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메카=서형걸 기자] 게이머가 게이밍 PC를 구성할 때 CPU는 인텔, 그래픽카드는 엔비디아가 ‘진리’처럼 여겨졌던 것이 불과 3년 전이었다. 안정적인 초당 프레임과 각종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쾌적한 게이밍 환경’을 보장하는 두 회사의 대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머가 AMD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 취급을 받을 정도였는데, 낮은 성능과 부족한 호환성으로 많은 게이머에게 스트레스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이머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AMD는 지난 3년간 빠른 성능 향상과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거리감을 조금씩 좁혀나갔다. 그 결과 CPU는 게이머 사이에서 인텔을 위협할 정도의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래픽카드는 엔비디아의 독주에 제동을 걸만한 기대주로 꼽히고 있다.
상승세를 탄 AMD는 이제 ‘게이머의 절친’이 되려고 한다. 이는 지난 10월 9일 새벽(한국시간 기준)에 있었던 신제품 발표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는 곳(Where Gaming Begins)’이라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건 본 발표회에서 공개된 4세대 라이젠 프로세서(ZEN 3)는 게임 성능 면에서 동급 인텔 제품을 뛰어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에 10월 말 정식으로 소개될 그래픽카드 ‘라데온 RX 6000’ 시리즈도 깜짝 등장해 인상적인 4K 게임 성능을 뽐냈다.
가성비 아닌 ‘성능’으로 승부수를 건 AMD
AMD가 인텔과 경쟁하며 주무기로 내세운 것은 ‘가성비’였다. 렌더링을 비롯한 전문 작업 성능은 AMD 라이젠이 인텔 코어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게이밍 성능에서는 여전히 인텔이 앞서 나가고 있다. 하지만 가격까지 고려한다면 AMD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데, 이는 비슷한 성능의 동급 라인업끼리 비교하면 AMD 제품이 인텔 제품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4세대 라이젠 프로세서는 라인업별로 가격을 50달러(한화 약 5만 7,000원) 올리며 가격 우위를 스스로 내던졌다. 하이엔드 제품인 라이젠9 5900X의 소매권장가격(MSRP)은 549달러(한화 약 63만 원)로 동급 인텔 제품인 코어 i9 10900K의 499달러(57만 2,700원)에 비해 비싸다. 하지만 오른 가격만큼이나 향상된 성능은 게이머의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라이젠9 5900X는 이전 세대 라이젠9 3900X와 동일한 7nm 공정, 12코어 24스레드다. 최대 부스트클록은 4.6GHz에서 4.8GHz로 향상됐지만 코어 수는 이전세대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경쟁상대인 인텔 코어 i9 10900K의 10코어 20스레드에 비해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임 방송을 생각하는 게이머에게는 훨씬 구미가 당기는 사양인 것이다.
이보다 더 직관적인 지표는 AMD가 소개한 벤치마크 성능이다. CPU 성능을 측정하는 객관적 지표인 시네벤치 R20에서 라이젠9 3900X는 싱글스레드(단일 코어) 점수 631점을 기록했다. 앞서 언급한 인텔 코어 i9 10900K가 기록한 544점을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데스크톱 프로세서 최초로 600점을 돌파한 것이다. 인텔 CPU가 게이밍 성능에서 AMD CPU보다 우위를 차지했던 요인 중 하나가 단일 코어 성능이었는데, 이것이 역전된 것이다.
이는 실제 게임 성능에서도 확인된다. AMD가 소개한 FHD 해상도(1920x1080) 기준 라이젠9 5900X와 코어 i9 10900K간 10종 게임 성능 비교표에서는 배틀필드 5를 제외한 나머지 9종 게임에서 라이젠9 5900X가 우위를 점했다. 특히 AMD가 항상 열세였던 배틀그라운드에서 5% 이상 인텔에 비해 높은 성능을 보여줬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소문의 ‘빅 나비’ 깜짝 등장, 가격이 궁금하다
본 발표회에서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던 AMD 차세대 그래픽카드 ‘빅 나비’의 실물과 정식 명칭도 공개됐다. AMD 리사 수 CEO는 3개 쿨링팬 달린 그래픽카드를 왼손에 들고 ‘라데온 RX 6000 시리즈’라 소개했다.
라데온 RX 6000 시리즈 정식 발표일은 오는 29일 새벽이기에 이번에는 실물 외형과 간략한 게임 성능 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정확히 어떤 제품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보더랜드 3,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기어스 5 등 3종 게임의 4K 해상도(3840x2160)에서의 초당 평균 프레임 수치를 제시했는데 최소 61FPS, 최대 88FPS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RTX 3080에 준하는 빼어난 성능을 뽐낸 것이다.
물론, CPU에 비해 그래픽카드 분야에서 AMD가 선두주자를 따라잡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AMD가 도전장을 내밀어야 하는 엔비디아의 지포스 RTX 30 시리즈는 전 세대 대비 월등히 높은 성능에 이전과 다른 파격적인 가격정책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단, 지포스 RTX 30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극심한 품귀 현상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MD가 ‘가성비’를 내세운다면, 충분히 빈틈을 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야말로 진화형 아닌 완성형 될까?
AMD 데스크톱 하드웨어의 단점은 낮은 안정성이다. 인텔이나 엔비디아 제품에 비해 프로그램 호환성이 떨어져 제품 출시 초 잦은 오류가 발생한다. 실제로 3세대 라이젠 프로세서(ZEN 2) 출시 초 메인보드 제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심한 발열이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또한 전 세대 그래픽카드 라데온 RX 5000 시리즈도 고질적인 드라이버 안정성 및 호환성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AMD 하드웨어를 두고 ‘진화형 하드웨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환성이 향상되며 체감 성능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AMD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별명은 아니지만, 달리 보면 잠재력은 이미 갖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호환성 면에서 불안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인텔과 엔비디아의 높은 점유율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개선될 여지도 많다. 스팀 공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9월 스팀 이용자 중 AMD CPU 이용자가 25%를 넘어섰다. 또한 국내를 살펴보면 가격비교사이트 다나와의 자료에 따르면 AMD CPU 공급 부족이 발생하기 전인 7월까지 AMD 제품 구매자가 인텔 제품 구매자보다 많았다.
AMD와 인텔, AMD와 엔비디아의 치열한 하드웨어 경쟁은 게이머 입장에서는 희소식이다. 하늘을 모르고 치솟던 PC 하드웨어 가격이 눈에 띄게 안정화됐기 때문이다. AMD의 성능과 가격을 겸비한 맹렬한 공세에 인텔과 엔비디아 역시 신제품들의 가격을 보다 저렴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이 게이머와 친해지려는 AMD의 노력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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