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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의 사진들
최초의사진 -1827년 프랑스에서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찍음 최초의 셀카 - 1839년 미국의 사진작가 로버트 코널리우스가 자신의 셀카를 찍음 최초의 대통령 사진 - 1843년에 찍힌 미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최초의 태양 사진 - 1845년 프랑스 물리학자 이폴리트 피조, 레옹 포코가 촬영 최초의 컬러 사진 - 1861년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경이 연구실에서 찍음 최초의 항공 사진 - 1860년 미국 사진 작가 재임스 윌리스 블랙이 보스턴을 1200피트 상공에서 찍음 달에서 찍은 최초의 지구 사진 - 1966년 미국의 달탐사선 루나 오비터 1호가 촬영 인터넷에 최초로 업로드 된 사진 -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의 여직원과 친구들을 찍은 사진으로 1992년 최초로 인터넷에 업로드됨 최초의 번개 포착 사진 - 1882년 영국 사진작가 윌리엄 제닝스가 촬영에 성공최초의 화성 표면 사진 - 1976년 미국의 화성 착륙선 바이킹 1호가 찍음 최초의 X래이 사진 - 1895년 x선을 발견한 빌헬름 뢴트겐이 자신의 부인의 손을 x선으로 찍음 최초의 디지털 사진 -1957년 디지털 이미지 스캐너를 최초로 개발한 미국의 러셀 커쉬가 자신의 아들의 사진을 디지털로 스캐닝하여 디지털 사진으로 만듬
작성자 : ㅎㅇㅀ고정닉
한국건축의 이해 - 1부 [목조건축 개론]
[한국건축의 이해]는 한국 전통건축의 구조와 역사에 대하여 자세하게 해부하는 글이 될 것 같음. 일단 목조건축에 대한 부분이 앞쪽 2~3부의 내용이 될 것이고, 그 이후는 차차 생각해보려 함. 여기 갤에 몇 달 글을 쓰며 생각하게 된 점 중 하나는 여기서 논의되는 한국 전통건축에 대한 내용이 굉장히 제한적이고 단차원적이라는 것임. 따라서 그 주제가 심히 지엽적이고 디테일한 부분으로 늘어지는 경우가 자주 보임. 물론 종종 놀랄 정도로 깊이 있는 의견을 갖고 있는 갤러들도 보이지만, 그런 갤러들은 극소수에 불과함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함. 여기서 단차원적이라고 함은 하나의 소재를 직접적으로 조경 등에 이용하는 일대일 대응식 활용을 말함. 물론 이러한 접근방식 또한 옳지 못하다는 것이 아님. 그러나 건축의 본질은 아니라고 봄. 나는 건축이란 이런 미시적 영역에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조체 그 자체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그 심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건축의 핵심이라고 생각함.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중 현대건축에 있어서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서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갤러들이 많지만 전통건축에 있어서는 이러한 면모가 부족해 보임.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전통건축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듦. 건축에 담긴 철학과 구조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은 단순히 건물의 스케일 내지는 부분적 요소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님. 그렇기에 건축물의 규모나 장식성에서 한계가 드러나는 한국의 전통건축을 활용할 때 이러한 논의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함. 또한 나는 우리 건축은 이런 면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함.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무능했던 500년간의 조선왕조 집권 기간 동안에도 그들의 철학을 건축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우리 건축에서 계승할 부분은 충분해 보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입도 놀리지 말라는 거냐'고 반문할 수 있음. 물론 이런 취지의 글은 아님. 다만,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에 대한 어느 정도 수준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입장임. 물론 나도 비전문가로서 이런 주제에 대하여 설명할 계제는 못 된다는 점은 알고 있음.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가감없이 지적해 주길 바람. 또한,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동녘 2007)을 참고하였음을 알림. 한국건축의 구조에 대하여 세세하게 알기 쉬운 말로 풀어 썼기에 읽은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헷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종종 참고하는 책임.