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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를 죽인 뒤 역주행해서 파피루스 집에 가는 소설앱에서 작성

야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10 20:53:07
조회 94 추천 1 댓글 0

영상 참고 (영상에 나온 내용이랑은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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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북 영상 보고 영감 얻어서 씀. 초중반은 그냥 흔한 몰살루스 전개인데, 쓰다 보니 예상보다 길어짐. 솔직히 후반부 좀 뜬금없긴 한데, 진짜 열심히 썼음ㅠ 이 정도 분량 쓰는 것도 내 인생 몇 안 됨. 읽어주는 사람들 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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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의 꽃들이 무질서하게 산재한 꽃밭. 그 한복판에서 그는 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상당한 고도에서 추락했음에도, 그는 단지 옷에 묻은 흙을 담담히 떨쳐낼 뿐이었다. 꽃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문을 향해 산발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재차 바지에 달라붙은 잔해를 털어내고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꽃들이 암시하는 행로를 따라 무심히 전진했다. ​마침내 폐허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노란꽃 플라위가 그를 맞이했다.

"저기 하트 보이지? 그게 너의 힘의 정수야. 지금 네 힘은 약하지만 LOVE를 많이 모으면 강해질 수 있어. 내가 조금 나눠줄 수 있어. 자, 받아! LOVE를 많이 받는거야!"

껍질이 까진 흰 속살의 알맹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살갗에 깊에 베어들어 간 알맹이는 다량의 상흔을 입힌 뒤, 사방에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뺨에서는 진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때,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선홍빛을 띤 불꽃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괜찮니? 저 불량한 꽃이 널 해하려 들다니... 나는 폐허의 관리자. 토리엘이란다. 지하세계로 추락한 인간이 없나 둘러보던 중이었지. 그러다 널 발견했단다."

이미 수십 차례 이상 본 진부한 대사였다. 신속하게 내레이션을 건너뛰고 토리엘을 따라 보랏빛 거대한 암영이 드리워진 폐허로 들어갔다. 특이사항은 전무했다. 동일한 괴생명체들과 동일한 NPC의 대사와 동일한 공간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이전 시간선들에서처럼 괴물들에 대한 살인행위를 중단할 의향이 없었다. 이 지루하도록 순환되는 시공간에서도 쾌락을 갈구하는 그가 하루아침에 변하여 모든 악행을 종결시킬 것이라 기대하는가? 따라서 프로깃의 몸통에 칼을 관통시키고, 베지토이드를 썰어 요리로 만들고, 윔선의 날개를 절단하는 행위는 그만둘 수 없었다. 토리엘의 부재 동안 무수한 괴물들을 살해하는 일을 반복했다. 집 앞에 도달하자,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낙엽을 정리하던 토리엘과 시선이 교차했다. 그의 몸은 손상된 부위는 없었으나, 온전한 외관을 유지하지 못했다. 옷에 묻은 입자와 미세한 먼지 등이 그러했다. 토리엘은 우려의 표정을 지었다.

집 안은 방금 구워낸 시나몬 빵의 달콤한 향기로 가득했다. 단단한 마룻바닥을 밟으며 방에 도착했다. 토리엘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곳이 너의 방이란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탄 빵 향기를 따라 부엌으로 향한 토리엘을 뒤로하고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어스름한 바닷빛으로 물든 공간 속, 벽에 걸린 황금빛 꽃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식물학 백과사전을 훑어보다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고 생기 없는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이 집은 언제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지..."

그렇게 생각했다. 방 안에만 머물 수는 없으니 문고리를 돌려 거실로 향했다. 토리엘은 '달팽이의 72가지 쓰임새'라는 책에 몰두해 있었는데, 책장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것을 보니 오랜 시간 애착해온 서적임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놀라움으로 커진 그녀의 눈동자.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책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이후는, 뭐, 늘 그렇듯 반복됐다. 끊임없이 폐허를 벗어날 방법을 물었고, 결국 토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마침내 폐허의 출구 앞에 도착했다. 정말로 이 고통스러운 반복의 장소를 탈출하고 싶었다.

"정말로 나가고 싶니? 그렇다면 증명해보렴. 살아남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불길이 토리엘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한 두 개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사이, 불길은 점차 광기를 띠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장이 열리듯 위쪽 공간이 불타는 창으로 변했고, 그 안에서 끝없이 불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등 뒤로 숨긴 손에 단단히 칼을 쥐고 있었다. 불을 피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가 토리엘의 얼굴 바로 앞에서야 멈췄다. 그 순간, 토리엘의 표정이 달라졌다.

