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차주경 기자] 정보통신기술은 우리 삶의 질을 많이 높였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예술 작품을 더 가까이, 인상 깊게 즐기도록 돕는다. 먼저 발전한 것은 시각 기술이다. 미술 작품의 화려한 색상을 선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화면 기술, 고해상도 영화와 미디어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보고 즐기도록 돕는 초고속 무선 통신 기술, 수십 년 전 과거와 수십 년 후 미래 등 상상 속의 공간을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온 가상·증강현실 기술 등이 사례다.
정보통신업계는 시각 기술에 이어 청각 기술을 고도화했다. 주변의 잡음을 없애고 선명한 소리만 전달하는 노이즈 감쇄 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오롯이 음악에 집중한다. 소리를 모든 방향에서 나오도록 하는 입체 음향 기술은 몰입감과 현장감을 높인다.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예술이 종합 미디어 아트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들도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서 영감을 현실로 만든다. 작품 세계를 넓히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매료하며 함께 호흡하고 성장한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 자아낸 감동을 느끼기에 알맞은 전시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 정연두-백년 여행기》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 정연두-백년 여행기》를 소개하는 정연두 작가 / 출처=IT동아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히고, 주요 작가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목적으로 예술가 지원 사업 MMCA 현대차 시리즈를 열었다. 2014년부터 시작해 올해 10회째를 맞은 이 사업에 참여한 예술가가 정연두 작가다.
정연두 작가는 주로 ‘관계가 없는 사람과 장소,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과거 혹은 지금과 연결하면서 창작 활동으로 이어간다. 역사와 이주, 전쟁과 재난 등 다양한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를 살찌우는 요소다.
이번 전시에서 정연두 작가는 '이주의 서사'를 다룬다. 1905년 일포드라는 배를 타고 멕시코로 떠나 온갖 역경을 딛고 자리를 잡은 한국인 이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제주도에서 살다가 만난 식물 ‘백년초’에서 이번 전시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이 식물의 원산지는 중남미다. 중남미에서 자라는 선인장의 일종인 백년초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을까. 정연두 작가는 궁금증을 풀려고 멕시코로 떠난다.
멕시코 메리다를 방문한 그는 그 곳에서 우연히 815 광복절 기념 행사를 본다. 정연두 작가가 처음 느낀 감정은 위화감이었다. 멕시코 사람들이 서툰 한국어로 아리랑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느낀 것이다. 순간 그는 120여 년 전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 이주민들과 제주도에서 자라는 백년초가 닮았다고 느낀다. 이 둘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뿌리를 내린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정연두 작가는 이에 식물을 따라가는 여행기와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멕시코 이민사를 연구한다.
그가 참조한 책은 1988년 이자경 작가가 쓴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다. 정연두 작가는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 매료됐고, 이자경 작가와 만나러 미국으로 간다. 그리고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사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다.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농장에 정착한 이야기, 이들이 고향인 한국에서 배를 탄 곳인 제물포를 그리워하며 자주 말하던 탓에 멕시코에 ‘엘 제물포’라는 이름의 길이 생긴 이야기, 이들의 자손은 이미 한국어를 잊었음에도 매년 멕시코 메리다에서 광복절을 챙긴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들이 잊혀진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 정연두 작가는, 작품 활동을 벌여 이들의 이야기를 지금으로 이으려고 한다. 그가 구상한 것은 120여년 전인 1905년과 오늘날의 시간의 거리감, 그리고 한국과 멕시코의 공간의 거리감을 줄이는 전시였다.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1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에 2023년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이 귀 기울이고 공감하도록 이끄는 전시였다.