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전문이 올라와 있으니 글이 올라오는 주기를 기다리기 어렵다면 읽어보기 바람. 사진은 모두 출처를 표시했으며, 그림은 주로 위의 책에서, 사진은 주로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음. 기타 출처표시 없는 사진들은 내 사진임. [황주 성불사 응진전 가구해체 중, 맞보의 모습. 사진 : e뮤지엄] 1부에서는 전반적 내용에 대한 개괄로, 한국 전통건축의 기본이 되는 부분부터 설명하려 함. 이전에 [문화재 복원에 대하여]란 글에서 동양건축의 기본은 보, 도리, 기둥이며, 이는 각각 좌표평면상의 x축, y축, z축에 대응한다고 언급한 바 있음. 여기서 일단 기둥이 z축이라는 점은 모두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함. 또한 대들보는 건물의 기둥과 기둥을 앞뒤로 연결하는 가장 긴 보임. 위 사진에서 좌우면이 각각 건물의 전면과 후면이고, 보가 그 기둥 사이에 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황주 성불사 대웅전 도리. 사진 : e뮤지엄] 현대의 직육면체 모양의 건물들이라면 기둥과 보만으로도 충분히 지탱이 가능함. 건물이 직육면체 모양이라면 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x축과 y축 방향 모두 보라고 칭할 수 있음. 그러나 동양의 전통건축은,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서 비와 눈이 지붕에 쌓이지 않도록 경사를 만들어야 했음. 이 경사면과 평행하게 서까래가 놓이며, 이것에 직교하여 서까래를 일정 거리마다 받쳐 주는 부재가 바로 도리임. [서까래(赤), 도리(靑)의 방향. 사진은 위와 동일] 위의 사진에 서까래와 도리를 구분해 보았음. 도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까래를 받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 측면] 보는 기본적으로 수평으로 연결되어 수직으로 눌리는 힘을 견디는 부재를 말함. 위 사진에서는 양 끝 기둥에 연결되어 있는 대들보의 중간에 2개의 작은 기둥(동자주)을 통해 위의 작은 보(종보)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음. [안동 봉정사 극락전 측면]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음. 각 도리마다 모두 기둥을 내린다면 보가 필요없지 않겠는가? 위의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 모든 도리마다 기둥이 연결되어 있어 건물 전체를 연결하는 보가 필요하지 않음.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내부. 사진 : 문화재청] 그러나 건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확보임. 기둥을 많이 세운다면 그만큼 건축물의 안정성은 높일 수 있겠지만, 공간 중간중간에 기둥이 박혀 있게 됨. 따라서 보는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는 부재라고 볼 수 있음. [통영 세병관(上), 삼척 죽서루(下)]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를 쌓아 올린다면 이론상 공간을 무제한으로 넓힐 수 있겠으나, 목재의 재료적 한계로 인하여 보는 많아봐야 3개까지 쌓을 수 있음. 위의 사진에서 세병관과 같이 3개의 보를 쌓았으며 아래부터 대들보, 중보, 종보라고 하며, 죽서루와 같이 2개만 쌓였을 경우에는 대들보와 종보임. 한문으로는 대량(大樑), 중량(中樑), 종량(宗樑)이라고 함. [통영 세병관 종단면도. 대량, 중량, 종량, 퇴량을 확인할 수 있음. 도면 : 문화재청] [통영 세병관의 대들보, 중보, 종보 구분. 사진 :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도리 또한 명칭에 구분이 있음. 바깥쪽 기둥 위에 올라가는 도리를 주심도리(柱心道里), 양쪽 지붕의 경사가 만나는 가장 위에 올라가는 도리를 종도리(宗道里)라고 함. 종도리와 주심도리 사이에도 여러 도리들이 받치고 있음. 아래 그림과 같이 종도리와 주심도리 사이의 도리가 3개이면 중상, 중, 중하도리, 2개이면 중상, 중하도리, 1개이면 중도리라고 함. 또한 이후 언급하겠지만 공포의 첨차 위에도 도리가 올라가는데, 이를 출목도리(出目道里)라고 하며 주심도리 안쪽에 있으면 내목도리(內目道里), 바깥쪽에 있으면 외목도리(外目道里)라고 함.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도리 개념도. 그림 : 위와 동일] 위의 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가구의 구조이고, 이것은 지붕의 형태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음. 지붕은 크게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모임지붕 이 4가지로 분류됨. 지붕을 소개하기 앞서 마루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 [마루 개념도. 그림 : 위와 동일] 마루는 지붕면이 만나는 지점으로, 기와를 쌓거나 회를 칠해 마감하였음. 용마루는 종도리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지붕의 가장 윗부분을 말하며, 내림마루는 지붕의 경사를 따라 내려오는 방향의 모서리, 추녀마루는 말 그대로 추녀를 따라 길게 나 있는 모서리를 이름. [양산 용화사 대웅전(上), 구리 휘릉 정자각(下)] 먼저 맞배지붕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지붕임. 