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시절 심야에 동해 NLL(북방한계선)을 넘어온 북한 선박을 나포하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청와대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의 조사를 받은 박한기 당시 합참의장은 알려진 것보다 강도 높은 취조·수사 수준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합참에 “북한 선박을 나포하지 말라”고 지시한 청와대 국가안보실 고위 관계자는 김유근 안보실 1차장(현 군인공제회 이사장)으로 확인됐다.
정통한 군 소식통은 4일 “당시 박 의장은 망신 주기 수준의 의례적인 조사가 아니라 수사관들까지 배석한 가운데 청와대 인근 조사실에서 4시간여 동안 수사 수준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19년 8월 초 이뤄진 조사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이 합참의장 비서실에 연락을 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의장 비서실 측에 “북 선박 나포 건으로 의장께 간단히 여쭤볼 것이 있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며 “저희가 찾아가도 좋고 이쪽으로 오셔도 좋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박 의장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관계자가 합참에 와 조사할 경우 부하들 보기에 민망할 수 있다고 판단해 청와대 쪽으로 가겠다고 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박 전 의장은 조사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 퇴근 시간 무렵 종로구 창성동 별관에 도착했는데 조사실 분위기와 조사 시간이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고 한다. 조사실은 녹음 장비까지 갖춘 수사 시설이었고 민정비서관실 A선임행정관 외에 반부패비서관실 소속으로 추정되는 수사관 2명까지 조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2019년7월 27일 밤부터 7월 28일 새벽 사이에 북한 선박 나포를 지시한 박 전 의장의 행적과 지시 배경, 청와대 지시에 따르지 않은 이유 등을 집중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 뒤엔 조서에 날인까지 해야 했다. 당초 10여 분으로 예상됐던 조사 시간은 4시간을 훌쩍 넘겨 밤 10시 넘어 조사가 끝났다.
이날 조사 과정에서 박 전 의장과 청와대 조사관들이 ‘충돌’한 핵심 쟁점은 김유근 청와대 안보실 1차장이 박 의장에게 지시를 한 게 적절한지, 박 의장이 김 1차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게 군 통수권자(대통령)의 명령을 위배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이었다. 당시 김 1차장은 “북한 선원들이 항로 착오를 주장했는데 실제 그럴 수 있으니 나포하지 말고 북측으로 되돌려 보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반면 박 의장은 “북한 선박이 심야에 단독으로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왔고 우리 최전방 철책선과 항구 불빛 등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항로 착오를 일으킬 수 없다. 나포해 조사해야 한다”고 맞섰다고 한다.
청와대 조사관들은 “안보실 지시는 통수권자의 명령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며 “왜 지시에 따르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전 의장은 “나는 국방장관의 군령(軍令) 보좌관으로 장관을 통해 내려온 지시는 따르지만 안보실 1차장의 직접 지시를 따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봤다”고 맞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김 1차장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지는 김 전 1차장의 해명을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합참의장에 대한 안보실 1차장의 지시는 문민통제의 원칙을 허물고 군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전직 합참의장은 “작전과 관련해 청와대에서 지시하려면 안보실장이나 차장이 국방장관을 통해서 하도록 해야 한다”며 “군 작전에 대해 지휘계선을 거치지 않고 청와대 관계자가 군에 직접 이래라 저래라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한기호 사무총장은 당시 청와대가 북한 선박 퇴거를 지시하고 이를 어긴 합참의장을 조사한 데 대해 “도대체 북한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기 위해 이런 짓을 했느냐”며 “국방 태세를 와해시킨 데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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