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메카=김미희 기자] 최근 엔씨소프트는 기존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점을 최우선으로 앞세우고 있다. 지난 30일에 진행된 주주총회에서도 김택진 대표가 비 MMORPG와 콘솔에 진출하며 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밝힌 바 있다. 이 중 콘솔 선봉장에 설 게임은 올해 4분기 출시를 예정한 TL(Throne and Liberty)이다. TL은 장르적으로는 엔씨소프트가 주력해온 MMORPG이지만, 엔씨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PC∙콘솔 멀티플랫폼 타이틀이다.
이와 함께 TL에서 엔씨소프트가 처음으로 도전하는 분야가 또 있다. 각기 다른 게임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일명 ‘공유 세계관’이다. TL은 엔씨소프트가 개발 중인 또 다른 신작 ‘프로젝트E’와 세계관이 동일하다. 제작진이 두 게임을 위해 구축한 ‘노브크레아 월드’라는 가상의 행성이 있고, 이 행성 안에 TL과 프로젝트E 주 무대가 되는 대륙이 공존한다. TL은 서양 중세 콘셉트를 앞세운 ‘솔리시움’ 대륙, 프로젝트E는 동양 중세풍을 앞세운 ‘라이작’ 대륙을 중심으로 한다.
같은 행성에 있는 다른 대륙이라는 점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신을 봉인하려다 실패했던 사건이 TL에서는 전쟁의 서막이 되고, 프로젝트E에서는 대륙에 기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TL에서 벌어진 부족전쟁에서 피신한 엘프와 오크 종족 일부가 프로젝트E에 정착해 각각 니르바와 야차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같은 행성에 있는 두 대륙을 무대로 하기에 시간대도 동일하게 흘러간다.
이러한 공유 세계관은 게임은 물론 만화, 영화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요소로 자리했다. 영화에서는 만화와 독립된 독자적인 세계관을 무대로 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게임에서도 던전 앤 드래곤, 워해머 등 고전 보드게임에서 구축된 세계관을 토대로 여러 타이틀이 파생됐다. 던전 앤 드래곤은 발더스 게이트, 네버 윈터 나이츠 등으로 뻗어 나갔고, 워해머는 세계관 자체가 워해머 판타지, 에이지 오브 시그마, 워해머 40,000으로 분화되며 수없이 많은 게임이 탄생했다.
세계관은 팬심을 응축하는 ‘구심점'
공유 세계관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은 세계 자체가 팬심이 응축되는 구심점이 되어, 고정 유저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 특정 게임에 매력을 느낀 게이머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게임에도 흥미가 생겨 유입되고, 세계관 자체에 정착하는 선순환구조가 완성될 수 있다. 완성하기 어렵지만 잘 구축해서 일정 궤도에 올려두면 신작을 추진할 때도 초기부터 풍부한 소비자층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다.
실제로 앨런 웨이크, 컨트롤을 기점으로 같은 세계관을 여러 게임이 공유하는 ‘레메디 커넥트 유니버스’를 전개하고 있는 레메디 엔터테인먼트 샘 레이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각 게임은 독립적인 타이틀인 동시에 흥미로운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통해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게임에서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는 ‘타입문’이다. 소설 ‘공의 경계’에서 시작된 타입문 세계관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공존하는 어반 판타지에, 상상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과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는 설정을 토대로 한다. 시작은 소설 공의 경계였으나 작년에 리메이크 버전 출시로 화제로 떠올랐던 월희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후 멜티 블러드, 페이트 시리즈 등으로 확장되며 거대한 팬덤을 이뤘다. 각 게임에 대한 주목도도 높지만 타입문 세계관 자체가 가진 흡입력도 상당한 수준이라 평가되고 있다.
여신전생도 또 다른 성공 사례다. 이 역시 악마소환을 테마로 앞세운 소설 ‘디지털 데빌 스토리’를 원작으로 아틀라스가 개발한 게임에서 출발했다. 여신전생 시리즈 자체도 파이널 판타지, 드래곤 퀘스트와 함께 일본 3대 RPG로 손꼽힐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여신전생을 필두로 진∙여신전생, 페르소나, 소울 해커즈 등 게임 시리즈 다수가 뿌리를 뻗어나갔다. 소울 해커즈는 지난 2월에 신작이 공개됐는데 25년 만의 후속작임에도 많은 팬들이 반가움을 표했고, 여러 게임을 통해 구축된 매력적인 세계관이 그 근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한 느슨한 연결이 핵심
공유 세계관을 추진할 때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 균형을 잡는 것이다. 세계관을 상징하는 특징과 테마가 명확하면서도, 같은 세계를 무대로 각기 다른 개성과 재미를 지닌 타이틀을 만들 수 있는 자유도와 확장성이 있어야 한다. 소위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느슨한 연결’이 핵심이다. 앞서 소개한 여신전생, 타입문 등도 빡빡하지 않으면서도 각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적정한 연계를 앞세웠다.
반면 해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설정이 과하거나 세계관이 제한될 경우 매너리즘에 빠져 흥미가 낮아질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월드 오브 다크니스’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음지에 뱀파이어와 같은 괴물이 살아가고, 판타지 요소를 실제 역사와 결합해 ‘역사 속 유명 인물이 알고 보니 인간이 아니었다’는 설정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전개될수록 설정이 비대해지고 중요 인물이 과하게 늘어났다. 이는 게임 속 주인공이어야 할 플레이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도로 낮아지고 플레이가 고착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코난’ 세계관 역시 만화, 영화에서는 원작 세계관을 더 발전시키며 흥행했으나, 게임에서는 세계관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며 참패했다.
다시 말해 세계관은 게임이 전개되는 무대이자 팬층을 응집시키는 구심점에 그쳐야 하고, 세계관이 각 게임을 압도하는 구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세계관 자체가 신규 유저에게 일종의 진입장벽이 될 우려가 높다. 여러 게임이 강하게 결속된 구조를 보여주고 싶다면 공유 세계관보다는 전작 뒤를 이어가는 후속작을 전개하며 시리즈로 묶어나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다른 방향의 이야기지만 닌텐도는 젤다의 전설 정도만 여러 타이틀을 묶는 느슨한 타임라인이 있을 뿐, 대표 시리즈에서 각 타이틀을 스토리와 세계관으로 강하게 연결하지는 않는다. 지난 25일 출시된 별의 커비 디스커버리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만든 닌텐도 산하 HAL 연구소 쿠마자키 신야 제너럴 디렉터는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를 통해 “커비에 대한 명확한 타임라인은 없다. 이는 과거 설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랜 역사를 지닌 시리즈에서도 쉽게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며 최적화된 플레이를 제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기 위함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너지를 주면서도 느슨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
따라서 엔씨소프트의 신작 TL과 프로젝트E 역시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면서도, 서로를 과하게 구속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게임 자체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이를 묶는 세계관을 파고들 만한 재미가 있는 수준으로 완성하는 것이 TL과 프로젝트E가 동반 성장하는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제작진은 TL에 대해 기존 엔씨소프트 게임보다 응집력 있는 세계관과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있다. 이와 함께 여러 줄기로 다양한 이야기가 파생될 수 있는 큰 축을 설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두 게임의 기원은 같되, 서로 분리된 문명과 역사로 독립성을 살려 각기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다.
과연 엔씨소프트가 공유 세계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TL과 프로젝트E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느냐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특히 막을 올릴 TL이 완성도와 흥행 면에서 모두 괄목할 결과를 보여줘야 이후에 등장할 프로젝트E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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