토리엘이 망설이는 찰나를 노렸다. 그 짧은 순간, 그는 복부에 칼을 깊숙이 꽂아넣었다. 선혈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토리엘은 배에 손을 갖다 대며 흘러나오는 피를 확인했다. 느릿한 그녀의 몸짓에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고통이 그녀의 눈빛에 생생히 드러났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그녀의 얼굴에는 비웃음이나 가식적인 표정 하나 없이 담담함만이 남아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순간 같았다. 그녀의 몸은 천천히 먼지로 변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목에서 시작해 가슴, 배, 무릎까지 차례대로 소멸해갔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칼을 쥔 손에 힘을 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

칼바람이 뺨과 옆얼굴을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탓에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럼에도 꼭 이루어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눈덩이에 축축히 젖은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나뭇판자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멈춰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등 뒤에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새로운 친구와 사귀는 법을 모르는 건가? 돌아서서 나와 악수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샌즈였다. 짧은 키에 둥근 해골 얼굴, 영원히 웃고 있는 듯한 표정. 그의 눈구멍은 작은 흰 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푸른색 후드티와 검은 반바지, 그리고 흰 슬리퍼를 신은 모습은 이 살을 에는 추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샌즈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매화나무 가지처럼 가늘고 새하얀 뼈다귀 손.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안그래도 추운 공간에서 차가운 뼈의 감촉을 느끼자 온몸이 더 시려워지는 듯했다.

"뿌우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이상한 진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헤헤, 방귀 쿠션 악수. 항상 통하는 농담이지."

샌즈의 눈구멍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짐짓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유치한 개그를 수천 번은 더 들었을 테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너 인간이지? 난 샌즈야. 뼈다귀 샌즈."

실실 웃는 형태를 유지한 채, 샌즈는 마주 쥔 손을 스르륵 뒤로 빼 파란 점퍼 주머니 안 깊숙히 꽂아넣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해골이어서 피부가 없는데도 추위를 느끼는 걸까?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예측 가능한 몸짓을 몇 번이고 다시 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보아왔으니까. 샌즈의 동생 파피루스는 인간들을 감시하는 일을 하고, 인간 사냥에 집착하는 괴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처럼 둘은 대문처럼 생긴 큰 다리 위를 향해 걸었다.

"파피루스가 곧 올 거야, 숨을 곳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 저기 등불 뒤는 어때? 네 몸집과 딱 맞는 것 같은데."

마침 그의 몸통 크기와 딱 맞는 등불이 보였다. 빠르게 그 뒤로 몸을 숨겼다. 멀리서 쿵쾅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거대한 자취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샌즈보다 훨씬 키가 크고 마른 해골로, 붉은 스카프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샌즈!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그냥 등불 앞에 서 있었을 뿐이야!! 이 위대한 파피루스가 마침내 인간을 잡을 수 있었던 순간을 네가 망쳐버렸어!!”

그는 한껏 흥분한 채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으으… 뭐, 괜찮아. 그래, 어차피 인간은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언젠간 잡고야 말겠어! 위대한 파피루스의 완벽한 함정은 반드시 성공할 거야!”

결국 그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만족한 듯 흥분을 가라앉히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의 붉은 스카프가 휙휙 바람을 가르며 사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인공은 등 뒤에서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샌즈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등불에 기대 있었지만, 어딘가 멍하니 형체가 사라진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즈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근데 너 아직 거기 숨어 있는 거야? 이제 나와도 돼.”

쭈뼛쭈뼛 등불 뒤에 숨겼던 몸을 뺐다. 샌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건 그렇고, 파피루스는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네가 그의 퍼즐을 풀어주고 놀아준다면, 그는 정말 행복해할 거야. 그가 널 잡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걱정 마. 그는 실제로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아. 아,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보는 게 어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다른 선택이라니. 설마 저 자식이 나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고 있는 것인가? 샌즈는 길바닥에 흩뿌려진 눈과 색이 비슷한 흰색 슬리퍼를 질질 끌며 사라져갔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골격체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샌즈는 원래 감정을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저 양심을 찌르는 말 몇 마디를 툭 던져놓고는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무심한 목소리로 괴물들을 죽이지 말라고 가끔씩 충고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역할인 듯했다. 언다인을 눈앞에서 처참히 죽였던 이전 시간선에서도 핫도그 판매 간판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렇다, 저 자식은 늘 중립을 고수했다. 슬리퍼를 질질 끄는 모습은 어딘가 어설퍼 보였지만, 그것마저도 의도적인 듯했다. 그는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지극히 평범한 인간처럼 걸었다. 한쪽 손목을 머리에 기댄 채 무심한 듯 휘파람을 불어댔다. 스노우딘의 차가운 바람 소리와 그의 흥얼거림이 공기 속에 희미하게 녹아들었다.

