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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같이보자] 저출산 원인은 여성에게 불리한 근무환경
이라고 주장하는 그냥 교수도 아닌 “명예”교수님의 왈군대에서 부사관 한녀 육휴 3년간이나 연장해서 내 후배혼자서한녀 보직 일까지 덤탱이 씌여서 자긴 주특기 업무랑 같이 처리하느라 죽을라 하더라...겸직까지 남자들에게 독박씌우는 주제에 여성차별 같은 소리 하는거보면 어이없음다들 어케생각함?https://youtube.com/v/Dhd37Whu4ag?si=ksDpW32Zv-YXjySM 한국 망했다고? "이대로면 끝나"…애 낳으라지만 "이상한 나라"|지금 왜결혼한 여성이 아이 한 명도 잘 안 낳는 나라, 우리나라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망했다"던 세계적인 노동법 전문가에게 JTBC가 '초저출산' 문제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조앤 윌리엄스 교수는 자신도 두 딸을 키운 워킹맘이지만 아이를 낳으라고만 하는 한국이 어쩐지 이상해...youtu.be
작성자 : ㅇㅇ고정닉
[JTBC] 이종섭, 대통령 개인전화 직후 '박정훈 보직 해임' 지시
- 관련게시물 : [단독] 02-880 대통령실 전화 확인‥168초 통화채 상병 사건 수사를 경찰에 맡겼다가 갑자기 다시 찾아온 날, 그리고 경찰에 그 사건을 보낸 해병대 자체 수사단장을 보직 해임한 날 모두 지난해 8월 2일입니다. 바로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로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세 차례 전화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시간상으로만 따져보면 특히 이중 대통령과의 첫 번째 통화를 끊은 뒤 장관은 곧바로 이어서 수사단장의 보직 해임을 지시하는 전화를 걸었습니다.이 전 장관은 대통령 통화와는 무관한 지시였다고 반박했는데 먼저 김민관 기자 보도 보시고 스튜디오에서 따져보겠습니다.해병대수사단이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결과'를 경찰로 넘긴 지난해 8월 2일.윤석열 대통령은 개인 휴대전화로 이종섭 장관에게 전화를 겁니다.12시 7분 44초에 시작된 통화는 4분 5초간 이어졌습니다.통화를 마친 뒤 이종섭 장관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을 통해 박정훈 수사단장에 대한 보직해임을 지시한 것으로 파악됩니다.이종섭 장관 측은 오늘 밝힌 입장문에서 12시 12분에 보직 해임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윤 대통령과 4분여간 통화를 마친 직후입니다.다만 이 장관 측은 "보직해임 조치는 대통령과의 통화 이전에 이뤄진 항명죄 수사 지시에 따른 수반 조치"라며 "장관의 권한에 따라 내려진 정당한 지시"라고 주장했습니다.보직해임 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윤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두 차례 더 전화를 걸었습니다.통화는 각각 13분 43초, 52초간 이어졌습니다.그리고 12시 57분 마지막 통화가 끝나고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후 1시 50분,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경북경찰청 수사부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사건을 국방부로 회수하기 위한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겁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4851[앵커]바로 이어서 이 사건 취재하고 있는 유선의 기자와 이종섭 전 장관의 주장, 따져보겠습니다.유 기자, 이종섭 전 장관은 자신이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기 전에 이미 박정훈 전 단장에 대해 항명죄로 수사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대통령과는 무관한 지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부분부터 따져볼까요?[기자]통화기록을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허점이 드러납니다.윤 대통령과 첫 통화는 8월 2일 낮 12시 7분인데 박 전 단장에 대한 항명 혐의 수사 지시는 낮 12시 5분이라는 게 이 전 장관 측의 주장입니다.그런데 이 전 장관은 바로 그 직전인 오전 11시 49분에 조태용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3분 가까이 통화했습니다.대통령실 최고위 참모와의 통화 직후에 수사 지시를 내린 건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이 대통령 뜻과 무관한 지시였다고 주장하는 겁니다.[앵커]또 중요한 건 경찰로 넘어간 사건을 다시 찾아오라고, 대통령실이 지시했는지인데, 그에 대한 해명은 없었습니까.[기자]이 전 장관이 박 전 단장에 대한 항명죄 수사를 지시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회수가 진행된 거라고 해명했습니다.하지만 기존에 내놨던 '사건 회수는 사후 보고를 받았다' 즉, 나중에 알았다는 입장과는 다소 다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선 해명하지 않았습니다.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의 통화는 이날 낮 12시 7분과 12시 43분, 12시 57분 이렇게 세 번입니다.그런데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경북경찰청 수사부장에게 전화해서 사건 회수를 협의한게 오후 1시 50분이거든요.