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사 전체를 관통하며 인류는 한 가지 난제에 끊임없이 직면해왔다. 평화와 전쟁, 그리고 전쟁의 풍문으로 가득한 장구한 역사 속에서, 숱한 제국들은 예외 없이 유대인 문제라는 딜레마와 마주해야 했다.
이 문제의 지속성, 그리고 이 주제를 다룬 방대한 문헌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이 딜레마의 근원, 즉 "유대인은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맞선 이는 없었다.
이 질문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온전한 지성을 발휘할 때만 답할 수 있다. 또한, 가장 높은 영적 차원에서, 지극한 기독교적 자애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인간 그 자체, 즉 인간의 본질, 기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그리고 참혹한 학살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피로 물든 기록 속에서, 학자들은 정착한 곳마다 극심한 혐오 감정을 불러일으킨 유일한 민족을 발견한다. 문명 세계 곳곳에서 그들을 수용한 민족을 자극하여 결국 학살하거나 추방하게 만든 유일한 민족. 그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이 문제는 집단 간의 갈등이 여러 국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오해를 받아왔다. 튀르크인에 의한 크리크인 학살은 수천 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며, 가장 최근의 사건은 불과 80년 전에 발생하여 오늘날 생존해 있는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수백 년 전 프랑스에서 발생한 위그노 학살은 같은 혈통의 집단이 종교적인 이유로 서로를 적대 하는 것이 다른 인종 집단 간의 분쟁 못지않게 참혹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살 이후에도, 각 집단은 어김없이 삶의 터전에 다시금 뿌리내렸다. 갈등이 해소되거나, 남은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대표적으로, 위그노들의 경우, 신대륙으로 이주했고, 이는 미국 혁명의 주요 사상가들을 배출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화해나 이주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 유대사이다. 그것은 두 가지를 증명한다. 첫째, 유대인과 그들을 품은 사회는 결코 화합하지 못했다. 둘째, 그 누구도 유대인을 영구히 막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가혹한 추방 이후에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다른 민족의 역사에선 이러한 강박관념은 찾아 볼 수 없다. 일각에서는 고통을 감내하려는 유대인의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집단적 자학성애라는 개념은 유대인 문제의 다른 많은 측면들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사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 마찬가지로, 이미 2천년 전부터 존재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유대인 문제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측면이며,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해결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2천년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서사가 곧 인류의 서사이며, 구속과 영혼의 구원을 발견하는 감격적인 경험이다.
유대인은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초월해야하는 모든 본능적 유혹을 상징한다. 유대인 때문에, 구원은 무의식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닌, 의식적인 선택이 되었다. 유대인, 그 악의 화신이 없었다면 인간은 선악을 그토록 분명하게 선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것이다. 유대인이 존재하기에,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문명화된 세상에서, 사람은 살면서 언젠가 궁극적인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사탄에게 이끌려 산 정상에 올라, 물질적인 삶의 쾌락과 즐거움이 눈 앞에 펼쳐지고, 사탄은 말한다. '나에게 복종하면 이 모든 것,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오늘날 문명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대다수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인 자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받을 가능성을 포기한 자들이다. 이들은 유대인을 위해 일한다. 일례로, 윈스턴 처칠은 버나드 바루크의 꼭두각시였으며,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벨라 모스의 흉측한 가신이였다. 이들은 산 정상으로 끌려 올라가, 지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엄청난 화려함과 부를 보여주며 사탄에게 복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들은 동의했고, 그 동의 때문에 수백만 명이 끔찍하게 죽었으며, 거대한 전쟁이 전 세계로 악성종양처럼 퍼져나갔다.
처칠, 루즈벨트는 죽었지만, 유대인 테러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한다. 모든 권력을 유대인에게로! 이것이 처칠과 루즈벨트가 서명한 사탄과의 계약이였고, 이 때문에 이들은 평생 유대인을 저주하며 영원한 파멸을 맞이하며 죽었다. 그들의 입 안에는 잿더미만 남았고, 술과 쾌락에 눈이 멀어 민족을 유대인에게 팔아넘겼다는 끔찍한 후회 속에서 영원을 맞이해야 했다.