보관함에는 딱히 넣을 아이템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펼쳐진 눈 덮인 숲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눈밭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샌즈형. 저거 혹시 인간인가...?"
"내 생각엔 그냥 '돌' 같은데."

딱딱한 무언가를 씹는 듯한 태평한 목소리였다. 마치 이 상황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파피루스와 샌즈는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보고 고개를 까딱하며 장난을 쳤다. 그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파피루스는 놀람과 흥분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급히 만들어야 할 퍼즐이 있다는 말을 꺼내고 허둥지둥 반대쪽 방향으로 뛰어갔다.

발걸음은 쌓인 눈 위에서 부드럽게 자국을 남겼다. 비교적 맑은 날씨였지만, 스노우딘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폐부까지 시려오는 추위를 선사했다. 그는 이제 파피루스가 만들어 놓았을 첫 번째 퍼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없이 많은 시간선에서 경험했던 퍼즐들. 처음에는 색다른 도전으로 느껴졌던 것들이 이젠 지루한 놀음에 불과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눈앞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첫 번째 퍼즐이 놓여 있었다. 파피루스가 설명하는 퍼즐의 규칙은 간단했다. 지면에 그려진 패턴을 따라가면서 특정 순서대로 레버를 당기는 것. 그러나 이미 그 해답을 꿰고 있는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도전이었다.

그렇게 스노우딘으로 가는 길목에 펼쳐진 몇 개의 퍼즐들은 모두 해결했다. 그 어설픈 함정들을 피해가는 것은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리를 건너고 길을 따라 몇 분을 더 걸었을 때,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노우딘 입구였다.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모처럼 크리스마스날을 기쁘게 장식하려 트리근처에서 선물용 끈을 만지작거리던 곰괴물과 언제나처럼 괴롭힘을 받아 뿔에 끈이 잔뜩 묶인 거추장스러운 순록, 오색 불빛이 찬란히 빛나는 상점 앞에서 동생을 산책시키는 토끼... 그들 모두 사라져 쓸쓸한 오한만이 공허를 채워주는 그 찰나에,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길을 걷다 괴물들을 마주치는 족족 언제 그만둔 적 있냐는듯 뾰족한 칼날을 휘갈겼다. 먼지가 그의 앞으로 흩날리며 바닥으로 서서히 낙하했다. 잔바람을 타고 어깨에도, 코 끝에도 찬찬히.

미끄러운 눈 위를 유영하듯 쓸어 내려가자, 서서히 작은 얼음 결정체들이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는 흐릿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스노우딘의 끝자락, 워터폴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면서,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길고 마른 팔다리, 붉은 스카프가 바람에 나부꼈다. 파피루스였다. 그는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우쭐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인간! 내 말 좀 들어봐! 최근 넌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어."

이상하다는 그의 단정에 내심 비웃음이 올라왔다. '이상'하다니. 그저 평소대로,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을 뿐인데. 언제나 그랬듯이.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천천히 파피루스를 향해 걸어갔다. 파피루스의 눈구멍이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했다.

"멈춰! 거기 서! 이봐, 넌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난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길을 잃은 것뿐이야. 내가 도와줄게!"

또 한 발짝 다가갔다. 이제 그와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 파피루스의 골격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손에 쥔 칼날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만! 더 가까이 오지 마!"

역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터무니없이 순진한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차라리 단 한 번이라도 파피루스가 맞서 싸웠더라면, 이토록 허망하게 떠나지는 않았을 테다. 아무리 잔혹한 살의를 품은 자신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까지도 양 팔을 벌린 파피루스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눈보라 속에서 메아리쳤다. 파피루스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눈밭 위로 떨어졌다.

"괜찮아. 난... 난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전히 믿어..."

그의 몸이 서서히 먼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스카프만이 눈밭 위에 남겨졌다. 바람이 스카프를 살짝 들어올렸다가 다시 눈 위에 내려놓았다. 먼지를 밟으며 그 위를 무심하게 걸어갔다. 죄책감도, 후회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공허함만이 가슴 속을 채웠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채워질 필요가 있었다.