이 전 장관이 대통령과 통화하고 채 1시간이 안돼서 국방부가 사건을 회수하기 시작했는데, 전화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그냥 '무관하다' '항명죄 수사에 따른 당연한 조치였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앵커]그리고 이날 대통령실이 전방위로 국방부와 통화한 기록도 나왔죠?[기자]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윤 대통령 그리고 조태용 실장이 이 전 장관과 통화했고요.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도 이날 오후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과 통화했습니다.그리고 대통령실 경호처도 등장합니다.경호처 고위 간부가 이날 오전 11시 32분에 이 전 장관의 보좌관에게 전화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사건이 경찰로 넘어가고 회수하는 과정에 윤 대통령과 안보실, 공직기강비서관실, 경호처가 이 전 장관 측과 여러 차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채 상병 순직 사건을 경찰에서 회수해온 이날 왜 대통령실의 각 부서가 전방위로 국방부와 접촉했는지 수사로 규명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4853- [채널A] 대통령-이종섭 3회 통화에 민주 “스모킹건.. 박근혜 태블릿”채 상병 사건 자료를 경찰에서 회수하던 날, 윤석열 대통령이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과 세 차례 통화한 걸 두고, 민주당은 "수사 외압의 스모킹건"이라며 공세 수위를 높였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결정적 계기가 된 '태블릿PC'에 비유하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채 상병 사망사건과 관련해 결정적인 내용이 수사에서 나오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공수처 수사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8월2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과 세 차례 18분40초 간 통화한 내역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그 날은 국방부가 '채 상병 사망사건' 조사 보고서를 경북경찰청으로 이첩했다 회수한 날입니다. 민주당은 그 날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보직 해임 과정이나 조사 보고서 회수 과정에 대통령 통화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이 전 장관은 대통령 '외압설'에 선을 그은 바 있습니다.이 전 장관 측은 오늘도 "대통령의 격노를 접한 사실이 없으며 대통령실 그 누구로부터도 '사단장을 빼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는 입장을 냈습니다.민주당은 대통령의 통화 사실을 앞세워, 채 상병 특검법 압박 수위를 더 높일 예정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49/0000276204- [MBC] 곳곳 드리운 尹의 흔적.. 최초 통화 6일 뒤 또 전화어제부터 전해드린 대로 윤석열 대통령 통화 기록이 나오면서, 채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은 '대통령실 개입'에서 '대통령 개입'으로 의혹의 국면이 전환됐습니다.그런데 잠시 뒤 MBC 단독보도를 통해서 전해드리겠지만, 공수처는 이미 작년 연말,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의 통화 내역을 파악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은 공수처의 압수수색 대상에서 빠졌던 거고, 호주대사로 임명됐던 이 전 장관은 휴대전화를 바꾼 상태죠.오늘 뉴스데스크는 새 국면을 맞은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집중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먼저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의 주요 전환점마다 등장하는 이종섭 전 장관의 통화 내역, 구나연 기자의 보도부터 보시죠.이종섭 전 장관의 통화 내역에 대통령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건 지난해 7월 31일.02-800으로 시작하는 대통령실 유선전화입니다.이후 해병대 수사 결과 발표가 갑자기 취소됩니다.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VIP 격노설을 들었다고 지목한 바로 그날입니다.이틀 뒤인 8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이 개인폰으로 이 장관에게 직접 전화합니다.거의 1시간 사이 3차례 연달아 합니다.이후 박정훈 대령이 보직해임됐고 군 검찰이 박 대령에 대해 수사에 나섰습니다.경찰에 넘긴 사건 기록을 반나절 만에 군이 다시 가져왔습니다.그리고 8월 8일, 윤 대통령은 또다시 이 장관에게 전화를 겁니다.당시 국방부는 경찰에서 되가져온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던 중이었습니다.이후 원래 8명이었던 과실 치사 혐의자는 임성근 1사단장이 빠지고 2명으로 축소돼 경찰에 다시 넘어갑니다.채상병 순직 사건 주요 국면마다 통신 내역에 대통령실이나 윤 대통령 번호가 등장한 겁니다.이종섭 전 장관의 통화 내역을 보면 대통령실 인사와 고위 관료도 광범위하게 등장합니다.조태용 당시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임종득 당시 안보실 1, 2차장, 김용현 경호처장,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한덕수 국무총리 등입니다.