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Euginia,Yujinia)
고대 퓨리낙스인들이 한반도를 두고 일컬었던 말.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지명이며
본래 고대 퓨리낙스어로 유지닉스(Euginix ;유진이 있는 땅, 유진을 모시는 자들이 사는 곳)가
그리스어로 음차된 것이며 특정지역으로 말하면 주로 한반도 남부의 도시국가들을 가르키기도 했다.
유진(Eugin,Yugin)은 고대 텐구리 족의 제일 높은 여신중 하나라고 한다. 유진에 대한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어떤 계보를 통해서 유지니아란 지명이 유래되었는지 확실히 밝여져 있지 않다.
1. 개관
동지중해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반도인 유지니아는 지중해사상 가장 독특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한다.
남북 700킬로미터 정도에 면적 20만 제곱킬로메다의 유지니아는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가 특색인
남부와 사철의 변화가 뚜렷한 북부의 기후대가 있으며 그에 따라 문화또한 상반되게 발전되었다.
문명발달에 유리한 기후조건과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기름진 땅과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고대로
부터 가장 풍요로운 땅으로 이름이 높았다.
2. 민족적 계보
유지니아는 적어도 세개 이상의 민족들이 고대로부터 뒤엉켜 왔다. 가장 먼저 이땅에 있었던 민족은
남몽고의 일파로 여겨지는 고-진 인들이었다. 단순히 토착민-원주민 으로 번역되는 이 사람들은 B.C.
25세기경 신석기 말기시대에 접어들었고 기초적인 부족들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 민족의 문화는 고-남몽고-한지 문화라고 하며 현재까지 특별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이주해온 일파로 보이며 문명적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B.C.24세기경에 첫번째 민족이동이 일어났다. B.C. 30세기 경부터 중앙아시아에서 동진하던 북몽고
족의 한 일파인 텐구리 족은 요북을 넘어서 유지니아 북부에 정착한 것이다.
텐구리 족은 천신(天神)을 뜻하는 톈구리(Tyuengur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천신-텐구리를 섬기는
민족" 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민족은 기마유목민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마이동
을 시작한 북몽고족의 하나로 , 그 당시 유지니아의 토착인에 비해 발달된 무기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텐구리 족은 토착민들을 손쉽게 제압하면서 동진했는데 북중앙 평지를 넘어 아킬레와
요동에 이르러 정착하기도 했고 일부는 북쪽의 간트리써까지 이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텐구리 족은 유지니아와 그 북부평원에 정착했다. 당시 유지니아의 북부와 만주지역은
유목생활을 하기에 최적의 기후를 지니고 있었고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이 땅의 매력에 반한 것이었다.
당시 텐구리족은 발달된 청동기 문화와 함께 원시부족 국가적인 정치적 정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반아래 그 들은 북지중해 최초의 '국가'를 만들게 된다. B.C.2333년, 텐구리 족의 최초의 국가
고려(가오리(Khaori),고구려(Kogulyur))가 요동지역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국가는 여러면에서 아직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도시발달이 미약했고, 텐구리족
은 농경문화에 관심이 적었다. 따라서 이들의 국가는 원시 유목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중앙정권
의 힘도 강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고려)왕국은 세계사상 유일한 원시유목국가로 분류된다.
유지니아 남부에서는 이들 도래인들의 출현이 가져온 새로운 문명-즉 청동기문화를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여 B.C.20세기를 전후해서 기초적인 청동기 혁명을 실시했다. 한편 북부의 텐구리 족의 나라
고구려는 농경이 시작됨에 따라 정착문화가 자리잡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국가적인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오랫동안 내부의 분열과 각부족의 중앙집권 거부에 따라 영역적인 팽창은
수백년동안 없었고, 문명은 B.C.18세기 이후 거의 정체상태에 있었다.
북지중해 최초의 국가라는 이름이 점점 역사속으로 잊혀져 가고있을 B.C.15세기에 이르자 북지중해에
엄청난 기상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로 인해 초원지대였던 북지중해가 풍요로운 농경지로 바뀔수 있게
되었고 또 때마침 새로운 민족이동이 시작되었다. 퓨리낙스인들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퓨리낙스인들은 3번에 걸쳐서 이동했고 각 이동시마다 다른 민족이 활동했다. B.C.15세기 부터 이동
을 시작한 퓨리낙스-템플라(Furinax-Temflar)인들은 B.C.14세기 중반, 유지니아의 남부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 최초의 템플라 이주민들이 유지니아에 세운 도시가 바로 '메이포스(Meipos)'이다.
이후 200년이 지나기 전에 수많은 퓨리낙스계열의 이주민들은 유지니아 남부에 정착하면서 도시들을
세웠고,에이수에즈(Aei-Sues),아크로비트(Acro-byte),폰티악스(Fontiax)등의 도시들이 당시에 만들어
졌다. 이들 퓨리낙스-템플라인들은 아리아인의 일파로서 백인에 속하는 인종이었다. 어족으로는 인도-
유럽어를 쓰는 민족이었으며 해양민족의 특성을 간직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B.C.14세기경 유지니아는 북쪽과 남쪽에 서로 상반되는 말과 생김새, 문화를 지닌 민족들이
양립하게 된 것이었다.
3. 역사
1) 북부의 역사: 고구려 왕국에서 고려-한연방까지 (B.C.15세기~B.C.3세기)
기원전 18세기경 부마 지배권과 각 부족간의 이해관계 갈등으로 인해 고구려 왕국은 내부분열이
한창이었다. 서쪽의 유목민들을 아우르는 유목제국인 고구려 왕국은 중앙정부 약화에 따라 각 지방의
분권이 독자적인 정치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각 부족지방국 들은 부족간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각자의 지방에서 최대의 이익을 거두려 애썼고 그것은 고구려 지배하의 유지니아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발전은 거의 없었다. 이합집산 끝에 고구려는 기원전 15세기경 5부족이 나누어진 연맹
왕국의 형태를 보였고 이 5부족의 유력한 자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체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도
많아 그들은 각지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는데. 그 국가들은 부여,예,맥,옥저 등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인들은 남쪽바다에서 흘러와 정착한 새로운 민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서유지니아 바다건너의 아이라스와 유지니아 본토에도 진출했고 처음보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유지니아 남부의 이제 첫 걸음을 시작한 작은 도시들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이 관심을 보이고 접근한 곳은 아이라스 였다.