인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야기가 전혀 새롭거나 충격적이지 않을 것이다. 5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똑같은 암초에 걸려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유대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 즉 문명 세계의 지배자가 로마 민족을 유대인에게 팔아넘긴 죄로 원로원에게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가 살해당한 장소에 모여 루스벨트, 처칠, 존 F. 케네디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몇 주 동안 애통해했다. 역사는 이 추악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지만, 통치자와 백성 모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변함없이 동일하다.
"사탄에게서 돌아서 나를 따르라."
인류에게 모든 것을 제시하는 이 마법 같은 일곱 단어는 그토록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수백만명이 이해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채 죽어갔다. 왜일까? 무엇보다도, 유대인은 논점을 흐리게 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의 구원의 전언이 수천 명의 추종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을 때, 유대인은 전형적인 행동을 취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맞서기보단,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유대인이라고 세상에 선포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 유대인은 이사야 5장 20절을 무시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을 광명으로 삼고 광명을 가지고는 흑암을 삼습니다. 구원은 자기에게는 빛이 없고, 자기로서는 빛을 만들어 낼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고, 자기에게는 악함과 더러움과 부패함과 못남과 추함과 어두움과 쓴 것 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수백만 명이 유대인의 이러한 책동에 속아 넘어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푸른 눈에 아마빛 머리카락을 가진 갈릴리의 이방인이었다는 모든 기록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기독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유대인을 숭배합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세주에 대한 총체적인 신성 모독일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토록 훌륭한 유대인이었다면 왜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을까? 왜 시온의 장로들은 사탄의 회당에서 비밀리에 모여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을 계획했을까? 놀랍게도 미국에는 자신의 신도들 앞에서 이 질문을 제기할 의향이 있는 소위 기독교 목사가 단 한 명도 없다. 대신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들은 사람들을 유대화하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대한 모든 공모에서 유대인을 면죄하기 위해 엄숙한 회의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회의는 성경, 즉 하나님의 기록 자체가 거짓이라고 세상에 선포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분명하다. 사제들도 인간이다. 그들 또한 사탄에게 이끌려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결국, 신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개인의 심판대에 그 누구도 대신 설 수 없다. 사제의 진정한 역할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영혼의 구원을 약속하고 강조하는 데 있다.
기록은 변조되거나 파기될 수 있고, 사람들은 거짓된 우상을 따르도록 설득될 수 있지만, 진실이 결코 왜곡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장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 속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흐릿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자,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르는 자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유대인의 존재가 우리에게 더 명확하게 만들어준 그 선택을 말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거짓된 삶을 살면서 구원받지 못한 채 죽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받아들여 그의 품 안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앎은 우리 문명의 위대한 예술가, 음악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웅장한 음악, 수백 명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그림, 수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의 글 속에서, 기독교적 삶의 방식의 숭고함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여기에도 유대인은 경쟁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계를 의미 없는 낙서로 뒤덮었고, 심지어 개와 원숭이가 그린 그림까지도 내놓으며 고이, 즉 이방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유대인의 경멸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음악계를 자동차 경적 소리와 맹목적인 드럼 연주의 불협화음으로 만들고, 문학계를 인간의 타락에 대한 반복적인 이야기로 변질시켰다.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유대인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감성을 이토록 모욕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유대인의 삶은 증오와 복수로 가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짐승과 같으며, 영원히 지상의 영역에 갇혀 있다. 천국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이 유대인의 진정한 비극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유대인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홍수에 정신이 팔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 바이런 경이 말했듯이, "역경 속에 진실로 가는 길이 있다." 이 보편적인 타락의 시대에 고개를 들 수 있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큰 보상이 따른다. 그리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이 쓰였다. 이 책은 유대인의 사실적인 역사이며, 이 책을 읽고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부정한다면, 그는 정말로 길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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