이에 대해 이종섭 전 장관 측은 통화 기록 중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부분은 결단코 없다고 했지만, 앞으로 공수처 수사에서 진실이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51674주요 국면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날짜별로 보겠습니다.이종섭 전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결과 발표를 취소한 작년 7월 31일.바로 직전에 대통령실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요.해외 출장까지 잡혀있던 이 전 장관은 해병대 부사령관을 급히 집무실로 불렀고, 이 자리에서 "누구누구 수사 언급하면 안 된다"는 구체적인 지침이 오갔습니다.작년 7월 31일 오전,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실 전화를 받습니다.02-800으로 시작하는 유선번호입니다.그 번호로 전화해 어디인지 물어봤지만, 소속을 밝히지 않았습니다.그날 이 장관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오전 11시 54분.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안보실 회의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조태용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안보실 1차장, 임기훈 비서관 등이 참석했습니다.조태용 실장에게는 오후로 예정된 해병대 수사단 언론브리핑 자료가 전달된 상황이었습니다.이날 윤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채상병 사건 보고는 없었다는 게 지금까지 대통령실 입장입니다.이종섭 장관과 대통령실 통화는 168초간 이어졌습니다.통화가 끝나고 14초 뒤 이 장관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로 브리핑 취소를 지시합니다.그리고선 오후 2시 20분쯤 정종범 해병대 부사령관을 집무실로 부릅니다.이 자리에서 정 부사령관이 메모한 기록에는 "누구누구 수사 언급하면 안 됨", "사람에 대해 조치하면 안 됨" 같은 내용이 담겼습니다.이에 대해 이 장관 측은 누구도 사단장을 빼라고 자신에게 지시한 적 없다며 브리핑 취소는 본인이 결정했다고 주장했습니다.이 장관은 이후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고, 오후 2시 56분에는 윤 대통령 주재 오전 회의에 참석했던 임기훈 국방비서관과 11분 넘게 통화 합니다.임 비서관은 이날 오후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통화를 한 인물로, 김 사령관에게 이른바 'VIP 격노설'을 전한 것으로 지목되는 인물입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51675이종섭 전 장관과 윤석열 대통령의 통화는 작년 8월 2일 집중적으로 이뤄집니다.검사 시절부터 쓰던 개인 폰으로 윤 대통령이 직접 세 차례나 연달아 전화를 걸었는데요.이날은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해병대가 경찰에 넘긴 수사기록을 군이 다시 가져온 날입니다.이날 윤 대통령 외에도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데요.국가안보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움직였습니다.지난해 8월 2일 오전, 해병대 수사단이 채상병 사건 기록을 경북경찰청에 넘깁니다.혐의자는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 등 모두 8명.이첩이 끝날 무렵, 조태용 당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이종섭 국방부장관과 연락합니다.오전 11시 45분 문자메시지에 이어 11시 49분 통화가 이뤄집니다.이 장관은 우즈베키스탄 출장 중이었습니다.전화가 끝나자 출장을 같이 간 이 장관의 참모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장관님이 이첩 상황을 궁금해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김 사령관이 이 전 장관에게 전화합니다.이때 경찰 이첩 상황을 이 장관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등장합니다.이 전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검사 때부터 쓰던 개인폰이었습니다.낮 12시 7분부터 4분5초간, 12시43분부터 13분43초간, 12시57분부터 52초간 모두 18분40초 통화했습니다.거의 1시간 동안 연달아 세 차례입니다.윤 대통령의 첫 통화가 끝나고 30여분이 지난 12시45분.김 사령관이 자신을 집무실로 불러 보직 해임을 통보했다는 게 박정훈 대령 주장입니다.이후에도 임종득 당시 국가안보실 2차장과 김계환 사령관의 전화 통화가 세 차례 이어집니다.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도 등장합니다.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 경찰에 전화해 사건 기록 회수를 미리 조율했고, 상관인 이시원 비서관은 국방부 법무참모와 통화했습니다.이종섭 전 장관 측은 대통령과 통화 내용은 공개하기 적절하지 않다면서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수사 지시와 사건 기록 회수는 대통령 통화와 무관하게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경찰에 넘어간 사건기록은 이날 반나절만에 군이 되가져왔고, 박 대령에 대한 군 검찰 수사도 시작됐습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51676지난해 8월 2일에 이어서 8월 8일.이종섭 전 장관과 윤석열 대통령의 통화는 이날 아침에도 등장합니다.