아이라스는 기원전 16세기 경부터 개척되기 시작해 기원전 1300년경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융성하고
있던 때였다. 고구려 인들은 수백년 전부터 이웃하며 지내온 아킬레 인들과는 다른 새문명에 흥미를
느꼈고 이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그 세력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업민족,해양민족)이 고구려의 부족지배자
들이 바라는 세력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의 부족국가들 -부여가 중심이 된- 이들은 아킬레를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열었다.
곧 아이라스로부터 발달된 퓨리낙스와 아이우의 문화가 전해지게 되었고 이것은 고구려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고구려 연합왕국은 자체적으로는 하나의 나라임을 천명했지만 당시 외교문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타국으로부터 '여러나라들이 모인 연합'의 형태로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부족국가
개개가 외교권과 정치권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나라들은 북지중해에 새로 떠오르는 세력들과
교류하고 때론 경쟁하면서 서서히 문명을 발전시키기에 이르고 있었다.
보다 활동적인 고구려인들은 요동지방의 해안에 상업도시를 세우기도 하였고 멀리 아이우와도 무역을
개시했다. 그러나 고구려 전체로 보아서는 아직 이 나라는 정체된 편이었다. 중앙은 유명무실 했고 동북
부의 문화는 아직 많이 뒤쳐진 상황이었다.
고구려왕국의 강역은 대략 요하동쪽으로 부터 남쪽으로는 평강(대동강)북쪽까지 였다.
평강 남쪽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태동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가 한 왕국이었다. 한(韓)이라는 의미는
북몽고에서 우두머리,지배자를 뜻하는 칸(Khan;汗)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본래 텐구리 족중 일부는 고구려왕국의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원주민들을 지배
하거나 동화되기도 하였는데. 보통 텐구리 족의 전통을 지키면서 원주민들을 지배하는 영역은 평강남쪽
에서 금강북부에 해당했다. 이들은 북부의 초원보다 농경하기에 훨씬 유리한 남쪽의 기후조건과 원주민
의 노동력을 이용해 농경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농경문화는 도래인들의 원주민에 대한 무력지배위에
일어난 것이지만 원주민들은 도래인들의 문화에 편입되었고 텐구리족의 문화에 남방 농경 문화가 덧입
혀져 고구려문화와는 다른 한 문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18세기 경으로 정치적으로
는 아직 원시적인 소공국들의 개별 지배였으며 아무리 큰 공국이라 하더라도 인구 1만을 넘지 못했다.
한-연합공국들은 300여년 동안 순조로운 발전을 보였다. 당시 고구려 왕국은 내분이 한창이었고
지방 세력들은 한의 공국들과 교류하며 생산품을 교환하는 무역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은 뜻밖에 바다로부터 도래했다. 기원전 14세기 중반부터 유지니아 남부에 퓨리낙스의
도시국가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섬과 복잡한 반도로 이뤄진 유지니아 최남부는 대부분
무인도가 많았고 한의 공국들도 그다지 신경을 쓰는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몇 안되는 이주민이 건너온
것은 그들의 주위를 돌리기엔 역부족 이었다. 남쪽에 정착한 도시국가들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고
두세기가 지나기 전에 한의 공국들은 그들의 세력을 무시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퓨리낙스인들은 내륙을 개척할려는 생각이 적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람들이어서 언제나 바다가
가까운 땅을 원했고, 유지니아 남부의 풍요로운 농경지는 원주민들을 부려 경작하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퓨리낙스인들과 한인들의 충돌은 처음부터 그 다지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수백의 공국으로 나눠져 있던 한 연방이 하나의 정치적 지배하에 놓일 정도로 통일된 이후였다.
기원전 10세기경 한 연방은 크게 3개의 정권(마한 진한 변한)으로 귀결 되었고 그들을 가르켜 삼한으로
일컫게 되었다. 이들 삼한은 처음엔 각자 정권도 수많은 도시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으나 해를 거듭
하면서 하나의 유력한 도시가 타도시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고 삼한은 하나의 완전한 정치적 지배하에
놓인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 경쟁하였고 유명한 삼국의 역사시대 끝에
결국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 되었다. 마한이 변한을 흡수한후 진한을 멸망 시킨 것이었다.(B.C.703년)
한-연방이 한국가로 통일되자 제일 긴장을 세운것은 그 세력이 최성기에 달한 유지니아 남부의
도시들이었다. 한 왕국은 점차 남쪽으로 진출했고 그 것은 유지니아 남쪽 도시국가들의 심기를 압박했다
당시 남부의 도시들은 두개의 헤게모니 하에 지배당하고 있었는데 메이포스와 에이수에즈 였다.
이미 북동부 지중해의 세력을 거의 다 휘어잡다시피 하고 있는 이 두 도시국가들은 도시의 차원을 넘어선
제국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으나 쌍방의 대결은 수백년을 거듭했고 그럼에도 패자와 승자는 갈라지지
않았다.