워터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는 더 많은 먼지가 될 대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스노우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더 이상 눈송이가 흩날리지 않지만, 사방은 축축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 틈을 타고 흐르며 작은 연못을 이루고, 바닥은 늘 젖어 있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운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발아래 이끼 낀 돌다리 옆으로 청량한 물줄기가 서슬 퍼렇게 흘러내렸다. 한 발 한 발 돌을 신중히 밟으며 저편을 향해 나아갔다. 마지막 돌을 밟고 단단한 땅을 딛는 순간, 발끝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바로 눈앞에는 적갈색 나무판자들이 서툴게 얽혀 만들어진 엉성한 초소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스노우딘에서 마주쳤던 초소와 묘하게 닮아있는 이곳에, 그러나 샌즈는 없었다. 다른 루트였다면, 아마도 그와 함께 그릴비에서 케첩 범벅의 햄버거를 나눠 먹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았을 법했다.

"이 자식은 또 어디로 꽁무니를 뺀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는 초소 안을 들여다보았다. 먼지 쌓인 의자와 흐릿한 지문들만이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알바는 아니었지만, 그 해골 녀석을 떠올리면 머릿속의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켜버리곤 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그도 이런 변화를 뚜렷이 느꼈다. 가슴 한구석이 공허로 가득 찬 것 같은 이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움? 아니면 배신감?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생각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머릿카락을 세차게 움켜쥐어 복잡한 감정들을 덜어내었다. 짧은 통증이 정신을 맑게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뻔했다. 이제 그는 짙푸른 해초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언다인이 경계를 풀고 떠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숨을 고르며 해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시간이 흐르고,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갔다. 언다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무거운 발걸음이 점차 사라져갔다.

완전히 소리가 멎은 후에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 안전하다고 확신이 들자, 그는 비로소 조심스레 해초 줄기를 헤집고 나왔다. 짙은 녹색 이파리들이 옷에 달라붙어 끈적이는 감촉을 남겼다. 그는 옷에 붙은 해초 조각들을 털어내며 주변을 경계했다. 예상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하나씩 움튼 다리꽃을 머리에 이고 수면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가지가지 어우러진 꽃이 활짝 만개해 다음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리꽃이 그려낸 길을 따라 맨 끝자락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동굴의 돌기둥들 사이로 아무도 알지 못할 듯한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벤치 위에는 누군가 오랫동안 앉아있었던 바랜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그는 벤치 아래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던 피폐해진 키슈를 발견했다. 시금치와 계란을 넣어 만든 일반적인 키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딘지 색이 어두워 보였다. 키슈를 조심스레 챙긴 뒤, 아직 밟지 못한 다음 장소로 향했다. 메아리꽃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끊임없는 물결소리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포수의 물줄기 소리에 파묻혀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난 그저 책임질 준비가 안되었던 거야."

*

그 순간, 뒤에서 갑작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물소리를 압도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몸을 돌려 바라보았고, 푸른 빛을 내뿜는 창이 번개처럼 머리 위로 날아왔다. 언다인이었다. 무시무시한 물고기 형상의 갑옷을 입은 왕실 근위대장은 그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창을 던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다. 창은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을 스치며 뒤쪽 벽에 꽂혔다. 복도를 지나 넓은 수풀지대로 들어서자 거대한 해초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해초 사이로 언다인의 무거운 갑옷이 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언다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해초 더미 바로 앞에서. 그 순간, 그의 옆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작은 노란 형체가 해초 사이에서 몸을 뒤척였다. 언다인의 차가운 손이 해초더미를 헤집기 시작했다. 손이 깊숙이 들어와 무언가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다. 노란 형체를 해초 더미에서 끌어올린 언다인은 잠시 몬스터 키드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존재에 실망한 듯, 언다인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를 찾지 못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창을 휘두른 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요... 방금 봤어?! 언다인이 내 얼굴을 만졌어!"

몬스터 키드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급하게 앞으로 내달린 나머지 바닥에 쿵, 머리를 찧고 말았다. 그러곤 무척이나 익숙한 동작으로 두 발만으로 중심을 잡고 재빨리 일어섰다. 몬스터 키드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공간 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탁자가 홀로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크리스탈 안에 단단히 뭉쳐진 치즈 조각이 늘어붙어 있었다. 언젠가 쥐가 쥐구멍에서 나와 이 치즈 조각을 가져갈 것을 직감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내면에서 의지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망설임 없이 옆의 세이브 포인트에 손을 갖다 대었다.