국방부가 채 상병 사건 기록을 경북경찰청에서 회수한 뒤, 누가 사건을 맡을지 결정되지도 않았던 시점이기도 한데, 이 통화 다음날, 재검토를 거부하던 국방부 조사본부는 이 전 장관 명령으로 채 상병 사건 재검토에 착수했습니다.작년 8월 8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종섭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여름 휴가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날입니다.오전 7시 55분, 33초 간 통화가 이뤄졌습니다.이후 임기훈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과 이 장관의 참모가 3차례 통화했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이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당시 국방부는 8월 2일 경찰에서 회수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론을 못내고 며칠째 논의하던 중이었습니다.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을 맡는 데 부정적이었습니다."해병대 수사단이나 국방부 조사본부나 같은 군사경찰이라, 군 검찰이 맡는 게 낫다"는 취지였습니다.하지만 이튿날인 8월 9일, 이 장관의 명령으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재검토에 착수했습니다.윤 대통령과 통화가 국방부가 사건을 다시 맡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입니다.이 전 장관 측은 이에 대해 "8월 8일은 잼버리 사태 때문에 윤 대통령이 휴가에서 조기 복귀했다"며 "대통령과 통화는 잼버리에 관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습니다.이후 국방부 조사본부는 해병대 수사단이 처음에 혐의자로 적시했던 8명 가운데, 6명은 빼고 대대장 2명만 혐의자로 적시해 경찰에 넘겼습니다.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사건 기록에는 남겨뒀지만 혐의자에서는 제외했습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51677이종섭 전 장관과의 통화 내역이 나온 휴대전화 번호는,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 시절부터 써온 개인 번호입니다.일반인들에게까지 노출된 번호인데,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이 번호를 계속 사용해 온 걸로 추정됩니다.그런데, 대통령이 개인 전화로 업무 관련 통화를 하는 건 문제가 없는 걸까요?지난해 8월 2일 오후 12시 7분.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받은 전화.윤석열 대통령이 개인 명의로 개통해, 검찰 시절부터 써 온 옛날 전화번호였습니다.취임한 지 1년이 훨씬 지난 시점인데도, 윤 대통령 개인 명의의 휴대전화로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가 걸려온 겁니다.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윤 대통령 본인이거나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대통령에 취임하면, 즉시 비화폰이 제공됩니다.도청 가능성을 줄인 장비인데, 다소 무거워 휴대가 불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별도의 업무용 휴대전화도 나옵니다.이 역시 경호처가 수시로 보안을 점검합니다.대통령의 통화에는 국내 현안뿐 아니라 외교 안보 등 각종 중요한 정보가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성자 : 정치마갤용계정고정닉
스압) 미국 파인애플의 역사...jpg
오래 전 남아메리카 파라나-파라과이 강 유역에서 자라나던 과일이 있었다.. 남미 일대에서 나나스(맛좋은 과일)이라고 불리던 과일은 자연과 인간에 의해 점점 북상하여 멕시코와 카리브 해 일대까지 이르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곳곳에서 재배가 이루어져 1493년 신대륙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도 우연히 이 과일을 접한 뒤 스페인으로 가져왔는데 콜럼버스: 원주민들은 나나스nanas라고 부르던데 우린 이걸 piña de Indes(인디언의 솔방울)이라고 부르죠? 스페인인들: 아나나스(ananas)? 피냐(piña)? 아몰랑 아무거나 씁시다! 이후 북아메리카의 영미계 탐험가들은 이걸 솔방울의 모양에서 따서 Pineapple이라 부르게 된다 당시 신대륙 종자라면 무엇이든지 호기심에 넘쳐 수집하던 스페인인들은 이 기묘한 과일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을 재배하기 위한 최적의 생산지를 찾아다녔다 16세기는 스페인 함대가 전세계를 구석구석 싸돌아다니던 시절... 스페인 선원들은 괌, 짐바브웨를 포함해서 파인애플 종자를 가는 곳마다 뿌려댔고 태평양의 한적한 섬 하와이에도 그렇게 파인애플이 도착 일년 내내 따뜻한 하와이의 기후에서 파인애플은 나름 잘 자랐지만 여러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하는 하와이에서 대규모 재배가 이루어지진 않고 있었는데.. 1795년 하와이 통일왕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파인애플은 주요 수출물도 아니었고 어차피 그거 배로 실어날라봐야 푹푹 찌고 습한 환경에서 상하기 일쑤였다 당시 하와이의 주력 작물은 사탕수수였는데 19세기 전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수요증가가 이루어지던 설탕의 원료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설탕 플랜테이션을 미국 출신의 이민자들이 차지하면서 이들은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와이의 주요 산업들을 독점하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해 사회지도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칼라카우아 왕 대에 이르면 미국,유럽 출신 사업가들이 대놓고 폐위 협박까지 할 만큼.. 