한 왕국은 두 도시국가의 경쟁구도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 힘썼다. 또한 상공업의 신장에도 신경을 써
수도 서울의 외항인 미추홀에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고 상선대를 조직했다. 또 한편으론 동족국가 고구려
에게도 왕국간의 우호를 위해 조약을 비준할 것을 요구했다. 기원전 7세기 경 고구려는 민족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언젠가 부터 '고려'라는 이름은 국가명
이 아니라 지명이 되어 버렸고 고구려 인들은 자신의 출신지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의 한 연방이 통일 되었다는 소식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고려인들은 동족인 한인
들이 북진해서 고구려를 한 왕국에 복속시킬지도 모르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모두들 이 새로운 통일
국가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사실 당시 동북지중해에서는 수백년동안 통일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도시국가나 제 연합에 불과
하였고 패국이라 불리우는 메이포스나 에이수에즈도 식민지와 보호령이 많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왕국
은 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였고 또한 패기만만한 호전적인 국가였다. 동북지중해의 사람들은 한 왕국
에 대해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한 인들의 오만한 태도에도 반감을 느껴 그들과의 교역에 차가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한 왕국은 국가가 이 들의 틈에서 고사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껴,
정치적으로 유명무실해진 고구려 왕국의 중앙정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12년경 ,고구려 왕국의 왕인 ㅁㄹㅇ는총명한 자였지만 이미 말뿐인 중앙정부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때아닌 한 왕국으로부터 친선 사절이 들고 온 내용은
가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한 왕국은 자국의 원만한 발전을 위해서는 고구려 왕국과 통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구려 연합왕국 내의 세력들을 모두 한 자리에 끌어모을수 있다면 동북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야심찬 계획하에 한 왕국은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구려의 정부는 별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의 영주국들과 도시들은 타국의 내정간섭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
라면 맞설것을 주장했다. 한 왕국은 동족국가의 의로서 하는 일이니 명령에 따르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서
한 왕국과 고구려의 지방 세력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따. (기원전 606년)
그러나 계획과는 반대로 한 왕국의 패권장악에 두려움을 품은 유지니아 남부나 아이라스의 도시들이
고구려 지방세력을 후원함으로서 한 왕국은 고구려 내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메이포스나 아이라스의 도시들은 이번 승리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기려 한 것이엇다. 그것은 고구려의 도시국가들이 보기에도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갈등의 폭발은 요하하구의 항구도시 서안평에서 일어났다. 전쟁시 주둔했던 아이라스의 연군이
계속 주둔할 것과 원하지도 않는 주둔 대가를 치르도록 도시에게 명령한 것이엇따. 이에 대한 반발로
폭동이 일어났고 주변 도시와 북방의 국가 부여로부터 응원군이 오면서 서안평에 주둔했던 아이라스
연군은 축출되엇따. (기원전 589년) 이 사건을 계기로 점차 고구려 인들은 아아라스와 남 유지니아의
도시들에 대해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반대로 동족인 한 왕국에게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 왕국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고구려 인들의 호의적인
접근은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오랜 경험을 겪으면서 양국의 위정자들고 세력가들은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되어야만 보다 안정된 정치지배를 할 수 있음을 통감했다. 기원전 578년, 대천협정을 통해
고구려 와 한 왕국 양국간의 자유무역 자유 통행 협정을 맺었고, 기원전 553년 평도합약에서 양국간의
군사동맹과 상비군의 일체화를 조인했다.
이 국가간 조약은 양국 중앙정부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양국의 유력한 도시국가들, 대 세력들이 모여
결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양국자체엔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는 강대한 '왕'이라는 세력이 미약했고 그것은
양국이 한 나라가 되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성향은 점차 심화되어 고구려와 한 의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교류했고 중앙정부보다 도시국가
들의 연맹회의가 더 큰 법적 효율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427년, 고구려 왕국과 한 왕국은 유명
무실한 왕제를 철폐하고 하나의 정치적 지배하에 통일 할것을 선언했다. (서울선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배기구는 양국의 도시국가와 부족국가들이 참가하는 연맹회의였으며 각도시의
상비군을 폐지하고 연맹회의의 장은 투표로 뽑되 임기를 정해 독재를 막으려 했다. 연맹회의는 처음에는
상업귀족이나 도시국가의 부유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중에서 의장이 선출되었으나 시간이 지나
면서 강력한 연방군의 장이 회의에서 발언하는 일이 많아졌고 또한 연방군 총사령관이 의장이 되는 경우
가 잦아졌다. 군의 독재가 우려되었고 이것은 몇번의 쿠테타로 입증되었다. 이후 의회는 군 총 통수권은
의회 총 의장에 의해 사령관에 위임하기로 되어있고 평상시의 모든 전권은 의회에 있다는 법을 통과 시
켰다.(기원전 317년 ,평도)
고려-한 연방은 점차 동북지중해에서 그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로 자라난 연방국
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힘을 느끼게 되었고 영역적으로 팽창의 기운이 일었다. 장차 전 지중해를 통일할
제국의 시초가 닦아지고 있는 것이었따.
# 유지니아 북부의 문화
텐구리 족이 주체가 되어 세운 고려-한 문명은 남방의 퓨리낙스계 문화와 여러면에서 대조된다.
오래전부터 유목민적 계율과 호전성을 간직하고 있는 텐구리족은 전사의 국가로 발전했으며 그 저변의
문화 또한 상무적이고 강건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아이우나 퓨리낙스의 신(新)문화가 덧입혀지고
고대 유지니아의 토착 농경문화가 어우러져 고려-한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본래 북방의 고구려와 남방의 한 문화는 완전히 같은 동류의 문화는 아니었다.
특징상 북방의 문화는 기원전 8세기까지 기마유목 문화로 분류된다. 완전치 못한 중앙집권과 부족장의
짙은 분권성향, 그로인한 지방별의 독특한 문화발달로 이 시대가 특정지어지게 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전까지는 유목문화와 기초적인 상업문화가 접목된 형태의 문명으로 보여지게 된다.
한편 남방의 한 문화는 오래전부터 토착의 농경문화와 북방의 유목문화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기원전 5세기 이후 한 문화는 농업을 기초로 한 상업문화의 모습을 띄게 된다.
따라서 이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된 기원전 4세기 이후의 문화는 저변의 기마문화에 상업적인 특징과
농경문화란 아이템이 합치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본질적으로 텐구리 족의 문화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고려왕국의 북방이었고, 상공업이 발달된
,즉 퓨리낙스와 아이우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곳은 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요동지역이나
한 왕국의 서부해안 지역이었따. 또한 한 왕국의 서남 곡창지대에는 농경문화가 독특하게 발달되어
고려-한 연방은 지방별로 특색있는 문화가 기원전 5세기부터 발달되기 시작했다.
북방의 고려왕국의 각 부족들은 초기엔 유목이 생활의 주를 이루었고 그후 농경이 추가되었다.
또한 주변에 교역을 할 국가들이 생기고 무역로가 발달하자 상업이 성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의 특산품
으로는 말과 유제품,활 화살 등의 무기, 일부 농산품이 있었다. 고구려의 말은 특히 유명해서 고구려인
들은 북부의 간트리써 분지를 거대한 말 사육지로 개척하여 대량으로 말을 사육,판매했다. 또한 요북의
철광석은 무기제조의 중요한 관심지로 고구려의 지배자들은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한 왕국은 고대로부터 뛰어난 농업 생산량을 자랑하여 남부의 시니악스(Seaniax)도시들이나 북방의
고구려,아킬레 등에게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그 외에도 과일이나 약초, 동부산악지대 에서 산출되는
금,은은 한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큰 역활을 했다.
고려-한 연방의 나라들은 오래전부터 문화가 태동했지만 도시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느렸다.
