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든 스마트폰이든 게임을 하는 자녀를 탐탁지 않게 보는 부모의 시선 밑바닥에는, 게임이 내 아이의 장래 진로에 방해가 되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게임 대신 진로에 도움이 될 것을 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게임은 자녀의 진로에 방해가 되기만 할까요? 혹시 자녀의 진로에 도움이 될 방법이 있다면, 부모는 자녀가 하는 게임을 통해 그 능력을 어떻게 길러줄 수 있을까요?
게임은 늘 첨단기술과 함께 해왔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진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는 1958년 미국 원자력 연구시설인 브룩헤븐 국립 연구소 연구원 윌리엄 히긴보섬(William Higinbotham)이 개발했습니다. 그는 연구소를 방문하던 방문객에게 첨단기술을 이용해 즐거움을 줄 요량으로 게임 개발을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호 계측에 사용하던 5인치 아날로그 오실로스코프에 간단한 회로와 간이 조종기를 연결하여 만들었습니다.
출처=엔바토 엘리먼츠
게임에 사용된 컴퓨터는 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개발용으로 활용된 무시무시한 첨단기술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친근한 기술로 바뀌는 변곡점이 된 매개이기도 합니다. 이 게임은 이후 1972년 출시된 최초의 '퐁(Pong)'이라는 아케이드 게임이 탄생하는데 영감을 준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참고로 퐁을 만든 게임사 '아타리'는 고인인 스티브 잡스가 맨 처음 취직한 회사이며, 여기서 게임개발로 성공한 잡스는 이후 '애플'이라는 거대 기업을 세우게 됩니다.
1980년대 PC가 보급되면서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타자기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자기에 익숙한 직원들은 낯선 컴퓨터 자판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때 컴퓨터를 철수하고 휴게실에만 배치하게 됩니다. 그것도 게임용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게임용으로 2개월쯤 사용 후 사무실에 업무용으로 다시 배치했더니 거부감 없이 사용하더랍니다. 게임이 컴퓨터라는 낯선 기계에 대한 거부감을 지워주었던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기본 프로그램에 삽입된 게임인 '지뢰찾기'나 '카드놀이'도 사실은 마우스를 익숙하게 다루는 훈련용 게임입니다. 조금 더 빠르게 지뢰를 찾으려는 동안 마우스의 좌우클릭, 더블클릭은 물론 동시클릭까지 습득했던 것입니다. 즐기는 것만큼 강력한 배움은 없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사례입니다.
30년 전만해도 컴퓨터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첨단 기기들을 장난감처럼 잘 다룹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빠르게 첨단기술을 습득했을까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늘 게임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친숙하고 빠르게 습득하게 만드는 게임의 속성을 활용하는 의외의 기업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테슬라 자동차는 출시할 때부터 '테슬라 아케이드'라는 게임을 장착시킵니다. 이에 대해 일론 머스크는 "자동차가 스스로 운전하게 되면 엔터테인먼트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략적인 이유를 밝힌 적 있습니다. 2020년 9월에는 테슬라에서 '재미있는 차를 개발'하기 위해서 게임 개발자를 뽑기도 했습니다.
루이비통, 구찌, 버버리 등의 명품 브랜드 기업도 게임과의 협업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루이비통은 2019년에 인기게임 '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스폰서를 맡으며, 게임 속 키아나라는 챔피언을 모티브로 한 한정판 상품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이 상품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서 매진이 됐습니다.
2021년 구찌는 온라인 전용 스니커즈를 발매했습니다. 현실에서 신는 신발이 아닌 온라인 게임 아바타에게 신기는 신발을 개발한 것이죠. 마치 맥도널드 해피밀 세트를 구입하는 이유가 햄버거 자체가 아닌 장난감에 있는 것처럼, 이제 명품 패션 브랜드를 사는 이유도 현실이 아닌 온라인 아바타에게 입히려는 용도로 바뀌고 있음이 시사됩니다.
최근 게임을 개발, 출시하는 소니가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발표했고, 방탄소년단(BTS) 소속사인 하이브는 2022년 게임을 서비스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제 게임은 단순한 아이들의 놀이가 아닌, 거의 모든 산업영역에서 소비자들과 친숙하게 만나는 보편적 기술이자 문화가 된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첨단회사를 보면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이름만으로 정체를 알기 어렵습니다. 구글은 더 이상 검색엔진 회사가 아닙니다. 아마존은 온라인 서점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무인점포, 원격의료,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국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검색, 쇼핑, 금융, 부동산, 방송, 모빌리티 등을 총망라하는 사업 영역을 가진 네이버나 카카오 역시 단일 정체성으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공통점은 게임사업을 직접 추진하거나 적어도 게임과 연관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출처=엔바토 엘리먼츠
이런 회사들이 원하는 인재상 역시 게임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단적인 사례로, 2020년 4월 SK하이닉스는 과거 게임중독으로 볼 수 있는 사례를 '집념증후군(Tenacity Syndrome)'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자사 인재로 채용하겠다는 내용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하이닉스가 게임 덕후가 필요하다고 밝힌 이유는 크게 3가지입니다 . 첫째, 게이머는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해법을 찾습니다. 이는 빠르고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고, 실패를 기반으로 더 나은 성장 전략을 찾아낼 수 있는 기업 성패의 중요한 역량입니다.
둘째, 협업능력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즐기는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협업하는 능력을 습득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팀으로 뭉쳐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동료 의식을 자연스럽게 겸비하게 됩니다.
셋째, 문제 해결을 향한 끈기와 집념입니다. 게이머들은 미션이 정해지면, 그에 대한 해답이 반드시 있다고 믿고 그 해법을 찾습니다. 게임을 통해 길러진 시행착오와 협력을 통해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문제해결 방식은 하이닉스가 추구하는 인재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고 밝혀고 있습니다. 게임덕후는 게임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 기업의 인재상과도 딱 어울리는 역량이었던 것입니다.
칙센미하이라는 심리학자는 무언가에 푹 빠져있는 몰입행위는 '자기목적적 경험(autotelic experience)', 즉 다른 무언가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빠져드는 경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게임에 빠져드는 것은 자기목적적 경험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데 자기목적적 경험에 빠져드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크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즉 게임에 빠져본 경험은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것에도 푹 빠져서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소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브릿징(Bridg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다른 경험과 '다리'처럼 연결시켜주는 상담기법의 일종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님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게임의 경험을 단순한 놀이로 가두지 않고, 미래의 역량으로 이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인내심과 창의력, 협동심, 불굴의 의지와 같은 게임에서 성취한 경험을 인정해주고, 이런 성취들이 첨단 기업과 기술이 요구하는 역량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글 /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이장주 소장 (zzazanlee@gmail.com)
첨단 기술이 사람의 마음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문화심리학박사. 현재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 게임문화재단 이사,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이사, 한국중독심리학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대중강연과 IT동아 등의 매체에 기고활동을 하고 있다. <게임세대 내 아이와 소통하는 법>, <십대를 위한 미래과학콘서트(공저)>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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