하와이 왕도 개길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백인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여왕의 움직임을 눈치챈 백인 유력자들은 공안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국 해병대를 상륙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1893년 1월 17일 공안위원회는 민병대까지 동원하여 여왕을 강제로 폐위 미합중국에 편입을 요청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리블랜드가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하와이 공안위원회는 샌퍼드 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시켜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와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던 시기.. 미국에서 파인애플의 인기는 계속해서 상한가를 치고 있었고 1893년 천조국에서 파인애플을 원통으로 돌려 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었는데 1분에 4개의 파인애플 껍질을 깔 수 있었다 아직 냉장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터라 맛좋은 파인애플을 장기보관하는 방법으로 통조림이 선호되었고 이 기계의 발명으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이 활기를 띈다 이 시기 미국 파인애플 통조림의 주요 원료는 카리브 해 인근 국가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는데.. 주요 파인애플 산지였던 플로리다 농부들이 거세게 반발 플로리다 농민들: 이 씨발!! 미국 파인애플 놔두고 외국꺼 쓰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사업가: ?? 뭐래 단가가 싸니까 그렇잖아 미친놈들아 억울하면 가격을 낮춰!! 플로리다 농민들: 거대 자본주의가 사람잡는다~ 가격 후려치기 때문에 농민들 다죽겠다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수입 파인애플에 대해 35%의 관세를 매겨버리고 통조림업자들은 관세 때문에 값이 오른 카리브산 파인애플을 더 이상 이용하기 힘들어져 미국 현지의 통조림 생산공장들은 수지가 악화되어 줄줄이 문 닫고 사업가들은 파인애플을 현지조달해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한편 비슷한 시기 1896년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윌리엄 매킨리가 취임 하와이 공화국은 다시 한번 러브콜을 보내는데 샌퍼드 돌: 미국응디가 그렇게 따뜻하다는데 우리도 좀 넣어주면 안 됩니까 윌리엄 매킨리: 안될거 뭐있노? 클리블랜드와 달리, 매킨리는 팅기지 않았고 1898년 하와이는 속주형태로 미국에 합병된다(아직 정식 주 아님)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샌퍼드 돌이 총독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하와이 농산물에 대한 관세가 철폐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을 할 경우 1. 관세가 없어서 카리브해 파인애플보다 유리했고 2. 하와이 원주민과 해외 이주민의 값싼 노동력으로 파인애플 경작이 가능 3. 하와이 속주정부로부터 싼 값에 농장&공장부지를 살 수 있었던 등 지원이 많음 여러모로 개이득 미국 사업가들이 하와이로 몰려들어 파인애플 농장과 통조림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갓 하버드대 농학부를 졸업한 22세의 젊은이 제임스 돌 그도 파인애플 사업에 대한 꿈을 품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갖고 하와이로 왔는데... 전직 공화국 대통령이자 현직 하와이 총독인 샌퍼드 돌이 사촌형이었다 제임스 돌은 모아둔 돈으로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64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부지를 구입 사촌형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사업준비에 착수한다 우여곡절 끝에 1901년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Hawaiian Pineapple Company)를 창립하게 되고 당시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재배업은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하와이에서 재배되던 Smooth cayenne종이 통조림 가공용으로 제격이었고 기후가 파인애플 재배하기에 딱딱 좋았고 경쟁지이던 플로리다에 서리가 자주 끼었던 데다가 파인애플 품질이 하와이산에 비해 좋지 않았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신생회사였지만 크게 두 가지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성장해 나갔다 1) 광고 공격적인 광고전략으로 미국 본토에까지 파인애플 통조림을 대대적으로 선전 라디오&신문을 이용해서 파인애플이 생소한 미국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여주고 2) 기술개발 1911년 1분에 100개의 파인애플을 돌려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자 