본래 유목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인지라 도시개념이 희미했고 부족적 성향이 강한것도 도시발달에
장애가 된 요인이엇따. 남방의 한 왕국은 농경이 일찍부터 발달했기 때문에 도시의 발달은 북방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기원전 10세기 이후, 주변국의 도시들이 발달되면서 고구려와 한의 도시들도 점차 수와
크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도시발달은 부족 중심지,상공업 중심지와 정치,군사적 요충지에
도시가 발달되었고, 남방의 한 연방은 주로 큰강이나 바다에 있는 농산물의 집합지,교통 요충지에 자연
발생적으로 도시가 발달되었다.
두 나라가 통일될 무렵의 유력도시들은 북방 고구려의 경우 중요한 정치적 수도임과 동시에 가장 큰
도시였던 평도(平都), 기원전 12세기에 요하 하구에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상업도시 대천(大薦),대동강
유역의 중요한 상업적,교통 요충도시 대평(大平),요하 중류의 교역도시 하안(河安), 요하 상류의 철광석
의 산지인 안북(安北),요북동부의 대평원에 만들어진 유목물류의 집적지 태강(太姜)등이 있다.
또한 남방 한왕국에는 중부 한강유역 최대의 도시인 서울, 대규모 상업 요충도시인 북방의 철원(鐵原),
송악(宋岳)등이 있고 남부의 대규모 농산물 집합도시로 군장(君張),태안(太安) 중앙의 중요한 교통 요충
도시 한보(韓寶), 동부 산악지대의 중요한 광석산출 도시인 태백(太白),영릉(英陵),함흥(含興)이 있으며
동부해안의 중요 교역 도시 원강(院强),미포(美浦)등이 있다.
도시발달에서는 한 왕국이 고구려보다 앞서있었으며 따라서 도시문화도 더 다양하게 발전해 있었다.
한 왕국의 도시들은 상업적 목적에서 발전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경우가 많아 현재
까지 이때 만들어진 도시들이 대도시로 남아 있다.
기원전 4세기경 고려-한 연방이 첫 출범을 했을 무렵의 문화를 단편적으로 말하면 북방의 기마 유목
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가 혼합된 상업문화라고 해야할 것이다. 충분히 집적된 국가의 부와 발달된
무기제조술, 제민족의 호전성으로 인해 고려-한 연방은 거대 제국으로 자라나갈 뿌리를 이미 키우고 있었다.
2) 남부의 역사(거대 도시국가 연합의 시대 B.C.14C~B.C.4C)
유지니아 남부의 역사는 북부의 고구려-한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살고있는 민족의 인종이나 문화, 전통은 시작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북부 유지니아지역에서 고구려 왕국이 지방분권화 되며 한 연방이 서서히 발전하고 있을 무렵인
기원전 14세기경 서쪽 멀리 퓨리낙스에서는 새로운 민족의 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유지니아 남부 역사를 논하기 전에 퓨리낙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퓨리낙스는 기원전 4000년 경무렵부터 기초적인 청동기 문화와 도시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문명의
뿌리였다. 이 곳에서 가장먼저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멀리 북서쪽에서 온 아리아 계열의 칼라이(Khalaei)
인들이었다. 본래 중앙아시아에 유목생활을 하고있던 아리아 계에 속하는 민족의 한 일파인 칼라이 인은
기원전 2500년경 무렵부터 이동을 시작해서 사르시아를 지나 엘라스고원을 거쳐 지중해 서남부에 정착
했다. 당시 엘라스와 퓨리낙스-안트로스는 완벽하게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대규모의 민족이동이 가능
했던 것이다. 이 '엘라스-퓨리낙스'회랑을 돌파한 유목민은 퓨리낙스의 수많은 섬들에 정착했고 독특한
문화를 일으켰다.
본래 고(古)퓨리낙스 문화라고 하는 민족이동 이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초적인 농경문화위에
칼라이 인들의 유목문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해양문화가 탄생했고 첫번째 퓨리낙스 문명을 일으켰다
그 시점을 보통 기원전 2000년경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첫번째 퓨리낙스 문명은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했다. 천연항구와 다도해로 이루어진 퓨리낙스 지역은
자연스럽게 해양문화를 태동했고 도시와 인구가 증가하자 칼라이 인들은 보다 먼 곳으로 배를 타고 탐험
했다. 기원전 18세기이후 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북부 안티가 해안의 도시들과 차(Char)섬의 서부해안
도시들이 발전했다.
그러나 다시 먼곳에서 새로운 민족이 다시 이동되었다. 기원전 18세기 무렵부터 아리아 계열에 속하는
주디케익(JudicaeKe)인들이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칼라이 인들과 비슷한 문화와 혈통을 가진 주디케익
인들은 퓨리낙스 지역에 당도해서 그 지역을 위협했다. 주디케익 인들은 남쪽의 안티로스 지역에 머물
면서 퓨리낙스의 도시들을 약탈했고 칼라이 인들의 퓨리낙스 지배에 큰 위협이 되게 되었다.
기원전 1700년경에는 주디케익 인들이 템플라 반도를 점령하고 함대를 손에 넣으면서 민족이동을 실시
했다. 이들은 동쪽바다로 진출하여 차 섬과 타르소니스섬이나 지중해 북쪽의 아이라스(I-Ras)를 개척하기
도 하였다.
한편 이들 주디케익인들에게 쫒긴 칼라이 인들의 일부는 북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해 사쿠러스해에 이르러,
해안 각지에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이들 도시들은 후에 페닉시아(Fenixia)연합으로 발전했다.
퓨리낙스 본국에서 주디케익 인들은 엄격한 법에 입각한 정치를 펼쳤다. 피지배민들인 칼라이 인들은 지배
에 항거했고 그 떄문에 퓨리낙스 지역의 정치는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주디케익 인들이 퓨리낙스에 정착한지 200여년이 지난 기원전 1500년경 동지중해 전체에는 전무후무한
기상 대격변이 닥쳐왔다. 극지의 얼음이 녹으면서 바다의 면적이 늘어났고 그 영향을 전세계에서 가장 크게
받은 동지중해에선 기후대의 대변동이 닥쳐왔다.