이 전시에 꼭 필요한 기술은 정연두 작가의 영감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3D 프린팅’, 특정한 장소에만 소리를 보내는 ‘지향성 음향’과 불필요한 소리의 반사를 막을 ‘흡음재’였다. 우선 그는 지향성 음향을 표현할 스피커를 찾아 나선다. 미국과 유럽 등 음향 기술 선진국 기업이 만든 지향성 스피커를 우선 썼지만, 음질과 음량의 전달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고음을 재생하면 찢어지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나거나, 잡음이 심해 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기도 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 정연두-백년 여행기》 <상상곡>에 쓰인 제이디솔루션의 지향성 스피커 / 출처=IT동아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제이디솔루션이 만든 소형 지향성 스피커 ‘클라리엘’과 만난다. 전시에 쓰기 충분한 성능을 가졌다는 판단에, 정연두 작가는 제이디솔루션 사무실을 찾아가 자신의 작품 세계와 전시 구상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제이디솔루션은 흔쾌히 협업을 수락하고, 한 발 더 나아가 클라리엘을 더욱 소형화한 지향성 스피커 ‘브릭(Brick)’을 개발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흡음재도 동성케미컬의 지원을 받아 확보했다. 정연두 작가는 두 기업의 도움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며 이들에게 연신 고마운 인사를 건넸다.
제이디솔루션과 동성케미컬, 정연두 작가가 함께 만든 결과물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 정연두-백년 여행기》 전시장 초입에 있는 <상상곡>에서 만날 수 있다. 탁 트인 공간으로 보이는 이 곳을 지나면 우선 웅장한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1905년 우리나라를 떠나 멕시코로 떠난 이주민들이 들었음직한 소리다.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별안간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위를 올려다보면 정연두 작가가 매료된 식물인 백년초의 열매와 선인장의 잎을 형상화한 작품만 있을 뿐이다.
정연두 작가는 이 열매와 잎 작품을 3D 프린팅해서 만들고, 속에 흡음재와 제이디솔루션의 지향성 스피커 브릭을 넣었다. 가장 알맞은 소리를 선명하게 표현하도록, 작품을 만들고 부수고 고친 횟수만도 50번이 넘는다고 한다. 덕분에 저음인 뱃고동 소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관람객은 선명한 속삭임 소리를 듣는다. 속삭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2023년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다.
이들은 일본어와 스페인어, 아랍어와 헝가리어 등 다양한 외국어로 희망·꿈·그리움·사람을 말한다. 전시관을 지나다가 우연히, 환청처럼 들리는 이들 소리를 접한 관람객은 대부분 발걸음을 멈춘다. 소리를 듣고 생각에 빠진 후 이윽고 깨닫는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나라에 온 이들이 120년 전 우리나라를 떠나 멕시코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과 같다는 것을. 이질적인 공간에서 그들이 느꼈을 감정이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날 관람객에게 이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정연두 작가는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이번 전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대학원 재학 시절, 그는 영국의 설치예술작가 코넬리아 파커에게 배우면서 ‘당신이 이해하는 만큼 잘못 이해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조언을 듣는다. 예술의 특정 형태를 고집하거나, 배운 것으로만 영감을 표현하지 말고 여러 매체와 수단을 적극 활용해서 작품 세계를 넓히라는 조언이었다.
정연두 작가는 이 조언 덕분에 새로운 매체를 적극 찾아 접하는 자세를 배웠고, 이번 전시회 덕분에 정보통신기술의 위력과 효용을 느꼈다고 말한다. 역사와 사람의 관계를 소리로 풀어가는 지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정보통신기술이 예술가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영감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도록 돕는다며 앞으로도 협업 기회를 적극 찾아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소감도 밝혔다.
제이디솔루션도 정연두 작가와의 협업이 유익하고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주력 지향성 스피커 클라리엘의 성능을 예술가로부터 인정 받았고, 지향성 스피커의 활용 범위를 넓힐 개인·일반용 신제품 브릭을 개발하는데 도움도 받았다고 말한다.
제이디솔루션은 지향성 음향 기술로 사람들의 삶, 예술 부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준 좋은 사례라며, 비슷한 사례를 꾸준히 발굴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어 소형 지향성 스피커 브릭의 성능과 장점을 알리면서 활용 범위를 넓히고, 이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점을 증명할 각오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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