용마루와 내림마루만 존재하며, 장식성이 적어 일반적인 건축물에 흔히 쓰였고 엄숙함이 강조되는 일부 사찰건물과 사당 등에 주로 쓰였음. 맞배지붕은 비바람이 불 경우 가구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취약점이 있어 이를 보완하고자 나무판자를 덧대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풍판(風板)이라고 함. [서울 흥인지문(上),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下). 사진 : 문화재청] 우진각지붕은 맞배지붕의 끝에서 추녀가 뻗어 나온 형태의 지붕임. 즉, 용마루와 추녀마루로만 구성된 지붕을 말함. 우진각지붕은 일반적인 민가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사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 궁궐이나 국가시설에서는 성문이나 궁궐 정문에서만 사용되었는데, 광화문, 돈화문 등의 궁궐 정문이나 숭례문, 팔달문과 같은 성문이 이에 해당됨. 예외적으로 위의 장경판전과 같은 특수건축에서 사용되기도 하였음. [안성 석남사 영산전(上), 양산 통도사 관음전(下)] 팔작지붕은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 합쳐진 형태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모두 있음. 형태상 두 내림마루 사이에 삼각형의 공간이 생기는데, 이를 합각이라고 함. 이 때문에 팔작지붕을 합각지붕이라고도 함. 팔작지붕은 맞배지붕과 같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지붕 양식임. 형태상 가장 복잡하지만 화려해서 어지간한 중심건물들은 대부분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음. [보은 법주사 팔상전(上), 서울 경복궁 향원정(下)] 마지막으로 모임지붕은 모든 지붕면이 하나의 꼭짓점에서 만나는 양식으로, 용마루가 없고 추녀마루만 있음. 건물의 면 수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 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함.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정자건축이나 탑파건축 등 특수건축에서 이용되는 것이 대부분임. 그러나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과 같이 일반 불전에서 이용한 특수사례도 존재함. [팔작, 맞배, 우진각지붕의 개념도. 그림 : 세계미술용어사전] 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위와 같음. 앞서 살펴본 보와 도리의 구조는 맞배지붕에 한정된 것으로, 지붕면이 4면에 모두 있는 팔작지붕과 우진각지붕의 경우에는 구조가 좀 더 복잡해짐. 이는 2부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음. 이제부터는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할 전통건축의 주요 부분들을 나누어 간략히 소개한 뒤 마치려고 함. [양산 통도사 대웅전 기단] 먼저, 기단은 건물을 지표로부터 일정 높이만큼 띄우는 역할을 함. 건물을 바닥에서 띄움으로써 습기를 막고 채광을 용이하게 할 수 있음. [원주 법천사지 문지 초석] 초석 또한 기단과 같이 목재를 습기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함. 목재라는 재료의 특성상 습기에 몹시 취약할 수밖에 없음. 이 때문에 초기에는 나무를 끼워넣는 방식의 굴립주를 이용했으나 이후에는 습기를 더 철저히 막고자 지금과 같은 평평한 초석을 이용하게 되었음. [경복궁 근정전 회랑 기둥] 기둥은 전통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재로, 재료, 위치, 형태 등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됨.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음. [포항 오어사 대웅전 공포] 공포는 기둥 위에서 위의 부재들을 받쳐주는 부재로, 사실 필수적인 부재는 아님. 이렇게 기둥 위에서 바로 도리가 결합하여 공포구조가 없는 건물을 민도리집이라고 함. 그러나 공포는 건물의 규모를 키운다면 반드시 필요한 부재임. 만약 기둥 바로 위에서 여러 부재가 맞물린다면 그 구조는 굉장히 불안정할 것임. 따라서 공포를 통하여 기둥과 상부 가구를 안정적으로 연결하여 줄 수 있음. 또한, 공포를 통해 처마를 넓힐 수 있음. 앞서 말했듯 전통건축은 습기에 몹시 취약하기에 처마를 넓혀서 비바람에도 목재가 젖지 않도록 하여야 함. 공포는 처마를 더 길게 뽑는 것을 가능케 함. [예산 수덕사 대웅전 측면] 가구(架構)란 건물의 뼈대를 뜻하는 말로, 기둥, 보, 도리가 그것들임. 2부에서 가구를 다룰 때에는 보와 도리의 종류를 세세히 구분하여 알아보려 함. [서울 창덕궁 돈화문 추녀] 지붕가구는 도리 위에 올라가는 서까래의 구조를 말함. 지붕가구의 형태는 지붕 자체의 모습과 직결되기에 건물의 외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음. [서울 창덕궁 규장각 계단] 이외의 난간, 계단, 마루, 천장, 벽 등의 부수적인 부재에 대한 설명은 위의 주요 부재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하도록 하겠음. 1부의 내용을 통해 전통건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길 바람. 