당시까지 초원이나 건조지대였던 북지중해의 넓은 대지가 점차 비옥한 초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사막이었던 안티가 지역이 초지로 변하였고 숲으로 뒤덮혀 있던 사르가스와 카폰,카일레 지역이 점차 건조
해지기 시작했다. 이 격변은 당시 발전하고 있던 문명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점차 비옥해지는 북지중해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전에 사람의 접근이 적었던
지역이 풍요로운 산지로 바뀜에 따라 지리상의 개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런 기후와 지리상의 대격변이 시작될 무렵에 퓨리낙스 지역에는 또다른 대변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계의 세번째 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템플라(Temflar)인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이전의 민족보다 훨씬 발달된 청동기와 기마술을 가지고 있었고 보다 조직화된 전투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들은 점차 물이 채워져 땅이 좁아지는 엘라스-퓨리낙스 회랑을 돌파해 퓨리낙스 지방을 휩쓸었다.
이전의 칼라이 인들이나 주디케익들이 보기에는 템플라 인들은 야만인 이었고 약탈자이고 파괴자 였다.
때문에 점차 발달하고 있던 퓨리낙스의 문명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오랫동안 퓨리낙스는 암흑속에 빠져야
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템플라 인들은 퓨리낙스 전체를 완벽하게 지배할수 없었다.
이전의 피지배민들도 점차 무장을 해서 조직적으로 저항했고 템플라 인들은 노략질만으로 그들의 경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깨닳았다.
점차 많은 템플라 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퓨리낙스를 아예 떠나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 했다. 그러나 비교적 가까운 곳의 섬들은 이미 칼라이 인들이나 주디케익 인들에 의해 개척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야심차고 모험심많은 일부 템플라 인들은 배를타고 보다 더 멀리 북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했다. 당시 북지중해는 기후변혁덕에 이전보다 더 살기 좋은 기후와 풍토를 가지게 되어 템플라 인들은
곧 좋은 땅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시작된 템플라 인들의 이주는 퓨리낙스 인의 세번째 이자 마지막 해양진출이 되었다.
이들 템플라 인들은 멀리 동 유지니아해의 프로녹스나 아이달로스에도 진출했고 지중해의 동쪽끝인 일로
니아에도 상륙했다.
기원전 14세기 중반, 타르소니스 지역에서 출발한 한떼의 이민선단이 유지니아 남부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수십년전에 퓨리낙스를 떠난 것으로 판단되며 그 곳까지 오는 동안 아이우를 비로한 여러민족의 문화를 접하면서 문명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지니아에 처음으로 닻을 내린 퓨리낙스인이 정착한 곳은 유지니아의 남서쪽 끝부분, 수많은 섬들이 가득
한 다도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퓨리낙스와 닮은 지형을 가진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천연의 항구이자 요새인 이 땅을 찾은 퓨리낙스 인들은 바다의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첫 이주도시를 건설
했다. 그때가 기원전 1375년이었고, 그 첫 도시는 메이포스(Mei-Pos)였다.
첫 도시 메이포스가 세워질 무렵의 퓨리낙스 인은 극히 적었다. 그들은 수백명 정도의 소수집단에 불과
했고 당장의 식수와 식량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또한 원주민들의 저항또한 만만치 않았다.
비록 원주민들의 무기수준은 낮았지만 도래인들은 소수였고 항상 알수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래인들은 곧 그 땅과 바다에 적응했고 퓨리낙스에서 터득했던 방식을 따라 마을과 도시를 만들고
배를 띄웠다.
한편 또 다른 퓨리낙스의 이민 선단이 유지니아 남부에 도착했다. 그들은 템플라 인들의 이주도시가 세워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곳으로 가지않고 좀더 동쪽으로 섬들을 탐험했다. 곧 그들은 천혜의 요새를
발견하게 되고 상륙하여 정착했다. 두개의 반도와 세개의 섬으로 된 방책을 두른 도시- 에이-수에즈(Aei-Sues)
가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1357년)
이후 이 두 퓨리낙스의 이민선단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각지에 있었던 퓨리낙스의 이민선단이나 해적들은
유지니아로 이동했다. 기원전 14세기부터 기원전 12세기 까지 200여년에 걸쳐 수많은 도시들이 건립되었다.
도시들은 아직 도시라 불리우기 미약한 마을 들이었고 이주민의 수나 경제규모도 매우 작았다.
그러나 그들은 풍요스런 땅에 정착했고 해양문명이 발달하기 좋은 지형조건을 지닌 유지니아 남부에서
점차 새로운 퓨리낙스 도시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퓨리낙스인 들의 도시는 대부분 귀족정이나 공화적의 형태로 정치기초를 닦았다. 해양민족답게 그들은
전제적인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 기초적인 민주정이 발달되고 도시문명이 발달되면서 유지니아 남부
의 도시들은 과두정이나 민주정이 대부분의 정치형태를 가지게 되었따.
이들 퓨리낙스인들의 이주도시들은 그들의 경제생활을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했다. 그들은 보다 내륙에
있던 원주민들과 싸움을 벌이며 농경지를 개척하고 빼앗았고 일부에선 원주민들을 노예로 잡아 농장을
경영했다. 지하자원이 많은 곳에서는 광산을 만들어 내륙이나 서쪽에게 팔아 그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도 퓨리낙스 인들은 원주민들과 융화되지 못했다. 또한 해안에 도시를 세운 그들은
내륙의 땅에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본래 유목민의 후예였던 그들은 어느덧 배가 익숙한 바다의 민족이 되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땅'저 너머 북쪽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왕국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교역을 하진 않았다. 퓨리낙스 이주민들의 세계는 아직 다른곳에 영향을 떨칠 만큼 여유로운
것이 아니었기 떄문이다.
템플라 인들을 비롯한 여러 '바다의 민족'들은 동지중해 이곳저곳에 진출했다. 그 중에서는 도시를 만들고
정착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 일부는 해적이 되어 상선이나 해안도시를 노략질 하곤했다.
동북지중해의 오랜 고대 문헌에 흔히 언급되는 '바다의 흉적'들은 바로 이 시대에 활약한 것이었다.
대략 해적들의 소굴은 타르소니스 섬과 동유지니아해의 퓨리낙스,아이달로스 섬이었다. 그후 동쪽의
일로니아에도 해적들의 은신처가 세워져 동지중해는 해적들의 천국으로 되가고 있었다.
