 있었던 걸까?


서서히, 모든게 흐려졌다.


안녕.


-


인간이여.


'누구십니까?'


너의 안에 있는 감정은 무엇이냐?


'누구냐 물었습니다.'


불타오르는 그 뜨거움, 그 붉은 정수는 무엇이냐?


'...분노일겁니다.'


어째서 분노하고 있느냐?


'저는 사랑하는 이를 찾으러 이곳에 왔고, 결국 그녀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너를 배신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저...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가 죽은 몸이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주받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제 정신이 아닌 그녀 앞에 나서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녀는 절 괴물로 오해할테니까요.


그리고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녀 앞에 나서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녀를 더이상 볼 수 없었다면,


그때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그 분노를, 그리고 다시 일어난 이 몸뚱이에 대한 분노는 대체 어디를, 누구를 향해야 합니까?'


흥미롭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너의 그 존재가.


'...'


나는 에레쉬키갈, 타르타로스의 여왕이다. 외로이 지고있는 그대의 영혼을 받아가려 했지만, 그대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구나.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가?


'평생입니다. 생각 할 수 있는 이 모든 시간동안, 모든것을 증오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저를 기만하시는겁니까?'


그렇지 않다. 그대는 훌륭한 군주가 될지어니, 그대의 피에 물든 그 검을 들고, 공포와 격노로써 지옥을 다스릴지라.


그대는 판데모니엄의 불의 군주가 되리라.


'그것이 제 운명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내가 그 운명을 바꾸리라. 실을 엮어 베를 만드는 것도, 실을 풀어 무로 되돌리는것도 나의 일일지니, 그대는 그러한 운명이 되리라.


'저는... 그럼 이제 무엇입니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브리코브입니다.'


브리코브(Breecov), 그대는 행복했어야 할 운명일진대, 그대의 배우자가 될 운명이었던 자의 실이 그대의 실을 헝클어 놓았구나. 이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을 어찌 하리.


엉킨 실을 잘라내어, 그대의 남은 삶을 정 반대로 만들어 놓을지라.


형편없이 피투성이에 헝클어진 그대의 육신은 황금 갑옷으로, 맑던 눈빛은 불타는 광명으로써, 거짓된 위엄으로 가득찬 군주가 되리니.


그대는 더이상 브리코브라는 사람이 아니다, 분노와 폭력만이 있는, '세레보브(Cerebov)'로써 살게 될 것이라!


-


'루이즈'.


그녀의 이름을 뇌리에 되새겼다.








-


끗.


댕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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