* 13마리 남았다.

근육질 몸을 과시하던 아론,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던 샤이렌,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던 워슈아 - 이들을 포함한 여러 괴물들의 갈기를 거칠게 잡아 뽑고, 눈에 차갑게 빛나는 칼날을 꽂아 넣으며 차례차례 처치해 나갔다. 앞으로 핫랜드와 코어에서 더 잡아야 할 괴물들의 수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어깨가 쑤셔왔다. 살육의 쾌락과 끝없는 피로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런 그의 피로를 의외로 달래준 것은 다름 아닌 작은 오르골 소리였다. 뿔이 달린 괴물 석상 뒤에 숨겨진 작은 스위치, 그것을 누르면 맑고 아름다운 음률이 공기를 타고 퍼지며 귓가를 감싸 안았다. 그 소리는 머릿속의 피로감을 씻어내렸다. 아주 오래전, 그도 인간적인 감성을 지닌 초창기에는 불살 루트를 택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이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었다.

그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흐르며 하늘은 잿빛 어둠에 서서히 잠식되어갔고,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이윽고 하늘에서는 무겁고 차가운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은 단단한 수정 구슬처럼 땅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자리에 차가운 한기만을 남겼다. 머리 위로는 둥둥, 발밑으로는 철썩철썩, 울려 퍼지는 빗소리가 어스름한 세계를 가득 채웠다. 가끔씩 빗줄기가 멈췄다가 더 거세게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그제야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굽어진 바위 벽 사이에서 몬스터 키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저 멀리 어둠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낸 건물을 바라보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갑자기 앞에 높고 가파른 턱이 나타났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턱은 마치 절벽처럼 보였다. 혼자라면 쉽게 오를 수 있겠지만, 몬스터 키드와 함께라면 어려울 터였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몬스터 키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 없이 키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몬스터 키드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를 밟고 올라가도 괜찮아!"

망설임 없이 그는 몬스터 키드의 머리를 밟고 높은 턱 위로 가뿐히 올라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몬스터 키드가 빗물에 젖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난 다른 길을 찾아볼게! 좀 있다 봐!"

그렇게 말한 몬스터 키드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빗소리만 들으며 키드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푸른빛 다리는 짙은 그림자에 휩싸여 깊은 남색의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발밑을 조심스레 내려다보니 다리의 자그마한 틈새로 수면 위에 맺힌 잔물결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순간, 응시하던 공간을 뚫고 날카로운 창이 번개처럼 솟구쳐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홍빛 핏방울이 굵은 이슬처럼 뚝뚝 떨어지며 땅에 붉은 꽃을 피웠다. 언다인의 창. 심장이 요동치며 본능적으로 몸을 휘둘러 창을 피했지만, 도망칠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추락하면 끝장인 낭떠러지.

가파른 절벽의 모서리에 서서 온몸이 경직되었다. 뛰어내릴 용기조차 찾지 못한 채, 언다인과의 일촉즉발 대치 상황에 갇혀버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세 개의 거대한 창이 다리의 가장자리를 관통했고, 다리는 서서히 갈라져 끊어진 나뭇재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 순수하고 맑은, 티끌만한 어둠도 없는 청명한 음성이었다.

"안녕, 너 떨어졌구나. 네 이름은 뭐야? 차라라고? 그거 정말 멋진 이름이네.
내 이름은..."

귓가에 맴돌던 목소리가 희미해지며 소멸했다. 대신 시야는 점차 또렷해졌다.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낯선 공간. 사방은 고철 더미와 지상에서나 볼 법한 피자 박스, 층층이 쌓인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마치 쓰레기의 성채와도 같은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엉성하게 붙은 종이 눈썹이 잔뜩 찡그려진 더미인형이었다. 화가 나 보이는 그 푹신한 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결연한 의지로 흘러오는 수류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습기 찬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나아가는 동안, 물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덧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어두운 폭포 동굴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물이 쉬지 않고 바위에 부딪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나무 다리 위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리 끝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몬스터 키드였다. 노란 피부에 줄무늬 셔츠를 입은 그 아이는 팔이 없었지만,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몬스터 키드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입을 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언다인이... 널 조심하라고 했어. 네가 괴물들을 많이 해친다고...
...근데 네가 그런 게 아니지. 으..응?"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의 손은 저절로 주머니에 있는 칼을 찾았다. 손잡이는 차갑고 익숙했다. 이 여정에서 그가 진정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아이조차도. 몬스터 키드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은 이미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번쩍이는 파란 갑옷이 갑자기 나타나 몬스터 키드 앞에 서서 공격을 대신 받았다. 언다인이었다. 용사처럼 나타나 어린 몬스터를 보호한 것이다.