기원전 12세기 이후, 조금씩 도시적 기틀을 잡고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유지니아 남부의 도시들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바로 이 해적들이었다. 해적들은 이미 개척시대 초기부터 날뛰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더 조직화, 대량화 되었고 동남 지중해의 아이우 왕국의 정치혼란도 동북 지중해의 질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서로 연합하면서 해적들과 싸웠다. 오랫동안 도시들은 섬과 해안에 방책과 성벽을
쌓으며 저항해 나갔지만 , 해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선 해적을 찾아다니면서 전투를 해야한다는 것을 깨닳
았다. 곧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메이포스와 에이 수에즈에서 최초의 대양함대가 조직되었다. 당시의 함대는
이전의 함대에 비하면 아주 작은 소함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해적들과 충분히 싸을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지니아 남부의 함대는 자체적으로 지중해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고 그것은 함대의 보유와
그 능력의 신장으로 귀결된 것이다. '바다의 흉적'들과 싸우던 영웅의 시대는 그들에게 많은 부와 지식을
안겨주었따. 함대의 원정은 먼 나라와의 교역항로를 열수 있었으며 해적들의 소굴을 공격하면서 많은 재물
을 탈취할수 있었다.
기원전 10세기경 유지니아 남부의 도시들은 점차 강해졌다. 동북 지중해의 해적들을 제압하면서 상업항로
를 열었고 당시 지중해 각 도시들의 발달하는 시점에 부응하여 교역과 교류에 노력을 기울였다.
유지니아 남부의 도시들은 충분한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남 유지니아 지역의 뛰어난 농산물 생산력
이나 각 산지의 철광석, 금 ,은,보석과 포도주나 향신료 등 어느나라 와도 교역할수 있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의 생활이 여유가 있게되자 남 유지니아 인들은 서쪽의 도시들과 무역을 하는 한편
동부의 미개척지를 개척하면서 도시들을 건설해나갔다.
동지중해에서 남유지니아의 도시국가들의 이름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이우 인들은 이들을 가르켜 '시니악스(Seaniax;바다에 사는 곳,바다의 도시)'라고 불렀고 이들 '바다의
민족'들은 점차 동북 지중해의 상업항로와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시니악스 지방의 도시들은 오랫동안 연합과 반목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도시국가들간의 다툼은 이미 '마을'이었던 시절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고 부가
증대 되면서 유력한 도시들은 연합에서 보다 높은 위치를 원했고 미약한 도시들을 병합하는 등 제국주의
적인 모습을 띄기시작했다.
기원전 13세기 무렵부터 그들은 해적들이나 원주민들의 내습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서로 연합했고
그 동맹의 전통은 시니악스의 도시들의 정치에 독특한 모습으로 작용했다. 요컨데, 어떤 도시도 홀로 존재
하기 어려웠고 어떤 도시와 또한 얼마나 많은 도시와 '동맹'을 맺고 있느냐가 그 도시국가의 발전과 안전을
가늠했던 것이다.
도시들이 부를 증대 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을 무렵의 시니악스 각지의 연합은 크게 네 동맹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우선 '첫 도시' 메이포스가 중축이 된 메이포스 연합, 동유지니아해를 주름잡는 대상선단의 도시 에이 수에즈
가 이끄는 에이 수에즈 상업동맹, 서남유지니아의 풍요로운 농토를 지배하며 중요한 농산물의 집산지인
아크로 비트가 이끄는 농업연합, 동쪽의 사치품의 집산지 포티악스가 중심이된 포티악스 동맹이 그것이었다.
기원전 10세기 경, 이들의 경쟁은 아직 도시국가간 잦은 다툼과 반목에 지나지 않았으나 연맹과 합종을
거듭하면서 도시국가 연합간의 갈등은 상당히 위험해져 갔다. 그 중 가장 반목을 심하게 했던 연합은
메이포스와 에이 수에즈 였다. 두 강력한 도시국가들은 상업경로를 소유하고 있었고 외부에 충실한 동맹
도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상업선단과 해적들과의 전투로 인해 강대해진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따.
두 도시들의 관심사는 거의 비슷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상업로와 동맹도시, 시장과 자원을 확보하느냐 였다.
때문에 그들은 자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두 도시들이 불과 100킬로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양국간의 긴장을 증폭시켰다. 곧 두 도시국가의 주변은 군사적으로 밀집되게 되었고 일촉즉발의
상황이 항상 진행되었다. 두 도시국가의 힘이 미치는 중심에 위치한 도시인 가이파도(Kai-Pado)는 이런
위기를 느끼고 중립도시를 선언했다. 이러자 본래 에이수에즈의 영향이 컷던 가이파도의 상황을 이유로
에이수에즈의 양항이자 동맹도시였던 아이카스의 함대를 동원해 가이파도에 상륙했다.
메이포스는 엄연한 도발행위라고 규정하고 정의와 상도를 위해 메이포스의 이름으로 에이 수에즈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이로서 본격적인 양 도시국가 연합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기원전 986년)
메이포스의 연합군은 육로를 돌파해 아이 수에즈를 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라몬 강(현 섬진강)의 방어선
에서 전선의 고착화를 보이게 되었고 그 틈을 이용해 에이 수에즈 연합은 전 함대를 동원해 메이포스 본토
를 돌아 공격하려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타르소니스에서 급히 귀환한 메이포스의 대양순찰함대가
도시국가 파라파(Parapa) 앞바다에서 에이수에즈의 함대에 일타격을 가하였다. 마침 불어닥친 폭풍떄문에
에이 수에즈 연합 함대는 급히 귀환할수 밖에 없었고 전투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한편, 이 두 도시국가들은 옆에 있던 아크로 비트와 포티악스 연합에 동맹할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두 연합간의 싸움이 점차 진전되자 그 들은 자신들의 세력신장을 위해 더욱더 열을 올리게 된 것이었따.
일련의 전투들 끝에(아크로 비트 전쟁(기원전 956년~945년),포티악스 전쟁(기원전 953~950),1차 시니악스
전쟁(기원전 943~937)메이포스와 에이수에즈는 기본적인 동맹 우위권을 각기 획득했다.
이후 양국은 다시 시니악스 헤게모니를 두고 대결했지만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2차 시니악스 전쟁
기원전 931~927) 양국은 동맹국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주장하며 대외적인 진출에 열중했다.
대외진출로 인한 시장확보,동맹국 증가,교역량 생산량 증가를 통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 노력했고
그 부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대양함대를 만들어 각 도시국가의 직속으로 보유했다.