이어질 다른 글들도 관심 갖고 보아 주었으면 함.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https://cbck.or.kr/Documents/Samok?no=50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 서울 대교구)Ⅰ「한국 서지」(韓國書誌)의 저자로 유명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유교(儒敎)에 언급하여 “우리는 유교에 이르러 한국 사상(韓國思想)의 핵심을 건드리게 된다. 사회 제도와 행정 체제, 철학 사상, 역사와 문학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사변(思辨), 관찰과 비판, 열광, 상식, 호기심 따위가 모두 유교에 귀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구태여 쿠랑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韓國)의 문화가, 구체적으로는 천주교(天主敎)가 전래(傳來)한 조선조(朝鮮朝) 후기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유교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문화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종교(宗敎)와 문화(文化)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음은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의 진보는 바로 문화의 진보를 의미하고 문화의 진보는 곧 종교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바로 조선조의 문화가 그러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유교적(儒敎的)인 문화는 일반적으로 현세적(現世的)이고 인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가톨릭은 모든 문화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어야 하고 또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상 이러한 문화를 창조할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가톨릭이 현세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문화를 피안적(彼岸的)이고 신 중심적(神中心的) 문화로 끌어올리고 승화하는 데 과연 기여했을까. 이것이 첫째로 고찰해야 할 문제의 소재일 것이다.천주학(天主學)과 함께 들어온 서양의 문물(文物)은 이 나라 문화에 개화(開化) 바람을 일으키고 근대화(近代化)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근대화는 우선 전근대적(前近代的)이고 봉건적(封建的)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복지 국가(福祉國家)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복지 사회 건설의 의욕은 인권(人權)을 침해할 위험성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이미 속화(俗化)된 서구(西歐)의 근대화 사상이 한국으로 하여금 복지와 인간의 기본 자유가 조화를 이룩한 가운데 진정한 진보를 달성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가 또한 문제의 소재이다.외세(外勢)의 끊임없는 침략의 위험은 조선이 근대화하는 데 있어서 대내적(對內的) 봉건적(封建的) 요소에 못지않게 큰 장애가 되었다. 외세의 침략 위험성이 높아지고 이웃 열강(列强)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해 갈수록 반침략주의(反侵略主義)는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더욱 긴박한 과제가 되었다.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종교의 근대화와 반침략주의를 내걸고 동학(東學)이란 이름 밑에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종교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이 참으로 근대적이고 반침략적인 종교였는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여하간 이러한 종교의 창도(唱導)를 보게 한 데에는 … 천주교로 하여금 왜 이러한 종교가 새삼스럽게 창설되어야 하는가를 마땅히 자문(自問)토록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보편성과 특수성, 인간성과 한국적 인간성의 조화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보편성의 지나친 강조는 외래적(外來的)인 것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키우고 반대로 특수성의 지나친 강조는 국수주의(國粹主義)로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이 어려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 보편성 강조에 치우친 적은 없지 않았던가. …. 