"네가 여길 지나면... 더 많은 이들을 해치겠지..."

갑옷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청록색 창이 그녀의 손에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갑옷은 폭포의 빛을 반사하여 푸른 광채를 뿜어냈다.

언다인은 창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간신히 피했지만, 이번에는 여러 개의 창이 공중에서 나타나 내게로 날아왔다. 동굴의 벽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우리의 싸움 소리와 뒤섞였다. 그녀는 강했다. 어쩌면 그가 만난 적 중 가장 강한 상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겪어왔다. 많은 시도와 실패. 많은 죽음과 부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왔다.

언다인의 공격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갑옷을 적시고 있었다. 호흡은 가빠졌고, 창을 휘두르는 손이 약간 떨렸다. 마지막 공격을 위해 그녀는 모든 힘을 모았다. 전력을 다해 창을 던졌지만 그는 이미 패턴을 읽고 있었다.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서자 창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균형을 잃은 그녀에게 다가가 칼을 꽂았다. 언다인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창이 바닥에 떨어지며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몸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끝나지 않아...
난... 결코... 포기하지 않아..."

그녀는 결의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더니,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갑옷, 그녀의 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흘러내렸다. 언다인이 쓰러졌다. 용감한 전사의 몸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적막과 물소리만이 남았다.

그가 핫랜드의 붉게 타오른 땅에 첫 발을 내딛자 강렬한 열기가 그를 덮쳤다. 열기로 인해 공기가 일그러져 보였고, 마그마가 표면 바로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바닥의 균열에서는 열기가 솟아올랐다.  그는 붉은 배경에 대조적으로 부드럽게 빛나는 익숙한 별 모양의 빛에 다가갔다. 세이브 포인트.

* 40마리 남았다.

그 숫자는 임상적이고 차갑게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남은 괴물들의 수, 그의 진행 상황을 측정하는 지표였다. 그는 돌아서서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아래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형체가 더 뚜렷해졌다—날개가 비행하기에는 너무 작아 보이는 작고 직사각형 모양의 비행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도망칠지 싸울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 약간 떨리며 그곳에 떠 있었다.

"네-네가 지나가는 걸 막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
그-그냥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츤데레플레인은 공중을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칼이 끔찍한 정확도로 공기를 갈랐다.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했다. 츤데레플레인은 공중에서 얼어붙었고, 그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는 멈추지 않고, 어떤 반응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머릿속 숫자는 자동으로 조정되었다.

* 39마리 남았다.

길은 핫랜드 더 깊은 곳으로 이어졌고, 빈 보초 초소와 버려진 퍼즐 장치들을 지나쳤다. 마치 지하 전체가 집단적으로 숨을 멈춘 것처럼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거대한 건물에 도착했다. CORE로 이어지는 알피스의 연구소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지 않았고, 그는 힘을 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면이 켜져 있는 모니터를 지나치며 그는 자신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조명이 켜지고 눈부신 빛이 연구소를 가득 채웠다. 메타톤이 나타났다.

"이 작악한 피조물같으니... 참 유명해지셨네요. 정말 감명받았어요. 아, 그리고 알피스 박사님을 찾는 거라면 이미 여기에 없어요. 이제 다들 당신이 절대 잡으러 갈 수 없는 곳에 있어요."

핫랜드의 주민들은 이미 대피한 듯했다. 지나온 길에서 단 한 마리의 괴물만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으니, 나머지는 그도 모르는 곳에 숨어있거나 이곳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메타톤의 말이 끝나자, 그는 파피루스에게 했던 것처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위협했다.

"오, 벌써 절 해치고 싶어 안달이 나셨나요? 정말 유감이네요! 하지만 지하에는 시체보다 스타가 더 필요하답니다. 그럼 안녕히!"

메타톤은 급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는 연구실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컵라면을 꺼내 챙기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컵라면은 HP를 회복시켜 주었다. 냉장고 바로 옆 컴퓨터와 책상 위에는 고양이 귀를 한 소녀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 딱히 볼 것도 없었다. 연구실 게이트가 열렸다. 다음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땡볕으로 후덥지근한 땅바닥을 걷고 또 걸어, 뉴홈과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복도를 지나가는 것. 언제나처럼 똑같은 학살로 이어진 그 길을 넘어 끝에 도달하는 것. 왜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지 그조차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으나,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단순한 쾌락, 그것뿐이었다.