풍부한 농산물을 가진 아크로 비트 연합을 영향권안에 넣은 메이포스는 북서쪽의 아킬레나 아이라스의
도시들과 농산물을 교역했고 멀리 타르소니스의 해안도시들에게 진출하면서 영향권을 넓히려 애썼다.
기원전 878년 아이라스의 동부 상업도시 '세레컴(Serecum)'을 점령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아이라스 제 연합
함대를 무찔렀다. 메이포스는 세레컴을 연합의 '보호령'으로 공포했고 강력한 함대를 파견하여 아이라스의
도시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었다.
또한 기원전 837년 타르소니스의 포톤(Poton)을 점령하는 한편, 상업 중심지 카달(Kadal)과 농경도시 셋업(Setup)의 정치권을 손에 넣기도 했다.
풍요로운 타르소니스의 지배는 어떤 나라이든지 간에 꿈꾸는 것이었다. 메이포스는 동북해안 도시들을
제압하면서 서서히 내륙지방으로 진출했다. 메이포스 연합의 함대는 남서쪽의 차 섬에도 진출하면서
아이우인들의 심기를 압박했다. 메이포스의 상선단은 아이우 왕국의 도시들에 끊이지 않고 드나들었으며
멀리 페닉시아 연합과 그들의 본토인 퓨리낙스까지도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785년 메이포스의 원정 함대는 페닉시아 연합과 사라 섬의 연합함대를 무찌르고 상업항로를 뺴앗
기에 이르렀따. 기원전 773년 차 섬의 동북 해안 도시 아이란(I-Ran)에 상륙하여 보호령을 삼았고 주변의
메인트(Maint),조카(Joka),모미사(Momisa)등의 자유 도시들을 메이포스 연합에 참가시켰다.
대략 이때를 전후해서 메이포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메이포스의 정치는 상업귀족과 함대를 가진
사령관이 주체가 된 과두정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유지니아 본토의 약 10개의 동맹국과 30여개의 보호국
들로 이뤄진 연합의회는 가장중요한 입법기관이었다. 물론 시간이 갈 수록 연합외회는 메이포스 자체의
행정기관이 되어 버렸고 동맹국들도 메이포스의 부속도시로 전락되었다.
메이포스의 함대는 처음에는 연맹의 이름으로 소유했으나 외부식민지가 늘어나면서 연안함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함대를 도시 직속 함대로 바꾸었다. 메이포스는 주로 도시국가에 대한 압박이나 상업격로공격을
통해 영향권을 넓혔고 강력한 함대를 통해서 그 질서를 통제했다.
한편 에이-수에즈는 메이포스의 활발한 서방진출에 밀려 상업격로의 차지에 뒤쳐지고 있는 편이었다.
에이-수에즈 연합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동 유지니아해를 개척하기로 하고 각지에 있는 섬들에 계획
적으로 항구와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백년전부터 해적들이 날뛰는 곳이었던 프로녹스(Fronox)와 아이달로스(I-Dalos)는 곧 에이 수에즈의
중요한 자원 공급처로 바뀌었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농업생산을 자랑하는 두 섬들은 점차 에이 수에즈에게
큰 부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멀리 아이우 왕국에선 정치가 극히 혼란한 상황에 있었다. 때문에 난을 피해
많은 선단이 이쪽 프로녹스와 아이달로스에 정착했고 에이수에즈는 이를 정책적으로 장려해 두 섬들은
한세기가 지나기 전에 풍부한 산물과 뛰어난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들로 변모했다.
아이달로스를 개척하면서 에이수에즈는 동 유지니아해의 상업로를 개척했다. 곧 한연방과 고구려 왕국과
자유무역을 할 수 있는 상업격로를 만든 것이었다. 이로서 아이달로스에는 거대한 상업도시가 만들어
졌고 이것은 서부 상업로를 거의 차지하고 있던 메이포스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아이수에즈인들은 대함대를 멀리 동쪽의 일로니아 열도에 파견해 아직도 은신하는
해적들을 무찌르고 도시를 건설했다. 보석과 향료무역의 산지로서 이들 도시들은 중요시 되었고
기원전 9세기 말 8세기 초에 이르자 에이수에즈 연합 자체가 개척한 상업로와 산지,시장이 완벽한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이렇게 쌓아지는 부를 바탕으로 에이 수에즈 연합은 서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메이포스보다 에이수에즈
인들에게 더 친근하게 대하는 아이우 인들에게 접근해 상업도시 콩클레이브(Cong-Klave)와 나이스(Naise)
를 에이수에즈의 영향이 짙은 도시로 만들었다. 이것은 메이포스 인들의 심기를 자극해 기원전 732년,
콩클레이브 앞바다에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르게 되었다. 아이우 인들과 연합한 에이-수에즈의 연합함대는
메이포스 함대를 완파했고 이로서 에이수에즈는 아이우 왕국과의 상업격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에이-수에즈의 상선단은 타르소니스 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동부해안의 도시들에 대한 영향을 증대
시키자 이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메이포스와의 갈등이 증대되어 결국 함대결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기원전 715년, 타르소니스의 카달 앞바다에서 메이포스와 에이 수에즈 양 연합함대간의 대규모
함대결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대승한 에이-수에즈는 타르소니스섬에 대한 영향권을 확대했다.
기원전 713년, 메이포스가 차지하고 있던 대규모 상업도시 카달을 점령하고 그 이름을 뉴-에이수에즈
(나-아이-수에즈 Na-I-Suez)로 명명했다. 이윽고 메이포스가 차지하고 있던 타르소니스의 도시들을
하나둘 점령하면서 기원전 7세기 초에 이르러 동북해안의 헤게모니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에이-수에즈 연합이 메이포스의 '보석'중에 가장 중요한 타르소니스를 빼앗자 그 힘은 메이포스를 압도
했다.
에이수에즈 연합은 메이포스 연합과는 달리 제 도시의 독주가 심하지 않았다. 함대와 식민지도 연합의
이름으로 항상 소유했고, 도시국가 연합회의도 오랬동안 중요한 입법기관으로 존재했다. 또한 자연과학
과 각종 미술이 발달하여 메이포스보다 문화적으로 더 앞선 도시라는 평을 들었다.
