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있어도 함부로 탈 수 없던
고급차가 있었다?
그 시절 아무나 탈 수 없던 고급차
그라나다에 대해 알아보자
국산차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최무성과 그의 동생이 드럼통과 종전 후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의 부품을 활용하여 만든 시-발 자동차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자동차 메이커들이 생겨남과 동시에, 해외에서 기술을 터득 혹은 빌려와 자동차를 생산 및 수입 판매를 한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오늘날의 자동차 시장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봐도 무방하다.
예로부터 국내 자동차 시장은 규모가 작을지라도 고급차에 대한 수요는 꾸준하게 존재했다. 신진의 코로나, 기아차의 피아트 132, 푸조 604, 대우차의 로얄 시리즈 등등 고급차 시장 내에서도 경쟁이 치열했었는데, 이 중 가장 최고 권위를 가진 고급 세단이 존재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현대 그라나다라고 한다.
글 권영범 에디터
포드 20M의
후속작 그라나다
현대차는 과거 미쯔비시 이전에 독일 포드와 기술 제휴 관계에 있었다. 때문에 과거 1960년대 국내 자동차들을 바라보면, 이국적인 디자인을 가진 자동차들이 많다는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중 현대차가 야심 차게 내놓은 포드 20M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69년부터 생산된 포드 20M은 1973년까지 생산이 이뤄졌으며, 최대 출력 106마력을 가진 V6 2.0L 엔진을 탑재하여 국내 고급차 시장 수요에 대응했었다. 그러나 20M의 경쟁상대였던 신진의 크라운에게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고급차 시장에서의 입지가 약했었다.
오일쇼크가 발발함에 따라 대한민국 상공부가 6기통 승용차 생산을 불허했기에, 현대차는 이로부터 약 5년간 고급차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5년 뒤인 1978년, 정부가 극히 제한적으로 6기통 모델의 생산을 허가했다.
내용은 6기통은 허가할 수 있으나, 3,000cc 미만이어야 하고 국산화도 20% 이상 돼야지만 생산을 허락했었다. 그리하여 현대차는 다시금 그라나다를 출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1978년 11월, 유럽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그라나다를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 한 채보다
비쌌던 그 차
1978년 11월, 그라나다의 출시 가격은 1,154만 원이었다. 당시 그라나다는 정확한 제동력을 선사하는 유압식 진공배력 2중 브레이크, 2중 라미네이트 안전유리, 충격 흡수식 4스포크 스티어링 휠, 넓고 밝은 시야를 보장하는 할로겐 램프, 우수한 로드홀딩과 승차감을 제공하는 4륜 복동식 독립 서스펜션, 파워 스티어링과 랙&피니언 타입의 조향 시스템, 인체공학설계 시트 등등 당시 구현해낼 수 있는 기술력은 다 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라나다의 경우 연간 자동차 세금도 비쌌던 차량으로 기억되는데, 1970년대~1980년대 연간 자동차세를 산정하는 항목에서 휠베이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이 무엇이냐면, 휠베이스가 긴 차량들은 고급차로 간주하고 자동차 세금을 더 부과했던 시절이 존재했단 뜻이다.
당시 그라나다의 휠베이스는 2,750mm로 요즘 중형 세단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던 휠베이스 길이는, 당시 물가로 52만 원이라는 세금을 냈다. 참고로 자료에 의하면 대우 로얄 시리즈들의 연간 세금이 13만 원 수준이라는 점을 바라보면, 확실히 크기 면에서도 그라나다가 압도적이었던 게 확실하다.
그라나다의 놀라운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술했던 1978년 출시 가격은 1,154만 원이었다. 그러나 1979년 1월부터 특별소비세가 인상되어 출시 두 달 만에 1,274만 원으로 인상되었고, 이후 부품 수입 원가가 폭등하여 1980년에는 1,512만 원, 1982년 마이너 체인지를 거치며 1,867만 원까지 오르게 된다. 가격의 인상 폭이 4년 만에 713만 원이나 인상된 것인데, 당시 31평 강남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1,847만 원이었으니 지금으로 치자면, S클래스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진 차량이었던 것이다.
높은 가격 그리고
2차 오일쇼크
1980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국가에선 대대적으로 에너지 절감 차원의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장관급 의전 차량의 ‘기통 수 제한’이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6기통 이상의 차량들은 금지하고, 4기통 차량들로 전부 교체하여 에너지 절감에 동참하라는 지시였다.
때문에 V6 모델이 주력이었던 그라나다는 1980년 이에 대응하기 위해 4기통 모델을 선보였으나, 이미 4기통 고급차량은 대우자동차가 꽉 잡고 있던 시절이다 보니 판매량은 신통치 못했다. 아울러 오일쇼크로 인한 기름값 폭등으로 인해 고급차 시장 또한 얼어붙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장남인 정몽필 인천제철 회장이 운용했던 차량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12톤 화물차를 추월하다가 차량 옆구리를 들이받히게 되는데, 사고가 나는 과정에서 차량에 화재가 발생해 당시 운전하던 기사와 정몽필 회장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비운의 차량으로도 불렸다.
결국 1985년, 그라나다는 4,743대를 끝으로 단종되었다. 국내 고급차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얻어냈지만, 저조한 부품 국산화, 오일쇼크라는 악제, 당시 국가 안팎으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던 뒤숭숭한 시기까지 맞물려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고, 2022년 오늘날에는 약 3~4대가량의 그라나다가 대한민국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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