이것 또한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들이다.Ⅱ천주교(天主教)는 직접 서양으로부터가 아니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렇게 중국화(中國化)된 천주교, 다시 말해서 한문(漢文)으로 쓰여진 서학(西學) 서적을 통해서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의 대표적인 것은 역시 마테오 리치(利瑪寅)의 「천주실의」(天主實義)일 것이다. 천주실의의 기본 자세가 비록 '영유’(迎儒)일지라도 우리는 특히 리치가 주자(朱子)와 공자(孔子)를 구별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자적(孔子的) 고전적(古典的) 유교는 천주교와 부합되는 점이 적지 않으나 주자학적(朱子學的) 유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서양의 과학 정신의 영향으로 이미 청조(淸朝)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란 새로운 학풍(學風)이 일어나 주자학(朱子學)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었다. 뒤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을 비판하는 학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학자(實學者)로 불리는 실학파(實學派)였다.서학서(西學書)가 우선 이러한 실학자들에게 환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웃나라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실학자들도 서학서를 통해 현실을 외면한 공리론적(空理論的) 성리학의 관념론(觀念論)을 극복하고 현실 문제의 해답을 얻고자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우선 ‘상제’와 동일시된 천주(天主)의 개념이 후기 실학자들에게 이르러서는 별개시(別個視)되게 되었다. 그들은 천주의 인격성(人格性)을 부인하고 따라서 인간과 천주와의 상봉의 가능성도 부인하였다. 즉 그들은 “천(天)과 제(帝)는 보는 견지에 따라 다른 것이요 본디 천(天) 이외에 제(帝)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천제(天帝)라 하는 것이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조천(造天)의 인격적인 제(帝)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죄(罪)를 하늘에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등의 경서(經書)의 구절을 끌어내어 마치 유학(儒學)이 천주학(天主學)에 불과(不過)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지없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상제(上帝)가 결코 천주(天主)가 될 수 없음을 논박했다.또한 사천(事天)으로 말하더라도 사단(四端)과 오륜(五倫)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서 천주교(天主教)의 천당설(天堂說)에도 언급하여 말하기를, 사후(死後) 천상(天上)의 복(福)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군자(君子)의 학(學)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의 화복(禍福)이란 이치(理致)에 매였을 뿐이고 따로 인격신(人格神)이 존재하여 이를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주재하는 신(神)마저 거부하기에 이르렀다.이와 같이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은 종교의 중심 사상인 신(神)과 사후(死後) 상선벌악에 관하여 근본적인 대립을 나타냈다. 천주교가 인격적(人格的)이고 유일(唯一)한 절대신(絕對神)을 내세운 반면에 유학은 상제의 인격성과 우주 창조(宇宙創造)를 거부하고 경신(敬神)으로서 다만 인륜(人倫)의 준수를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황사영(黄嗣永)은 그가 지은 「백서」(帛書)를 통해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동하여 순 종교적인 것에 간섭하는 정부의 처사에 용감히 도전하였다. 신교(信敎)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 권리에 속하고 또한 그것은 국민 각자의 사사(私事)요 국사(國事)가 될 수 없으므로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천주교인을 박해하는 정부는 문책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이상 우리나라 실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서구의 과학기술에는 전적으로 긍정한 반면에 서구 종교에 대해서는 겨우 부분적인 긍정을 보였거나 아니면 전적인 부정(否定)을 나타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한 실학자들은 순 종교 분야에 골몰한 반면에 서구의 과학 기술을 적용시켜 현실 사회를 개선하고 타개하려는 소위 현실 참여 문제는 등한시하였다. 그러므로 서학의 근대화 이론은 결국 이론에 그치고 말았다.