한편 에이수에즈 연합에 많은 땅과 상업로를 빼앗기자 메이포스인들은 당황했고 영광을 찾기위해
여러가지로 방책을 꾸몄다. 메이포스 인들은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아이라스에 본격적으로 진출함으로
힘을 되찾을것을 게획했다. 기원전 689년,차 섬에 있었던 원정함대의 기지를 세레컴으로 옮기고
아이라스 각 도시들에 대한 영향권을 증대시켰다. 도시국가 연합 아이드나(I-D-Nar)가 이끄는 함대를
무찌른 메이포스는 도시국가 아이돌(I-Dol)과 아이시크(I-Seak)를 점령했다. (기원전 669년)
그러나 메이포스의 아이라스 지배에는 진통이 많아 메이포스 인들은 많은 노력과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돼었다. 많은 전투와 돈을 들인 끝에 메이포스는 동부 아이라스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립했다.
당시 에이수에즈의 세력은 날로 증대되고 있었고 많은 동맹국들이 이에 걱정하고 있었다. 동맹국의
충성을 위해서라도 메이포스는 적극적인 대외공략책을 써야만 했다.
북방에서 통일 왕국인 한 왕국이 출현하자 메이포스는 신중하게 전략을 짜야했다. 메이포스는 한 왕국
의 독주를 우려하는 아이라스인들과 아킬레인들의 심기를 이용하여 상당한 동맹국들을 만들었다.
에이-수에즈는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한 왕국을 이용하여 메이포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어 결국 포트로스(Pot-ros)의 먼 바다에서 양국 함대간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한 왕국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서유지니아해 제 도시들을 연합하는데 성공한 메이포스의 연합함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메이포스는 전함대를 동원하여 에이-수에즈 본토를 위협했고 아이카스에선 농성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 에이수에즈 연합은 타르소니스의 원정함대 기지에 급히 연락하여
함대구원을 요청했고 200여척의 대규모 함대가 본토로 이동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이미 몇주전부터 세레컴의 함대기지를 떠난 메이포스의 특별 기동함대가
타르소니스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수에즈의 함대가 타르소니스를 떠난지 몇일만에 메이포스의
함대는 뉴 에이수에즈를 급습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손을 못쓴 타르소니스의 에이수에즈 도시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기원전 636년)
이 사건을 전후해서 에이수에즈의 화려한 독주는 막을 내렸다. 타르소니스의 질서가 일시적으로
와해된 틈을 타서 메이포스의 함대가 포톤에 상륙하여 내륙에서 에이수에즈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메이포스는 타르소니스 전체에 대한 영향권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북방의 몇개 도시를 회복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기원전 7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양국간의 힘이 엇비슷해졌고, 오랜 전쟁에 지쳐 내실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양국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웃하고 있는 도시국가
사이에선 식민지이든지 본토이든지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다.
양 도시국가 연합이 동지중해를 제압하고 있었던 기원전 7~8세기 무렵의 시니악스 지방은 최성기를
맞이했다. 지중해 각지에서 오는 특산품과 진상품, 각종 무역품과 약탈품이 메이포스와 에이수에즈를
장식했고 두 도시들은 동지중해 최고 최대의 규모로 성장했다. 부가 증대되고 정치가 안정되면서 양국의
문화는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했다. 동지중해의 '그리스 문화'인 퓨리낙스의 문화위에 독특한 해양문화와
농경문화, 아이우의 문화가 접목된 수준놓은 시니악스 문화를 창조했고 이 문화는 고려-한 연방의 문화
에 영향을 주어 지중해 전체의 문화적 저변에 그 모습을 남기게 되었다.
최성기에 달한 시니악스의 도시들 바로 위 북방에선 한 왕국이 성장하고 있었다.
반목하기만 했던 메이포스와 에이수에즈의 도시들도 이 새로운 통일왕국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더구나 한 왕국이 고구려의 지방 세력과 전쟁을 시작하자 동북지중해의 제 세력들은 모두 고구려 지방
세력의 편에 들어 한 왕국을 위협했다. 끝내 이 전쟁에서 한 왕국이 패하자 시니악스의 도시들과 이와
연합한 아이라스의 도시들은 고구려의 연방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애썼고 그것은 원치않은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서안평 사건이후 반목했던 고구려의 연방국들과 한 왕국간에 우호가 추진되었고 이것은 시니악스의
도시들에게 그닥 좋지못한 위기감을 전해주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자 메이포스는 아이라스 도시들이 자국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을
누를수 있는 힘이 없어졌음을 통감했다...하나 둘씩 독립을 외치면서 연합에서 떨어져 나가는 도시들이
많아졌고 타르소니스 섬의 도시들도 자주권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아이수에즈도 상황은 비슷했다. 에이 수에즈가 연합의 이름으로 개척하고 발전시켰던 프로녹스와
아이달로스의 도시들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고, 점차 본국의 영향력은 감소해 나갔다.
또한 두 도시국가 연합의 힘을 지탱해주던 강력한 원양함대가 주둔도시화됨에 따라 이들 함대에 대한
본토도시의 명령권도 유명 무실해져갔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서 시니악스의 도시들은 이전의 영광에서 많이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에 이르자 북방에선 한 왕국과 고구려 연방이 한 국가로 통일되어 고려-한 연방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동지중해의 패자는 시니악스의 도시들이 아니라 이 강대한 통일국이 될것임은 자명했다.
기원전 5세기 이후, 시니악스의 도시국가들은 이전의 군사적 영향과는 대조적으로 주로 상업적이나
문화적으로 발달했다. 가장 뛰어난 대학과 도서관이 에이수에즈에 있었고, 아직도 동북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는 메이포스였다.
기원전 378년, 에이수에즈는 이미 통제 불능에 이른 프로녹스와 아이달로스를 사실상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고 대신 에이수에즈 연방이라는 틀안에 존재할 것을 천명했다.
말뿐인 영광이지만 이 연방은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도 존재했고 동북지중해에서 시니악스 도시들의
건재함은 기원전 3세기 까지도 아이라스,타르소니스,동 유지니아 해에서 입증되었다.
아직 빛을 발하고 있는 도시들인 메이포스와 에이수에즈 연합은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고려-한 연방
에게 기원전 132년,123년에 각각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독자적인 그들의 시대를 마감했다.
물론 AD 1세기 초까지도 두 도시국가들은 특별행정구역으로 자치가 허용되었고 지중해의 통일 이후에도
독자적인 문화의 색을 방출했다.
#. 남부 유지니아 (시니악스)지역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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