검은색의 좁은 통로를 지나갔을 때, 문득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음을 깨달았다. 바닥에 헝클어진 거미줄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죄악이 그의 양심을 붙들어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신발을 질질 끌었다. 자주색과 붉은색 식탁보가 깔린 탁자, 그리고 의자에 앉아 그를 보며 옅은 웃음을 흘리는 머펫이 보였다. 그는 칼로 머펫의 한쪽 팔을 붙잡고 단숨에 절단해버렸다. 멈추지 않았다. 다른 쪽 팔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밀어붙이고 여러 개의 눈 중 하나를 칼로 찔러넣었다. 그를 보는 공포에 질린 눈빛이 재수없었다. 머펫을 단숨에 해치워버린 후 발목에 걸린 거미줄들을 칼로 갈갈이 찢어냈다.

그는 핫랜드로 향했다. 용암의 열기가 얼굴을 때렸지만, 이제는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몇 번이나 같은 길을 걸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발 아래로 갈라진 바위들과 붉게 빛나는 용암을 보며 묵묵히 걸었다. 하늘색 타일로 장식된 MTT 리조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장 버거팬츠로 향했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얼굴. 버거팬츠는 항상 그렇듯 허공을 응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메타톤 얼굴 스테이크 하나 주시겠어요?"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거팬츠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버거팬츠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건넸다.

그는 무감각하게 그것을 받아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MTT 리조트를 지나 코어로 향하는 길. 이 모든 여정의 끝은 어디인지 알면서도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코어에 도착하자 복도가 그를 반겼다. 하늘색 불빛이 복도를 환하게 밝혔다. 그는 빛나는 붉은 칼을 더 단단히 쥐었다. 코어 깊숙한 곳에 도달했을 때, 수많은 전선과 기계들이 벽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지하세계의 심장부. 이곳에서 모든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흐르는 전기 회로들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이곳을 지났는지. 몇 번이나 같은 선택을 했는지.

계속해서, 단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생겨난 질문인지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리셋을 한 그 지점부터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반복해서 네가 얻을 건 대체 어떤 것이 있지?"

이건 귀찮은 한 종류의 짓에 불과했다. 그는 생각했다. 색다른 무언가를 시도해 볼까? 스노우딘에서 샌즈가 했던 말도 떠올렸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는 그 방법을 알면서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앞은 어느새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불이 켜지고 주위가 다시 환해졌다. 메타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메타톤은 더 이상 네모난 기계의 모습이 아닌 인간형 기계로 변해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이제 슬슬 질려갔다. 메타톤이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는 순간, 그는 모든 공격을 피하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지막 힘을 모아 점프했다. 공중에서 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메타톤을 향해 내리꽂았다. 칼이 기계의 정중앙에 깊숙이 박혔다. 전기 불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메타톤의 시스템이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더 깊이 밀어 넣으며 비틀었다. 기계 내부에서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품들이 하나둘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넣어 부품들을 종류별로 뽑아내버렸다. 메인보드, 전원장치, 기억 장치... 하나하나 뽑아내는 동안 메타톤의 눈에서 빛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메타톤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자, 그는 이제는 산산이 부서진 고물 덩어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발로 힘껏 걷어찼다. 부품들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고, 왼팔이 발에 튕겨 나갔다.

그는 느리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기계가 작동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 그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폐허에서 만난 토리엘, 스노우딘의 파피루스와 샌즈, 워터폴에서의 언다인, 핫랜드의 알피스와 메타톤. 그리고... 그가 죽인 모든 괴물들. 숫자를 세는 것을 멈춘 지 오래였다. 그의 LV는 높아져 있었다. 짧은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당신은 뉴홈이라 불리는 회색빛 도시로 발을 내딛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괴물들의 집은 버려진 채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아스고어의 성에 도착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를 지나가며, 그는 이 길을 전에도 걸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다른 시간에, 다른 목적으로. 기억의 편린이 마음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 의지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심판의 복도에 도착했다. 황금빛 조명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체크무늬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스웨터에는 먼지가 묻어있었다. 지하세계를 통과하며 남긴 여정의 어두운 증거였다. 황금과 호박색 기둥 사이에 서 있는 실루엣을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 소리가 웅장한 홀에 메아리쳤다. 해골의 왼쪽 눈이 파란색과 노란색 사이를 번쩍였다. 샌즈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칼을 더 꽉 쥐었다.

