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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연습 : 난로 옆에서앱에서 작성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27 08:32:21
조회 69 추천 0 댓글 0

난방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스토브, 전기장판, 보일러, 구들방, 모닥불... 물론 그중 최고는 직접 산에서 공수한 장작을 화목으로 쪼개어, 불을 지피는 모닥불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는 수렵채집 시기부터 형성된 인간의 오랜 기억을 여전히 복기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남아 있다. 돌아갈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기름 난로 옆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버튼을 누르면 푸른 불꽃이 간단히 점화된다. 곧 훈기가 실내를 덥힌다. 기름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지구의 고혈이 오롯이 인간의 체온유지를 위해 실시간으로 타들어가고 있는 것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이 독특한 화학 조성은, 이맘때가 아니고서야 접하기 어려운 일종의 제철음식이다. 게다가 요새는 기름 난로를 때는 곳이 흔치 않다. 기름난로의 불은 모닥불과는 다른 차원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벽히 포박되어 통제 당하고 있는 가엾은 불이다. 겹겹의 금속 틀에 둘러 쌓인 덩치만 큰 난로 속의 불꽃은 아마 마룻바닥에 넘어진다 해도 화재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몸은 따뜻해지고 머릿 속은 휘발성의 기름내에 촉촉히 절여진다. 점화부에서 타고 남은 미량의 중금속이 호흡기를 타고 몸 속에 퍼진다. 후각을 인지하는 두뇌의 후각 겉질은 기억을 생성하는 영역인 해마 근처에 위치한다. 냄새가 특정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기름 난로 옆에 앉아서 생각해본다. 이 냄새가 처음은 아니다. 내가 언제 처음으로 기름 타는 냄새를 맡았을까?

머릿 속의 책장이 뒤로 훌훌 넘어간다. 그렇게 멀지 않은 한 챕터에서 멈춘다. 1층 짜리 조적 스라브 건물이다. 서른 다섯 평 쯤 되려나. 20년 준공은 되보이는데 관리가 잘 되서 사람으로 치면 꽤 동안이다. 단순하고 흔한 형태의 건물로 관공서의 창고쯤으로 여기기 쉽다. 이곳은 내가 근무한 군대 사무실이다. 여기서 나는 기름 난로를 처음 접했다. 사무실에는 벽걸이형 에어컨이 한 대 있었지만 난방 장치라고는 이렇다할 것이 없었다. 냉난방이 겸용되는 스탠드(당시에 고급이었다)를 설치하기에는 작고 낡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특성상 그다지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는 부대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름 난로가 있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 같다. 군인이야 춥고 더운게 당연한 처사이니 기름 한 통 쥐어주고, 겨울 나시요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군인스러운 경영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창고에서 비닐과 먼지를 뒤집어 쓴 기름 난로를 낑낑대며 들여와야 했다. 이 물건은 깡통인 상태에도 무겁다.

뭐니뭐니해도 기름 난로가 갖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주유다. 그리고 그것은 신참의 업무다. 군대에서는 작은 일거리 하나로 신병의 일머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군복을 입혀 놓으면 그런 비범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주유는 신병의 운동감각이 적어도 평균인지 혹은 그 이하인지를 판단하는 수 많은 리트머스 중 하나다. 이것은 흰색 반투명 기름통을 창고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기름통의 영원한 단짝 핸드 펌프가 있다. 이 기묘하게 생긴 물건은 두 방향의 통로와 빨간색 공기 주머니(펌프)로 구성된 플라스틱이다. 이것은 기압을 이용해 기름을 기름통에서 난로의 연료통으로 이동시킨다. 핸드 펌프의 주유기를 난로의 주유구에 삽입하고 펌프에 압력을 가한다. 그리고 적당한 기울기로 몸체를 기울이면 기름이 저절로 이동한다. 공기 주머니에 가해지는 압력과 기울기로 유속을 조절한다. 이것은 솔직히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나는 이 물건을 볼 때마다 양변기가 자동으로 물을 차올리는 구조를 떠올리곤 했다.(이것은 내 머릿속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주유 중에는 타이밍을 잘 봐야 한다. 연료통에 기름이 얼마나 차고 있는지 주시하며 이동을 중단시킬 시기를 짐작해야 한다. 자동차의 연료게이지처럼 난로에도 E-F이 있다. 그런데 난로의 연료 게이지는 약간 늦다. 기름이 차오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해주지 못한다. 타이밍을 놓치면 기름이 가득 찼는데도 계속 주유가 되는, 오바이트 참사가 발생한다. 사실 이 지경까지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이밍을 놓친 대부분의 실수는, 앗차! 하고 황급히 주유부를 물리다가 기름 방울이 바닥에 튀는 정도이다. 공기 주머니를 1회 수축하는 것으로 기름이 얼마나 이동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몸에 익히는데는 약간의 숙련이 필요하다. 이게 되면 주유가 즐거워진다. 말하자면 가장 경제적인 루트, 단 몇 회의 펌프 그리고 절묘한 기울기로 정확한 량의 기름을 주유했을 때의 만족감이 있다. 조금의 군더더기 동작 없는 수요와 공급의 완벽한 대칭. 내 또래의 인간들은 어렸을 때부터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스로건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근검절약의 경제관념을 머릿 속에 주입 받았다. (우리나라가 2000년대 초반부터 산유국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게 됐다.) 주유는 쌀을 옮겨 담는 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쌀 포대에서 쌀을 쌀독으로 옮겨 담을 때 한 톨의 쌀알도 방바닥에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을 옮길 때는 쌀과 달리 핸드 펌프라는 특별한 물건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 물건의 기묘한 구조는 자칫하면 기름 방울이 튀기 쉽게 되어 있다. 그리고 쌀은 간단히 쓸어 담을 수 있지만 기름은 그렇지 못하다. 사무실 바닥에 떨어진 기름은 걸레로 닦아도 하루 종일 미끌거리고 번들거린다. 그리고 그 외면하기 힘든 독특한 향기는 자신을 바닥에 내친 신참을 원망하는 망령이 되어 내무반 공기를 떠돈다. 모두가 말은 않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신병은 칠칠치 못하군. 기름이나 흘리고.’ 게다가 이런 무언의 질책은 허다한날 감사로 굴러가는 관료사회에서는 더 가중된다. ‘국민의 혈세’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콤비내이션.

하여튼 나는 기름 난로가 좋다. 기름 타는 냄새는 자극적이다. 허기진 사람이 맡는 빵 냄새처럼, 추위에 떠는 나그네에게 참 반가운 향기다. 조용히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난로의 불꽃. 작동 중인 난로를 보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충실한 인상을 받는다. 전기 스토브 같은 것은 그렇지 못하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운용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불이 나면 합선이나 누전이 발화 원인으로 수상쩍게 지목되고 사람들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래 전기를 끄고 다녀야지...” 한다. 점점 노골적인 것들이 좋아진다. 눈 앞에서 작동 과정 전체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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