통조림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 미국으로 더 많은 파인애플이 실려나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파인애플을 접하고 달콤새콤한 맛에 이국적인 정취가 곁들여졌고 소화에도 좋아 파인애플만 보면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이르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세계 최대의 파인애플 유통기업으로 등극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다시 여의도 면적 27배에 달하는 땅을 사들여 사업을 확장했는데 이 때 회사의 주요 경작지였던 라나이 섬에서만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의 75%가 쏟아져 나왔다 바야흐로 파인애플 사업계의 정점으로 군림하던 시기 그렇게 돈다발을 쓸어담으며 잘나가나 했는데.. 1929년 대공황이 터져버리고 당장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파인애플 소비량은 바닥을 치게 되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의 실적은 급격히 악화되고 그동안의 무리한 사업확장&실적악화로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1932년에만 5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면서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경영자였던 제임스 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지켜보던 Castle&Cooke사에서 지분을 21% 추가로 매입하면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 제임스 돌은 쫓겨나게 되고.. 하와이안 파인애플 컴퍼니는 사실상 Castle&Cooke사의 계열사나 다름없게 되어 청운의 꿈을 품고 파인애플 사업을 개척했던 한 젊은이의 외길인생은 여기서 끝이 난다 그래도 Pineapple=Dole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이후 생산되는 주요 파인애플 제품에는 Dole이라는 이름이 계속 들어가게 된다 한편 castle & cook 사의 자금지원으로 여유가 생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구상할 필요가 있었는데 통조림은 아직 냉장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통조림 위주였던 파인애플 제조업에도 변화가 필요했던 것 이미 1920년대에도 가정용 냉장고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사진은 100만개가 팔려나간 모니터탑 냉장고) 1928년 프레온 제조기술이 발명되면서 냉장기술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는데.. 경영진은 냉장보관이 필요하고, 시원하게 먹으면 좋고, 운반 및 가공이 편리하고 누구나 먹기 쉬운것을 알아냈다 파인애플 주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곧바로 파인애플 주스의 대량양산에 착수했는데 마침 1933년에 금주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칵테일 제조용으로 파인애플 주스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가게 되고 대박을 치게 된다 이 기회를 포착한 경영진은 미국 전역에 라디오와 항공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주스 광고를 선보여 1936년에 마침내 적자를 탈출하고 회사경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미국은 경제호황을 누렸고 쑥쑥 늘어나는 파인애플 제품 매출량 속에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 1961년 마침내 Castle&Cook은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를 완전히 인수했는데 Castle&Cooke사는 이후 필리핀에서 바나나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1968년에 스탠더드 프루트 회사(바나나 제국에 등장했던 그 회사임)마저 합병해서 델몬트와 쌍벽을 이루는 바나나 업계의 제왕이 되어 1991년에 Dole Food Company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 우리가 대형마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 Dole 회사가 된다 엄밀히 말하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가 Dole로 이어졌다기보다는 더 큰 회사(Castle & Cooke)에 흡수당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지만 하와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총독 사촌형이 탄생했고 그의 후원 아래 사업감각으로 파인애플 사업을 일궈내어 한때 하와이를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 3/4를 책임지는 생산기지로 만들어냈던 한 사업가의 이름이 우리가 먹는 파인애플과 바나나에 남겨진 것을 보면 이런걸 알고 먹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날 하와이는 예전의 파인애플 생산기지로서의 명성은 무색해진 지 오래 돌의 현지 통조림 공장은 수익악화로 1991년에 문을 닫았고 델몬트마저도 생산기지를 2008년 이전했다 그렇지만 하와이 곳곳에 남아있는 파인애플농장과 관광지들은 한때 화려했던 파인애플 생산지로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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