물론 천주교 초창기의 교우(教友)들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현실 도피적(現實逃避的)이고 염세적(厭世的)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에서 이미 엿보이기 시작한 일부 천주교인들의 지나친 국제주의적인 경향은 민족적 감정을 자극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주 의식을 각성시키고 양이(據夷) 사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후 거듭된 프랑스 함선(法艦)의 내한(來韓)으로 민족적 감정은 일로 격화되어 갔다.프랑스(法國)는 한국이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한(在韓) 프랑스인 선교사 3명을 학살한 사실을 문책한다는 명목으로 1846년부터 군함을 한국 해안에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병인년(丙寅年)에 이르러 군사적(軍事的)인 충돌마저 일으켰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搖)이다. 동학(東學)이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Ⅲ….서학(西學)으로부터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천주’란 신의 호칭(呼稱)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그러나 동학의 천주는 ‘상제’(上帝), ‘한울님’, ‘옥황상제’(玉皇上帝) 등이 복합(複合)되어 있는 개념으로서 천주교에서 뜻하는 천주란 개념과는 실로 거리가 먼 것이었다.동학의 천주는 ‘오심즉여심’(吾心即汝心) 또는 ‘천심즉인심’(天心即人心)이라고 한 최제우(崔濟愚)의 소위 종교적 체험으로 미루어 보아 범신론적(汎神論的) 입장임이 명백하다. 인격신(人格神)은 아니지만 유일신(唯一神)이요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게 내재(內在)하는 신(神)이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란 표현을 사용했다. 인간이 천주를 자기 마음 속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위에서 이미 유교와 천주교의 사천(事天)의 태도가 서로 판이(判異)함을 지적하였다. 즉 천주교에서 인격신을 받들어 공경하는 반면에 유교에서는 인륜을 지키는 것이 다름 아닌 경천(敬天)의 길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경천이 인격신을 따로 모시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요 ‘시천주’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것이 곧 경천의 길이라고 하였다.….동학이 주장한 이른바 후천 개벽설(後天開關說)은 천주교의 구세관(救世觀)을 현세화한 지상 천국론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가 상고적(尙古的)이었다면 동학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었고 천주교와 불교(佛教)가 내세적(來世的)이고 영적(靈的)인데 반하여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바로 동학(東學)의 처세관(處世觀)이었다.….그러나 베이징(北京) 함락의 소식이 조선(朝鮮) 정부와 국민에게 이루 표현키 어려운 공포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관(大官)들까지도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을 얻으려 애썼고 천주교인에게 신변의 보호를 의뢰하였다. 반대로 한국의 선교사들은 종교 자유의 날이 박두했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한때의 공포요 한때의 기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침략의 위험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한때 교회에 접근했던 사람들이 거의 교회에서 물러갔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소식이 결과적으로 한국에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때 동학은 동학 자체에 대한 자각감(自角感)을 갖고 서학의 위력(威力)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검토하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풍문(風聞)에 대하여 최제우는 “서양 사람들이 도(道)와 덕(德)을 잘 체득(體得)하여 그들이 조화(造化)를 부릴 때는 무슨 일이건 못하는 것이 없다. 