"여기까지 왔군,"

그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반쯤 감긴 그의 공허한 눈에는 주변의 웅장한 홀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샌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뜨자, 동공 역할을 하던 빛의 점들이 사라지고 텅 빈 눈구멍만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자."

공기가 마법으로 짙어지며 바닥에서 뼈들이 솟아올랐다. 그는 그 사이를 재빠르게 피해 다녔다. 수없이 많은 이전 시도에서 얻은 기억이 그의 움직임을 인도했다. 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적도 있었다. 이제 그 패턴은 익숙했다. 해골의 공격은 파도처럼 밀려왔다—위에서, 아래에서 뼈들이 날아들었고, 블래스터들이 에너지를 충전한 후 빛줄기를 쏟아냈다. 그의 가슴 앞에서 빨간색으로 빛나는 영혼이 능숙한 정확도로 움직였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샌즈의 숨소리는 더 무거워졌다. 두개골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이제 패턴을 알고 있었고, 공격이 나타나기 전에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샌즈의 대사, 움직임, 그리고 그를 지치게 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들을 모두 암기했다.

"내가 그냥 서서 맞을 거라고 생각해?"

그가 앞으로 돌진하자 샌즈가 비웃었다.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늘어졌다. 그의 의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한 번의 타격만 필요했다. 샌즈의 방어에 단 하나의 틈만 있으면 됐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공격 도중에 찾아왔다. 샌즈가 방심한 틈을 타 칼이 뼈와 천을 가로질러 샌즈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베었다. 샌즈가 상처를 움켜쥐며 말했다.

"...글쎄, 이게 끝인가 보네.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샌즈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지만,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지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심판의 홀에 홀로 서 있었고, 마음은 공허했다. 다음은 왕이었다. 그 다음은 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를 지울 차례였다. 샌즈를 쓰러뜨리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꼭 그래야만 할까?

왕에게 가는 대신, 그냥 되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파피루스의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정말로 엉뚱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그를 이끌었다. 경로를 거꾸로 걸으면 무엇이 바뀔지 보고 싶었다. 왕에게 향하지 않고 스노우딘으로 더 깊숙이 이동했다. 눈이 그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창문은 어둡고 문은 잠겨 있었다. 주민들은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친 듯했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지붕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여전히 걸려 있는 2층짜리 건물로 움직였다. 파피루스의 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바로 이 마을에서 그가 쓰러뜨린, 그 해골의 집.

그는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잠겨 있지 않았다. 내부는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설탕이 덮인 돌, 너무 높아서 닿을 수 없는 싱크대, 양자 물리학 농담책. 모든 것이 마치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 파피루스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망설였고, 이상한 느낌이 의식 가장자리를 잡아당겼다. 그것은 죄책감이었을까? 후회? 아니면 그저 불길한 호기심? 문이 열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액션 피규어들이 선반에 조심스럽게 정렬되어 있었으며, 경주용 자동차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책장에 손가락을 훑으며 쌓인 얇은 먼지 층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 파피루스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레이싱 카 모양 침대 프레임을 따라 천천히 훑으며 과거로 빠져들었다. 처음 지하세계에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려웠다. 토리엘의 친절한 얼굴, 그녀가 건네준 첫 파이 조각의 따스함. 폐허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녀의 눈에 맺힌 슬픔. 첫 번째 여정에서는 모두와 친구가 되려 했었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했다. 끝내지 못한 듯한,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리셋 버튼을 처음 눌렀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되돌려졌고, 그는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 여정. 세 번째 여정. 모든 결말을 보고 싶었다. 모든 대화, 모든 비밀, 모든 가능성을 알고 싶었다.

그러다 호기심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만약 모두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결국 리셋할 수 있으니까. 아무도 진짜로 죽는 것이 아니니까. 첫 먼지가 손에 묻었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그것은 단지 게임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토리엘의 놀란 눈빛, 그녀가 무릎을 꿇고 먼지로 변할 때의 충격이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이끌었다. 그것은 결심이었을까, 아니면 무감각함이었을까?

*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스노우딘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의 손가락이 창틀을 따라 움직였다. 한때 먼지로 뒤덮였던 그 손가락.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리셋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해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세계가 제공하는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결정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은 그의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그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믿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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