그들이 공격하고 싸우는 무기(武器) 앞에서는 맞설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中國)이 망해 버리면 우리나라도 같은 화(禍)를 입을 것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이 떠도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즉 이 사람들이 그 도(道)를 서도(西道)라 하고 그 학(學)을 천주학(天主學)이라 하며 그 교(教)를 성교(聖敎)라고 하는데 아마도 그들이 천주(天主)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으로 의심하는 때문일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서학(西學)의 위력이 마치 무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것은 기술과 종교의 혼동이요 문화와 종교의 혼동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혼동할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동은 이미 실학자들에게도 발견되었고 정부에게도 있었으며, 천주교 측에도 있었다. 아마 이것은 정교일치(政敎ᅳ致) 사상이 체질화(體質化)된 한국 민족에게 숙명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한국 사람은 현실의 부정(不正)을 극복하는 것이 곧 천계(天界)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와 천계의 동질성(同質性)을 가상(假想)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종교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현실 참여에 민감하였다. 뿐더러 그것은 국가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호국 신앙(護國信仰)으로까지 발전되어 나갔다. 종교(宗敎)나 국권(國權)이 모두 정교일치 사상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특히 동학의 경우는 인내천(人乃天)의 현실주의로 말미암아 동학인(東學人)들의 이상론(理想論)은 항시 현세에 영향을 미쳐야 하고 또한 현실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종교보다도 현실 참여의 기회가 많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혼동은 서양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때가 그러했다. 식민지 건설과 포교(布敎)가 혼동됨에 따라 포교가 식민지화(植民地化) 정책에 이용될 때가 있었다. 그 결과 선교사(宣敎師)들은 때로는 그들을 군함이 뒤따르고 있다는 비난마저 들어야 했던 것이다.이러한 소위 식민지 건설에 대비한 서구 일부 국가의 그릇된 선교 정책이 재한(在韓) 선교사들에게까지 미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난(東學亂) 중 동학군은 새로 등장한 무기가 서양에서 온 것이라 하여 한국의 양인(洋人) 선교사와 그들의 교(敎)를 신봉(信奉)하는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다 동학군의 원수가 된다는 망녕된 결론을 내리고 선교사의 재산을 약탈하고 천주교인(天主教人)을 박해하게 되었다.….Ⅳ이상으로 우리는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개관(概觀)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가톨릭이 한국 문화에 끼친 영향과 한국 문화에 대한 한국 가톨릭의 적응(適應) 여부를 간추려 보자.서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무릇 모든 문화는 궁극적으로 신(神)을 지향(指向)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의 문화관(文化觀)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 가톨릭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세속적(世俗的)인 한국 문화로 하여금 신을 지향케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진정한 문화(文化)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복지(社會福祉)와 아울러 인간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한국 가톨릭은 정권(政權)의 안전을 기하고자 충효(忠孝)란 유교적 도덕을 절대적 국민 도덕으로 내세우는 조선조 후기 정치 체제(政治體制)에 도전하고 충효나 군부(君父)의 의사(意思)가 결코 기본 인권(基本人權)을 우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죽음을 무릅쓰고 고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거듭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韓國) 가톨릭은 이 나라 민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民族)을 위한 종교(宗敎)로서 민족 문화(民族文化) 창조에도 기여할 수 있었던가. 이 질문에 긍정적(肯定的)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근대화(近代化)가 바로 서구화(西歐化)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 전통적 고유 문화에 대해선 열등감을 느끼고 외래적 구미 문화(歐美文化)는 우월하다는 서구 선망(西歐羡望)의 사고방식이 일찍이 지양(止揚)됨으로써 한국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주성을 지녔어야 되었을 것이다. ….
작성자 : 가갤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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